주일낮예배

제목 ‘사랑한다’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2024-08-10 11:37
작성자 Level 10

2024811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여섯 번째 강해)

 

제목: ‘사랑한다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본문: 요한일서 4:7-12

 

서론)

 

사람은 사랑보다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엔도 슈사쿠, 깊은 강, 민음사, 293)

 

2015년에 조금은 늦깎이로 만난 엔도 슈사쿠의 걸작 깊은 강에 건져 올린 촌철살인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 소설에 대해 잠시 요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오쓰는 프랑스 리옹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에서 신부가 되기 위해 유학을 택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던 오쓰는 그가 갖고 있었던 일본적인 문화와 역사에 접목된 보편적 구원관에 대해서 프랑스인들을 비롯하여 백인 우월주의에 빠진 교리주의자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습니다.

오쓰가 가지고 있었던 일본적인 가톨릭 신앙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주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단적이고 범신론적인 구원관이라고 몰아부칩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동료들과 심지어 신학교 교수들까지 오쓰를 요주의 인물로 여겨 사제 서품을 주는 것을 보류하고 그에게 문을 열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오쓰에게 출교 압박으로까지 진전됩니다.

서구적 가톨릭 신학을 요구하는 동료들과 신학교 교수들은 일본적인 보편적 구원론에서 물러서지 않는 오쓰에게 이렇게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토록 유럽이 싫거든 냉큼 교회에서 나가면 되잖은가? 우리가 지키는 것은 유럽의 기독교 세계이며, 기독교 교회니까”(287)

물리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오쓰에게 협박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공격에 오쓰가 다음과 같이 절규한 장면은 이 소설에서 제가 받은 가장 큰 울림이자 감동의 자리였습니다.

나갈 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께 붙잡혔습니다.” (같은 페이지)

결국, 프랑스 가톨릭 당국은 오쓰에게 유럽이 아닌, 3 세계에서 사목 활동하는 것을 전제해서 사제 서품을 주고 그를 유럽 가톨릭 공동체에서 쫓아냅니다.

이런 굴곡을 경험한 오쓰 신부는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척박한 제3 세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인도의 갠지스강 유역에 머물면서 국가로부터, 힌두교로부터 철저히 버려지고 배제된 불가촉천민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이 죽으면 그들의 시신을 등에 업고 갠지스강으로 데리고 가서 화장해 주는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도무지 이해하기 쉽지 않고 동의하기 어려운 신부의 삶을 살아냅니다.

엔도 슈사쿠는 오쓰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깊은 강을 저술했습니다.

엔도가 소설에서 말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설교의 레마이기도 합니다.

 

본론)

 

그리스도께서 걸으셨고 감당하셨던 사랑하기는 명사가 동사였다는 교훈입니다.

 

신약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개진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 설명한 장()은 고린도전서 13장이 아니라, 요한일서 4:7-12절이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요한일서 4:7-12절은 핵심적인 기독교의 가르침과 관심을 다루고 있는 고전적인 본문이다. 어떤 기독교의 선생도 사랑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 그렇게 직설적이며 감동적인 어조로 말하지 못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바울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무디 스미스, 현대성서주석-요한1,2,3, 한국장로교출판사, 155)

저도 무디 스미스 교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본문처럼 상세히 적시한 성경 텍스트는 또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7절 본문은 고전적인 메시지이지만 엄청난 선언이자 신앙고백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일서 저자는 본서에서 수신자라고 할 수 있는 요한 공동체 지체를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6번에 걸쳐 호칭합니다.

그만큼 저자는 수신자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음을 피력한 셈입니다.

저자는 예수께서 육체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초대 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의 공격에서 보호하며 방어하기 위해 이 구절을 남긴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구원받는 방법은 가장 높은 가치인 지식(그노시스)을 갖추는 일이라고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저자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대단히 강력한 표현으로 일소합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기초는 영지 즉 지식을 가질 때가 아니라, 진짜로 중요한 앎인 하나님을 알 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저자는 한 발을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 속하게 되며, 그렇게 속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강조한 점은 압권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은혜인데 저자는 그 반대의 끈도 놓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8절을 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당연한 수순이자, 원리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된다면 그 반대의 수순도 너무 당연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 이런 공식이 만들어졌을까요?

기독교 진리의 마그나카르타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이제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그 사랑을 어떻게 우리에게 표현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으로 초대합니다.

9-10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성육신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동의하지 않는 자들임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저자는 만연했던 영지주의자들의 공격과 유혹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정면 돌파하며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신 동사적 사랑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보낸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인간 죄의 대속을 위한 화목 제물로 대신 드렸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고 지식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는 명사형 사랑 이해가 아니라, 자기의 아들을 직접 우리에게 보냈고, 그 아들로 하여금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하는 동사형 사랑의 실천을 직접 몸소 보이셨다고 저자는 역설한 것입니다.

이렇게 움직이는 동사형 사랑을 실천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고 인정하며 경험한 요한일서 자는 영지주의자들의 면전에서 이렇게 단호하게 다시 또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명사로 국한하는 일은 세속에 있는 웬만한 사람도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동사형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저자는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12절은 압권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위대한 영성 신학자 제임스 패커 교수는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니라는 구절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개개의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발휘된 것으로, 그들의 삶에 직접 참여하사,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구세주가 되도록 하시고, 이제 그들이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즐기도록 하신 것이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194-195)

패커 교수의 해설을 읽다가 제게 다가와 감동을 준 세 개의 단어가 있었습니다.

참여하셨다. 보내셨다. 즐기도록 하셨다.

모두가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동사형 사랑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1-4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전율하는 감동을 받습니다.

모세가 80세 되는 어느날 그는 호렙 산에 이르게 됩니다.

양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도착했는데 마침 모세는 그곳에서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데 나무가 타서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신비한 광경이었습니다.

타지 않는 나무가 신비롭게 여겨진 모세는 그 나무 근처로 가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모세는 소리를 듣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러자 모세가 얼떨결에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모세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는 이 유명한 장면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익히 알려진 본문에서 제가 받는 감동의 구절은 이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모세는 신비스러운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불이 타오르는 쪽으로 방향을 돌이켰고 그 방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그 광경을 하나님께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보신지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는 과거형 동사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추론이 가능해집니다.

모세가 아주 우연히 호렙 산에 갔는데 마침 그 때에 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를 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무대는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그 자리에 오셔서 미리 모세를 위하여 가시떨기나무에 불을 붙이셨고, 모세에게 영적 충격을 주기 위해 그 나무가 타지 않도록 배후에서 일하신 작품이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왜 이 메시지가 감동입니까?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위하여 모세보다 호렙에 먼저 오셨고, 모세를 위한 시나리오를 짰고, 그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움직이셨다는 점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다음 주일에 살필 텍스트인 19절에서 저자는 먼저 일하시며 움직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래서 이렇게 감격적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나태주 시인이 발표한 내가 너를을 감상해 보겠습니다. (나태주,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12)

내가 너를/얼마나 좋아하는지/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오로지 나의 것이요/나의 그리움은/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나는 이제/너 없이도 너를/좋아할 수 있다.

시인의 노래가 마치 오늘 주님이 나에게 동사적으로 행한 사랑의 고백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가스펠 가수인 소리엘이 부른 찬양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함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못 잊어 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욕되게 하리요

 

아무도 너를 만질 수 없음을

내가 너를 사랑함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욕되게 하리요

 

아무도 너를 만질 수 없음을

내가 너를 사랑함이라

 

우리 모두 이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