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 『마음의 주인』을 읽고 (말글터 간, 2021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바꿀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과 바꿀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4쪽) 출신 교회 선배께서 39세 나이에 조직교회에 청빙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게 이렇게 농 반 진 반의 충고를 하셨다. “이 목사, 조직교회에 부임하는 날은 정신과 병동 원장으로 취임하는 날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선배의 말을 듣고 나서는 어렴풋하게 그 말 뜻의 의미를 가늠했지만, 이후 지속된 조직 교회 목회의 현장에서 비로소 선명하게 경험했다. 상식이 비상식이고, 비상식이 상식이라고 윽박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장, 또 그런 이들이 교회를 장악하여 교회를 전혀 교회답지 않게 하는 서글픈 일들을 적지 않은 목회자들은 다반사로 경험한다. 젊은 나이에 이런 일들을 경험할 때면 충돌했다. 적어도 이런 온전하지 못한 일들과 타협하면서 목회하려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는 의기(義氣)로 항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의 연륜이 깊어지고, 지천명을 넘어 이순의 나이에 들어서고 보니 마음으로 다시 새기는 것이 있다. 이기주 작가의 지론 그대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내버려 두기, 그리고, 바꿀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받아들이기다.” 타협이나 굴종이 아니라. 그게 내 일이 아니라, 주군의 일임을 뒤늦게라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앞서 인용한 글을 소개하며 글마무리를 이렇게 한다.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책, 164쪽) 이기주의 글을 출간되는 대로 모두 섭렵했다.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 『한때 소중했던 것들』, 『글의 품격』 등등이다. 필자가 저자의 글말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글에는 ‘삶으로 말하는 부대낌’이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수사어구가 동원되지 않는다. 현란한 문체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어휘들을 구사하지만 그의 글에는 따뜻함이 있다. 격려와 위로가 있다. 더불어 치유하는 능력도 있다. 그래서 까칠한 언어로 말하고 표현하는 나에게는 적지 않은 도전과 자극을 주기에 그의 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본서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저자는 〈귀고프다〉에서 이렇게 적시했다. “내 슬픔을 헤아리는 사람이 들려주는 말, 세상이 날 외면하는 순간에도 온전한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귀를 가득채우며 살아야 한다.” (207쪽) 글말을 읽다가 이런 소회에 젖어 보았다. 목사라는 직을 갖고 30년 이상을 살아온 나, 나는 귀고픈 자들에게 귀 고픔을 해결해 주는 말들을 전달해 주었는가? 주군께서 유리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시면서 언제나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스플랑클니조마이)으로 다가서서 만지시고 선포하셨던 그 말을 내뱉었는가를 복기해 보았다. 저자가 말한 그대로 말은 품(品)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품(品)을 품고 있는 격(格)의 사람이었는가를 깊이 성찰해 보았다. “개인을 의미하는 단어 ‘individual’엔 어원적으로 ‘더는 나눌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모두 실존적 단독자로서 개별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120쪽) ‘divide’(나누기)를 ‘in’(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절체절명의 비장한 마지막인 그 무엇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예외없다. 이것을 갈파한 저자는 사람의 마지막 그 무엇은 단독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필자도 부분 동의한다. 부분 동의의 의미는 마지막 내가 갖고 있는 정신과 가치는 적어도 내게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동의다. 저자는 여기까지만 정의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여백이다. 하지만 목사로 살고 있는 필자는 ‘더는 나눌 수 없는 어떤 것’이기에 비장하기도 하고 소중하다고도 한 내 가치의 마지노선을 궁극적으로 꽃피울 수 있는 또 다른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개인의 가치를 바로 주군의 가치로 승화시기는 연합(coliation)이다. 내 개인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에 대해 나 또한 부분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위험성이 있다. 내 가치만 소중하다고 여기며 이타적 소중한 가치를 무시할 때, 그게 바로 ‘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괴물로 변질된다는 위험성이다. 이것을 알기에 저자의 글말을 읽다가 다시 한 번 결기해 본다. ‘individual’이 끝까지 소중하기 위해서는 주군과의 ‘coliation’이 필수적임을 말이다.
“사랑의 대상은 대체될 수 없다. 다른 인물로 대체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대체되지 않는 존재는 특별하다. 특별하기 때문에 궁금하다.” (70쪽) 저자의 지론이 확고부동하다. 이번에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한 번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대상도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저자의 일설은 적확하다. 이런 차원에서 사랑은 언제나 그느러야(돌보고 보살펴주다) 한다. 아침의 생각이 저녁의 생각으로 바뀌면 그건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한 사랑이 아닌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섬기는 교회의 2024년 표어를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교회’라고 정했다. 교회가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대상은 ‘한 영혼’이다. 그 한 영혼은 주군께서 끝까지 사랑하시기로 마음 먹은 대상이다. 그 사랑의 대상은 대체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한 영혼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말대로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주체자는 사랑하기로 한 객체인 그 영혼에 대해 궁금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며 특별하게 대할 이유이기고 하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이 글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관하여 물어야 할 물음은 하나님은 어디에 있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어디 있었는가?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인가?』, 한국기독교 연구소, 226쪽) 벼락 맞은 느낌이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종하고 고의로 망각하려는 일체의 장소는 제 2의 아우슈비츠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셀은 굽히지 않고 이렇게 이어 선포했다. “아우슈비츠는 우리의 정맥 속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에 고동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불태운다. 우리의 양심 속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 (위의 책, 227쪽) 오늘의 아우슈비츠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뿐이다. 이제 글을 맺으려 한다. 재론하지만, 이기주의 글말은 너무 따뜻하다. 비상식이 상식이라고, 상식은 비상식이라고 우겨대는 오늘을 밝혀주는 글의 힘이 넘쳐난다. 2024년을 시작하는 1월, 『마음의 주인』을 독자들의 마음 속에 집어 넣으면 멋 있는 한 해의 출발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24년 한 해도, 나사렛 공동체 지체들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솟구치기를 중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