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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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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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12-07 11:2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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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예언자들』을 읽고 (삼인 간, 2004년) 괜히 손댔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이 갖고 있는 유대 신학적인 철학적 사유는 가능한 손 대면 안 되는 것이었음을 책을 덮고 다시금 절감했다. 하지만 대단한 역설이다. 그런데 손대고 싶었으니 말이다. 700페이지를 호가(浩歌)하는 엄청난 분량으로 표현된 헤셀이 갖고 있었던 사유함을 터치하는 것은 목사로 살고 있는 한, 내가 해야 할 예의라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돈키호테식의 발상 때문에 일을 저질렀는데 결론은 이렇다. 헤셀을 평(評)하고 있는 나는 너무 대견하다. 현직 목회자이니 쉴 수 있거나, 꾀를 부리거나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목회 현장은 말 그대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공간이고, 치열함의 전쟁터이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는 곳이 목회의 내용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콘텍스트인 현장이다. 이것은 그럴듯한 핑곗거리가 된다. 바쁘기에 성찰이나 사유라는 사치와 어울릴 수 없다는 논리로 말이다. 필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꼼수를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약 3개월 어간, 헤셀과 씨름했다. 대단히 건방지게도 이미 섭렵한 그의 책들, 가령 예를 든다면 개신교 목사이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게 했던 ‘유다이즘’의 정수를 나름 살피게 해준 『어둠 속의 불꽃, 한국기독교연구소 간』을 비롯하여, 설교준비를 함에 있어서 탁월한 혜안을 주었던 쌍두마차 『하느님을 찾는 사람』과 『사람을 찾는 하느님』은 내게 대단히 훌륭한 선생이 되어 주었다. 동시에 유대신학적 관점에서 인간론을 조명하게 해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와 『누가 사람인가』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니면 그 외의 타 종교를 신봉하는 자든 상관없이 구도자의 참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헤셀의 수준 높은 지성적 영성을 기초로 한 탐구로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열거한 그의 수작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안식』이었다. 내게 의미 있는 공부를 하게 했던 수훈 갑이었다. “안식일은 한 계명을 이행하는 기법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안식일은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현존, 인간 영혼에 개방된 하나님의 현존이다. 영혼은 애정을 다해 응답하고, 성별 된 날과 교제할 수 있다.”(안식, 복 있는 사람 간, 127-128쪽) 엄청난 성찰이자 영성적 혜안이다. 내가 헤셀을 좋아하는 이유다. 안식일의 개념을 ‘욤’ 즉 ‘날’ 의 개념으로 고정화시키지 않고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영역으로 그 의미를 확대한 갈파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토로가 아니다. 『예언자들』 책에 적시된 글 말 중에 어떤 것을 수면 위에 먼저 올려놓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글쓰기를 준비하면서 부심(浮心)했다. 그러다가 머뭇거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이 문장을 제일 먼저 내어놓는다. 헤셀은 이렇게 감히 단언했다. “성경이 보여주는 인류의 전 역사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역사(The history about God who search of man)다.”(626쪽) 이렇게 갈파한 헤셀은 또 다른 지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 갖기(making meaning)’ 작업을 한다. “이스라엘 신앙은 하나님을 추구한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발견하셨다. 성경은 인간에게 접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다.”(627쪽) 예언자가 누구인가? 헤셀의 말로 답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한 사람이다. 어떻게 부르셨는가? 헤셀은 예레미야 1:4절로 답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자가 임한 사건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로 돌아서는 것” 그렇다면 예언자만이 체득할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감동이 있다. 헤셀은 이렇게 해제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하나님을 경험한 인간이다.” (600쪽) 목사라는 직을 갖고 삶을 살아온 지 이제 3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직전에 섬기던 교회 공동체 안에는 교회와 목사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인식을 하는 자들이 제법 많았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은 그런 이들이 교회 중직으로 있었다는 재앙이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내게 도발했다. “목사님, 목사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자입니까? 아닙니까?” 이 질문은 이미 그가 답을 정하고 던진 질문이었기에 그런 이와 대화와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이미 귀를 닫은 자에게 무슨 소리가 들리겠으며, 필요하겠는가? 이것을 알았기에 그치와 논쟁하기 싫어서 이렇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구약의 예언자가 어떻게 목사일 수 있겠습니까? 벌써 단어도 다른데, 절대로 아니지요. 그런데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예언자는 아니지만 분명히 목사입니다.” 내 답변의 의미를 그치가 알 가능성은 제로 퍼센트다. 목사가 누구일까? 나는 이 질문을 31년 동안 해 왔다. 그리고 은퇴를 이제 불과 6년여 앞두었기에 목회의 필드를 정리해야 하는 시기에 들어서서야 어렴풋하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사란 내게 등 돌려주신 하나님께 나도 성실하게 그분 쪽으로 등 돌리며 반응하는 자다.” 이렇게 반응한 자들을 헤셀은 책의 전반부에 소개하면서 그들을 『예언자』라고 지칭한다. 『예언자』들의 면면과 삶, 그리고 그들의 말들을 헤셀은 1-8장에서 낱낱이 소개한다. 이 책에 관심을 갖는 독자라면 1-8장에 기록된 ‘나비’들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발견하리라 단언한다. 하지만 필자는 1-8장에 소개된 각각의 『예언자들』에 대한 소개보다 더 관심을 갖고 독서한 필드는 2부에 해당하는 텍스트였다. 개신교 신학의 입장에 굳게 서 있는 목사로서 2부에 수록된 헤셀의 갈파들을 접하면서 양가감정이 들었다. 그것은 감동과 질문이었다. 감동은 동의의 의미이고, 질문은 부동의의 의미였다. 읽다가 무릎을 친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하느님은 신비 너머에 있는 의미(meaning)다” (360쪽) 유대 신학과 개신교 신학이 공동으로 인정하는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신비 자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너머에 존재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주 가끔은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 방식 때문에 열광한다. 인간에 의해 적나라하게 해석되고 까발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만에 하나 내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존재라면 나는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헤셀의 말대로 하나님은 신비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여백은 그 신비 너머에 여전히 존재하시며 의미로 계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나는 하나님이 하나님임을 믿는다. 글을 쓰다보니 고등학교 시절, 감성적인 마음으로 웅얼거렸던 닐 세다카가 부른 명곡이 생각이 난다. “You mean everything to me.” 그렇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의 존재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반대의 존재를 나타내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하느님은 신비와 의미로 머물러 있지 않으시는 존재라는 말이다. 헤셀은 하나님이 신비이자 의미 자체이심에 대한 존재 방식을 수용하지만, 그분의 존재 방식을 그의 독특한 언어인 ‘정념’ 즉 ‘pathos’로 설명한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말미암아 동요되고 영향을 받으며 거기에 따라 반응하신다. 인간의 행실과 사건들이 그분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즐겁게도 하고 분노하게도 한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심판관이 아니다. 그분은 가까이에서 주체적으로 반응하시며 그럼으로써 모든 사건과 가치를 결정하신다.”(355쪽) 기실, 헤셀의 말은 신선한 갈파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인데 그런데도 따뜻하게 적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개신교 신학에서 강조되어 온 하나님의 ‘파토스’를 ‘신비 너머에 있는 의미’와 함께 잇댔기 때문이다. 헤셀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독서하는 내내 헤셀에게서 이런 균형과 융합을 보았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탁월했지만 헤셀이 언급한 『예언자들』이 전한 신탁에 대한 접근 방법은 개신교 목사인 나는 대단히 신선했다. “예언자 본인이 의식하기에 예언 행위란 언어, 사유 혹은 상징으로써 메시지가 전달되는 통화의 행위다. 메시지의 내용을 예언자가 충분히 이해하느냐, 그것이 자기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느냐, 그리고 그와 하나님 사이의 교합 또는 만남, 즉 메시지가 그에게 전해지는 형식이 예언자의 통화 행위를 결정짓는 요소들이다. 바로 그 만남이 예언의 성격을 특징짓는다.” (614-615쪽) 오 마이 갓! 번역자인 이현주 목사의 번역 능력이 너무 탁월한 것도 이해의 몰입도를 주는 데 기여했겠지만, 헤셀이 갈파한 이 명징한 문장은 2023년을 목사로 살아가는 내게 아주 오랫동안 그 여운을 진하게 줄 것 같다. 왜? 적어도 이 정도의 깊이를 주군과 나누는 소통자가 어찌 변질될 수 있으며, 어찌 변질된 吉 예언자의 삶을 유지하려고 하겠는가를 통절하게 절감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이 소통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너무 부러웠다. 하나님의 파토스를 예언자의 파토스로 반응한 관계 설정, 너무 귀하고 부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헤셀은 이렇게 예언자들이 온통 집중했던 영적 모드는 기막힌 문장으로 단문화했다. “하느님의 돌보심과 관심” (681쪽) 펜데믹 3년을 흘려보내면서 한국교회에 임한 재앙은 “하느님의 돌보심과 관심”이 상업화되었거나, 무력화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서 현장 목회자 역시 만히 지쳐 있는 게 사실이다. 교회 리서치 기관에서 2024년 목회 트렌드에 대한 고찰, 이것을 기초로 한 재생 목회의 스킬과 방법론을 수없이 제공하고 있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방법론을 믿고 지지하지 않는다. 이런 오기가 내겐 있다. 예언자들이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이라는 신탁의 화두는 펜데믹 3년이라는 재앙의 시기를 보낸 한국교회에 유효한가에 대한 질문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민감성을 잃지 않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수해야 하는 방법임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 말이다. 나의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늘 항상 관계 안에 계신다. 그 관계를 이렇게 말해준 헤셀이 너무나도 고맙고 고맙다. “예언자들이 경험한 것은 그분의 있으심이 아니라 그분이 하신 말씀이다.” (683쪽) 방대한 책 분량의 결어 부분에 삽입된 헤셀의 이 갈파를 읽다가 울 뻔했다. 왜? 나는 잘 걷고 있는 것일까? 내가 가는 길은 후회하지 않는 길인가를 물으며 수없이 회의(懷疑)했던 내 목양의 세월이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기에 말이다. 저자는 그의 또 다른 책인 『어둠 속에 갇힌 불꽃』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하느님의 부재는 하나의 환상이다.” (헤셀, 『어둠 속에 갇힌 불꽃』, 35쪽)
하나님이 환상이라고 부추기는 오늘, 나는 신비 그 자체이자 그 너머에 있는 의미로 날마다 내게 다가오셔서 말씀으로 말씀해 주시는 나의 주군이 계셔서 행복하다. 이것에서 흔들리지 않으니 나는 분명히 행복한 목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