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차준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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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새물결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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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10-20 09:4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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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희 박사의 『시인의 영성 3』을 읽고
2주 전에 친구가 집필한 『시인의 영성 3』이 집에 도착했다. 본인 스스로가 자칭했듯이 ‘구약 전도사’로 평생을 살면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을 위해 꾸준히 연구한 결과물들을 내놓은 친구가 이번에 출간한 시편 연구 시리즈의 마무리 책인 『시인의 영성 3』은 친구의 눈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고가 담보되어 있는 수작이다. 필자는 지금 섬기는 교회 가을 대심방 사역을 행하고 있다, 모든 목회자가 동일하게 겪는 일이겠지만, 대 심방 사역은 체력 소모가 극대화되는 일이기에 육체적인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인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지체 한 명이 뇌출혈로 인하여 심각한 상태에 있기에 나름 영육이 매우 긴장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 편두통이 조금 뜸하다 싶었는데 다시 공격이 심해져서 싸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최선을 다해 집필한 연구 결과물인 것을 알기에 동시에 나 또한 시편 공부를 소홀이 할 수 없어 저자가 보내준 세 번째 책을 틈이 날 때마다 치열하게 독서한 끝에 오늘 숙제를 마쳤다. 리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제할 게 있다. 책을 출간하는 저자 중에 370페이지를 넘긴 저자들은 집행유예가 없는 무기징역에 처해야 한다. 이것을 전제할 때, 600페이지를 넘긴 저자들은 사형을 언도해야 마땅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준 죄값이다. 작년 스티븐 핑거의 『빈 서판-사이언스북스 간』을 읽다가 책을 여러번 던졌던 기억이 있다. 분명히 심리학 저서이기에 문과적 기질인 있는 나는 책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있을 것으로 믿고 책을 섭렵했는데, 과학적인 메소드를 기초로 한 진화심리학적인 공간을 넘나든 저자의 일설들로 인해 무려 800페이지를 고문당하듯 독서를 마치고나서 책 뒷면에 이렇게 사족을 남겼다.
“미친 놈에게 내 모든 정력을 빼앗겼다. 하지만 스티븐 핑거는 또 다른 내 선생님의 자리를 꿰찬 혁명자다.”
근래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스라엘이 이기기를 바라며 심증적으로 이스라엘을 내 편으로 정의하며 살았다. 하지만, 작년 3월에 코로나에 걸려 육체적으로 너무 안좋은 시기를 보내며 격리되어 있을 때 접했던 텔아비브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슐로모 산드가 쓴 『만들어진 유대인-사월의 책 간』을 읽으면서 너무 통쾌한 역사적 서설을 만나 기뻐했던 기억이 오롯하다. 유대민족이라는 상용구에 담긴 정치공학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저자 덕에 이스라엘에 대한 스펙트럼을 균형감 있게 자리배치를 할 수 있었던 그 감동이 지금도 스멀댄다. 하지만, 거의 700페이지에 육박한 도서를 코로나 전염시기에 읽어서 그런지 무시무시했던 영육의 치열함으로 수고의 수고를 행했던 기억이 있다. 늦깍이로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예언자들-삼인 간』을 지금 은혜롭게(?) 여행하고 있다. 이제 후반부에 다다랐는데 내게는 결코 천박하지 않은 유대철학적인 스펙트럼으로 조망한 ‘나비’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 행복을 선사했다. 개인적으로 독서를 완독하면 이 책 역시 리뷰를 남길 요량이다. 이미 세뇌되어 있고, 학습되어 있는 예언자에 대한 이미지를 180도 바꾸어 줄 수 있는 수작이기에 그렇다. 왜 좋은 책들은 700페이지를 호가하는지 모르겠다. 헤셀도 역시 나를 괴롭히고 있다. 『시인의 영성 3』은 600페이지를 넘긴 책이다. 역시 사형감이다. 독서에 어느 정도 훈련되지 않는 독자들은 본서를 끝까지 읽으려면 순교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재미도 없다. 그러니 이 책을 완벽하게 섭렵하려면 갈멜 산상에 홀로 선 엘리야의 고독함이라는 밑가지를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 없고 적지 않은 수고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당위가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두 가지만 피력한다.
첫째, 시편 본문에 접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어원적 이해를 돕기 위하여 대단히 집요하게 연구된 어원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수고는 현장 목회자들의 눈높이 맞추어 히브리어 원문에 대한 제 2차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언젠가 한영신대 정석규 교수가 쓴 구조로 『구조로 읽는 창세기』, 『구조로 읽는 말라기』 등등의 책을 독서하다가 구약학자가 본 놀라운 구약 나레이션의 틀 구조를 만나고 무릎을 쳤던 적이 있었다. 이렇듯 구약학자는 목회자에게 질 좋은 서비스를 준다. 그들의 운명적인 기여이기도 하다. 본서는 목회자들이 흔히 접근하기 어려운 성서원어의 2차적인 정보를 친절하게 나레이션 해 준다. 실례를 몇 가지 든다면, 시편 119편과 137편의 해제 같은 경우다. 히브리어 알파벳 22자 중에 각 8절씩 순서로 열거하며 노래한 시편 119편에 담겨 있는 176절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이렇게 말이다. “알렙(א): 단락의 중심 단어는 1-2절에 첫 단어인 ‘복이 있음이여’ 즉 ‘아쉬레’(י????????????)다. 야웨의 토라 안에서 온전하게 길을 걸어가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261쪽) 그 유명한 시편 137:1-3절을 하나 더 살펴보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저자는 1,3절에 등장하는 장소 부사 ‘샴’ (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준다. “1,3절에서 ‘거기에’를 반복 사용한 것은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유배 장소를 소환하며 강조하기 위함이다.” (485쪽) 기실, 한 지역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현장 목회자로 살면서 시편 137편의 장소적 배경이 바벨론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저자가 서비스 해 준 ‘부사’에 대한 설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간과할 수 있지만 우리 목회자들이 자칫 잘못하여 실수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다잡이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본서는 대단히 고무적인 공부 자료가 되어준다.
둘째, 본서는 포로기 이전후 이스라엘 역사의 폭을 두루 다룸으로서 오늘 우리들이 처해 있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신학적으로 조망해 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다.
시편 105편은 역사시다. 장엄한 이스라엘의 역사서시다. 시인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노래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노래의 내용이 ‘구속 역사의 회고’라고 저자는 일설한다. (83쪽) 맞다. 대단히 적확한 설명이다. 특히 105편을 읽을 때, 필자에게도 임한 역사성에 대한 이해는 12-13절에 기록된 이 단어로 대변할 수 있다. “그 때에 그들의 사람 수가 적어 그 땅의 나그네가 되었고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떠돌아다녔도다” ‘나그네(דו????)’였던 이스라엘, ‘떠돌이(????????????)’였던 이스라엘이었다고 시인이 술회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자화상을 의미하는 고백이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체성의 한 면은 “소외되고 억압받고 소멸되기 십상인 소수의 약자”(88쪽)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알렌 파페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라는 땅에 영국이라는 지배 계층의 묵인하에 들어온 침입자다. 물론 가나안 전쟁이라는 화두로 이야기를 한다면 또 다른 신학적 논쟁이 야기되기에 이 면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지금의 이스라엘을 이루기까지 ‘구르’였고, ‘하라크’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2023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구르’와 ‘하라크’로 몰아세운다. 적반하장이다. 저자는 시편 105편의 메시지를 이렇게 담지한다. “이 시는 하나님의 생활방식을 온 세상이 보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런 삶의 기초는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 하신 말씀, 베풀어주신 은혜를 두고두고 기억함으로써 세워진다.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마음에서 꺼낼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돌보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98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팔레스타인 자치 관할 지역에 거대한 담을 만들어 원래 주인들을 거대한 감옥에 수감한 일들부터 풀었어야 그들이 자신들이 나그네였고, 객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지금 이스라엘은 대단히 근본주의적인 민족주의라는 틀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괴물들이다. 약간의 틀이 어긋났지만, 다시 중심으로 돌아온다면 본서를 통해 올바른 신학적 역사 이해를 하기 위해 저자가 애쓴 흔적이 보인다. 혹자들은 저자가 역사성 이해에 대해 너무 보수적인 틀로 해석한다고 비판하는 경우들을 본다. 필자는 저자의 베프이기에 이런 비평적 성찰을 만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한 가지 변론하자면 지근 거리에서 저자와 함께 동역하는 관계를 오랜 시간 가져온 친구이기에 친구의 역사성은 근본주의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진적 진보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지도 않기에 그렇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역사에 대힌 비평적 성찰은 서울신학대학교에 학부를 졸업한 보수적인 기저가 있는 사람으로, 동시에 한세대학교라는 보수적인 틀 안에서 교수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균형의 추를 잃지 않고 올곧게 달려가려고 노력한 대단히 선방한 신학자임을 대변해 주고 싶다. 이제 나도 한 마디를 하자. 친구의 글을 세 번째로 읽으면서 지난 1,2권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냥 여백으로 남기고 싶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2%의 부족함으로 여겨지기에 마지막 3권에서는 피력해 본다. 엄청난 양의 시편 연구 결과물이 본서다. 일반 목회자들이 참고하고 덮을 시편 설교의 가이드 라인으로 본서를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본서는 작금 존재하는 여타 다른 시편 관련 채들에 비해 신학적, 구약석의적으로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필자도 본서 1,2권을 대단히 유효하게 참고하고 유익한 도구로 사용했다.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다. 그런데 왜, 풋 노트가 이렇게 빈약하지! 책에 후면에 실린 참고문헌 안에 있는 도서 목록을 통해 본서는 탄생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왜 저자는 풋노트를 독자들에게 세밀하게 선물하지 않았는지 유감이다. 필자는 필독도서 목록을 정할 때, 필이 꽂힌 책과 사랑에 빠질 때, 항상 그 책의 저자나, 혹은 책 안에서 밝힌 관련된 알고리즘을 세밀하게 살피는 편이고, 그 작업을 통해 그 다음 독서 목록을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친구의 글을 chapter by chapter 하면서 조금은 더 깊이 연구하고 싶은 생각이 든 부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목을 연구할 수 있는 대체적이고 연속적인 자료가 풋 노트에 생략되어 있기에 대단히 아쉬웠다. 친구 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친구야, 시인의 영성 시리즈는 학술적인 세밀함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에게 시편 연구에 대한 접근성을 조금은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기에 그렇게 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말하면 조금 더 화날 것 같다. 목회자는 현장 신학자다. 더군다나 나는 설교 문을 작성하고, 본문을 연구할 때마다 그 시원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는 학자들을 존경하고 박수를 치고 싶은데 그 작업을 하지 못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기에 그렇다. 매우 아쉽다. 제 2차 자료들에 대한 권위와 그 무게감을 무시하고 구렁이 담넘어가는 식으로 글을 쓰고 읽게 만드는 일은 재고되어 한다. 현장 목회자도 학술적인 연구 논문이나 자료에 관심이 많다. 무시하지 말라.
ps
1. 이렇게 일설하고 나니 나이탓인지 친구가 실망할 것 같아 사족 하나를 단다. 차준희 교수의 시인의 영성 1,2,3 시리즈는 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사역하는 동역자라면 서고 가장 가까운 곳에 눈에 보이게 꽂아두어야 할 수작이다. 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렇게 했다. 거의 1,700페이지의 지면에 혼신의 힘을 다해 구약 전도사로 기꺼이 헌신해 준 친구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2. 북 리뷰를 쓸 때마다 길게 쓰지 말라고 주야장천 잔소리를 해대는 필자에게 리뷰까지 써주고 욕 먹기 싫어 하고 싶은 글 나눔이 너무 많지만 약했다. 독자들이여, 돈 주고 직접 구입하면 읽지 않을 때 아까운 생각이 들어 꼭 도전한다. 애 경우가 그렇다. 꼭 섭렵해야 할 시편 연구의 수작을 구입하여 읽기를 기대하며 독자들에게 『시인의 영성 3』을 기쁨으로 강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