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작별인사2024-06-11 10:25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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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영하
ㆍ출판사 복보서가
ㆍ작성일 2023-09-30 17:12:41

 

김영하의 『작별인사, 복복서가 간, 2022년』을 읽고


사석에서 동기 목사와 대화를 하다가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목사, 쳇-지피티보다 좋은 목사가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이제 둘 중에 하나가 되는 시대가 됐다. 살벌하다.”
얼마 전에 읽은 글이다.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알려진 쳇-지피티가 앞으로는 설교까지 맞춤형으로 제공할지 모른다. 설교자에게 위기다. 설교자가 쳇-지피티보다 훨씬 수준에 떨어지는 설교에 만족하는 바보가 되든지, 쳇-지피티가 제공하는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가 되든지, 또 아니면 완전히 창조적인 설교자가 될 수밖에 없다.” (김기석, 『말씀 등불 밝히며』 중에서 정용섭 목사가 밝힌 느헤미야-잠언의 해제에서, 201쪽)
바야흐로 목사도 인공지능과 싸워야 하는 시대라니, 유구무언이다. 절절히 바란다. 세 번째 목사가 되기를.
저자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도대체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보편타당한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인문학의 시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외연을 확장하여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21세기 중후반과 앞으로 펼쳐지게 될 22세기에 또 다시 치열하게 묻게 될 주제이자 범위로 남을 것은 여전하다. 20세기까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슈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대두되었다,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관계성이다. 
필자가 첫 번째 졸저(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간, 2016년)를 출간할 때, 책에 세계적인 IT 전문가인 니콜라스 카의 저작인 『the shallows』 에 대한 북 리뷰를 담았다. 카의 책을 독서하다가 밑줄 친 그의 예언적 성찰을 지금도 기억한다.
“구글의 온라인 세상에는 깊이 있는 읽기를 위한 생각에 잠긴 침묵이나 명상의 애매모호한 우회성은 발 디딜 틈이 거의 없다. 모호함은 통찰력을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고쳐져야 할 버그다. 인간의 뇌는 더 빠른 프로세서와 더 큰 하드 드라이브, 그리고 사고 과정을 조종할 수 있는 더 나은 알고리즘이 필요한 구식 컴퓨터에 불과하다.”(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청림출판, 2014년, 255쪽) 
전 세계의 IT 업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CEO가 2014년에 행했던 이 발언은 과유불급이었다. 구식 컴퓨터의 불과하다고 냉대했던 인간의 뇌는 인공지능이라는 괴물을 탄생시켜 이제는 인간을 통제할 능력까지 갖춘 무시무시한 21세기의 Big Brother로 자리를 잡았다.
‘인공지능’이라고 번역되는 영어단어는 ‘Artificial Intelligence’ 즉 AI다. 저자는 소설에서 중요한 네 명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AI 연구소 연구원으로 독보적인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천재 과학자 최진수 박사, 그에 의하여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하이퍼 리얼 휴먼 노이드이지만 아들로 명명된 철이, 半은 인간이고 또 다른 半은 기계인 클론 선이, 그리고 순전한 기계인 휴먼 노이드 민이라는 인물 사이에서 일어난 가상현실을 토대로 만들어낸 휴먼 스토리(?) -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 인간이 주인공인데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서 붙였다. - 가 소설의 줄거리다. 지금은 가상의 현실로 정의되지만 조만간 멀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 얼마든지 가능성이 농후한 메시지를 저자는 천재적 기법으로 전개해 나간다.
휴먼 매터스 랩이라는 연구소 안에서만 지내던 휴먼 노이드 철이는 음악회를 보기 위해 아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외출을 했다. 철이는 자기 스스로가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가 연구소 바깥이라는 장소로 외출한 그날, 인생이 뒤바뀐다. 철이가 찾았던 그 바깥에는 휴먼 노이드들을 관리하는 자들인 민병대원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고, 결국 본인의 몸에서 기계인간임을 노출시키는 붉은색 ‘R’이 관리자들이 들이대는 리모컨을 작동할 때마다 선명하게 모니터에 나타나는 탓에 비로소 본인이 하이퍼 리얼 휴먼 노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봇인간을 관리하는 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로 강제로 구인된 철이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최진수 박사의 의도에 따라 무 등록된 휴먼 노이드 상태였기에 그의 신병처리는 더 법에 의해 가중처벌 될 신세에 놓이게 된다. 수용소에 구금된 철이는 그곳에서 인간에 의해 무자비하게 다루어지는 로봇 인간들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체험하고 자기 역시 그들과 같은 류(類)라는 사실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은 물론, 그 동안 속아 왔다는 것에서 오는 분노, 그리고 인간들의 편리에 따라 해체되는 휴먼 노이드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아픔을 동시에 교차 경험한다.   
철이는 수용소에서 만난 인공지능 기계인 민이가 인간 민병대원들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목도한다. 이런 엄청난 일을 수없이 경험했던 클론 선이는 인간들이 자행하는 폭력에 분노하며 그들이 철저히 파괴한 민이의 몸을 다시 원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인공지능의 리더이자 재생 휴먼노이드의 리더인 달마에게 요청한다. 하지만 다시 재생된다면 또 반복되는 고통을 당하는 휴먼 노이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 달마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달마와 선이 간에 벌어진 격렬한 토론의 장에서 보여준 대화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저자의 천재적 혜안이 담겨 있다. 나 또한 이 대목을 독서하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마치 친동생처럼 여겼던 민이의 기계 몸이 망가진 뒤에도 다시 민이에게 움직일 수 있는 유기체적인 AI 휴먼 노이드로 재생시켜줄 것을 강력하게 희망하는 선이의 요구에 대해 이렇게 달마는 반문하며 반대한다.
“저는 의식을 가진 존재, 특히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바다의 물고기이든 하늘의 새든,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휴먼 노이드들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고통도 없었을 테니까요.”(148쪽)
이런 철학적인 의지를 갖고 민이의 재생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달마에게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클론 선이의 도전은 의미심장했다.
“민이는 아예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아니니까요. 민이는 이미 태어났고 말씀하신 것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지요. 저는 민이가 다시 의식을 회복해서,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다시 깨어나 그것의 의미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다가, 누군가로부터 폭력적으로 살해당하지 않고, 자연이 정해진 수명을 다하게 될 때까지 자연스럽게 우주의 일부로, 다시 의식과 영성이 없는 존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거예요.” (150쪽)
선이는 민이가 다시 재생되어야 할 타당성을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간다.
“이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로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151쪽)
독서를 하면서 놀라웠던 일은 저자가 앞으로 반드시 일어나게 될, 그리고 머지않아 보게 될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관계를 예언적 성찰로 다루면서 독립적이지만 인격적 관계로 그렸다는 점이다.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상황에 따라 제거되고 또 다시 만들어지는 인공지능들을 격하하거나 비인격적인 기계로 폄훼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반전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인격적일 수 존재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달마가 자신의 뜻을 굽히고 선이의 말대로 민이를 재생하기로 마음먹으면서 토설한 내용은 인간으로 살고 있는 나를 숙연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압도적으로 생산해내는 존재는 바로 인간입니다. 물론 사자도 영양의 목을 물어뜯고, 배부른 곰도 재미로 연어를 사냥해 눈알만 파먹고 던져 버립니다. 그러나 누구도 인간만큼 지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른 종을, 우리 기계까지 포함해서 착취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야생동물을 가축화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수로 번식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이 무수한 존재들은 아무 의미 없는 생을 잠시 살다가 인간을 위해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걸 멈추려는 것입니다.”(153쪽)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이 광활한 우주에 호흡이 있는 존재로 탄생한 가치들 중에 의미 없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단언하건대 없다. 심지어 인공지능이라는 기계마저도. 결론이 이렇다면 가치 있는 존재를 가치 없는 존재로 격하시키거나, 유불리에 따라 폐기처분하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가장 질이 나쁜 존재가 인간이다.
철이의 창조자인 최 박사도 철이를 그렇게 대우한다. 가장 인간처럼 만들었다는 철이가 인간인 최진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를 기계적으로 대우한다. 초기화라는 무기, 더불어 철이를 창조할 때 심어놓은 내장되어 있는 칩을 무력화시킴으로 창조될 때의 순종적인 모습으로 다시 환원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소설의 끝으로 가보자.
클론으로 살면서 끝까지 인간의 선함을 믿었고, 그렇게 살기를 원했던 선이가 말년 시베리아에 이주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철이는 선이를 찾아간다. 시베리아에서 극적인 만남을 이룬 철이는 선이가 이미 너무 많이 늙어버린 뒤였기에 선이의 자연사를 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선이를 묻고 난 뒤에 시베리아 남기로 결심하고 그곳에서 삶을 살아가던 철이는 시베리아 산 곰들의 습격을 받고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일체의 기계들이 훼손됨으로 휴먼 노이드로서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물론 그는 내장되어 있는 재생 스위치를 누르면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데도 철이는 그 방법을 포기한다. 이유가 있다. 선이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끝이 오면 너도 그게 끝이라는 것을 분명 알게 될 거야.” (293쪽)

철이도 그 끝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존재들이 빠짐없이 이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는 것을 철이는 인식했다. 그러기에 그도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의식과 단절되기로 마음먹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학창시절 닐 세다카가 부른 팝송을 흥얼거렸다.
“You are the answer to my lonely prayer”로 시작하는 그 노래 말이다. 지극한 사랑의 밀어를 고백하던 가수는 이 노래를 이렇게 끝맺는다.
“You mean everything to me.”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존재요 동물이다. 맞는 말이다. 의미가 없는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일까? 나 또한 그럴 것 같지 않다. 주님께서 나와 너를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나는 그 ‘생기’를 어떤 때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살아 있는 동안 의미 있는 삶을 요구하신다. 조금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의미 없는 인생을 산 존재만큼 실패작이 없다. 최진수는 철이를 비롯한 휴먼 노이드 전체를 ‘ES’ 라는 기계로 여겼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철이를 비롯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휴먼 노이드들은 인간에게 ‘ES’가 아니라 ‘DU’로 관계가 맺어지기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그 인격적 관계성이 휴먼 노이드든, 인간이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이니까. 기계에게 인격을 부여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저항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려면 차라리 만들지 말아야지.
김영하에게 한 수 배웠다. 특히 목사로 살아가면서 남은 인생을 어떤 방향성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목사는 누구든지 예외 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지속해야 함을 배웠다. 더불어 이것이 중단되면 목사도 삶도 끝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배웠다.
그래서 그런지 일찍이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갈파했던 울림이 크게 공명된다.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게 막강한 존재인지를 거의 모르고 있다. 오늘에 와서 바야흐로, 인간이 스스로 영적인 힘의 근원에 예속되지 않으면, 그가 마침내 개발할 수 있게 된 에너지의 근원과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몇 안 되는 인간이 온 인류를 최루의 파멸에 던져버릴 수도 있음이 분명해졌다. 근원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지혜가 그것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사람을 찾는 하나님』,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년, 214쪽)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의미의 내용이자 관계 설정 코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