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이동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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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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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9-14 14:5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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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위즈덤 하우스 간, 2023년 4쇄판)을 읽고 매년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고정 해설자, 영화 평론가 정도가 필자가 알고 있는 저자의 정보다. 골수 시청자는 아니지만 ‘기생충’ 신드롬으로 인해 그해 진행된 아카데미 시상식을 오롯이 시청했는데, 이동진의 해설은 해박했다. 그리고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저자가 갖고 있는 철학적 식견과 뛰어난 통찰력을 보면서 그랬다. 근래 종편에서 진행되는 모 프로그램의 패널로 저자가 다시 화면에 곧잘 보이는데 아주 가끔 그 프로를 접하다보면 영화 평론의 전문성을 뛰어 넘는 저자의 지성적인 혜안들이 다시 나를 놀라게 한다. 도대체 그가 어떤 지식놀음(?)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서 나오는 지성의 통로는 독서였다. 필자가 리뷰를 쓰고 있는 본서를 읽고 나서 더 확실해졌다. 읽기에도 불편하지 않게 편집되고 눈에 잘 띄는 기법으로 제작된 본 책을 읽으면서 필자와 맥이 통하는 상당 부분이 중복되고 있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를 대리만족의 희열도 느꼈다. 특히 저자의 역설적 의견 표명은 신선했다. “왜 책을 읽는가?” 저자의 답이 상투적이지 않아 좋다. “있어 보이니까” 저자의 부연적인 변을 들어보자.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있는 것’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다는 것은 일종의 허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 허용조차도 필요한 세대라고 생각한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내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24-25쪽) 잘난 척이나 하려는 얄팍한 생각이 아니라,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몸부림의 일환이 독서라고 정의한 셈이다. 책과 일대일 논다는 것은 대단히 고독한 투쟁이다. 이런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거룩한 욕심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저자의 변에 지지를 표한다. 독서하는 사람이라면 공통분모로 질문하고 접근해야 하는 일련의 일들을 짤막한 에세이 형식으로 기술한 저자의 책읽기 권면은 보암직하게 하기도 하고, 먹음직하게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만드는 잠언들이다. 저자의 일설 중에 뇌를 흔들 게 한 대목이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길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독서의 어떤 부분은 길을 잃기 위함도 있기 때문이다.”(86-87쪽) 이 고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책을 읽는 사람이다. 나 또한 저자가 말한 이 일을 독서하는 중에 대단히 많이 경험했다. 책을 읽다가 내 삶의 견고했던 자아들이 무너지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기에 저자의 갈무리가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런지 ‘거꾸로 읽기’, ‘거꾸로 쓰기’ 등등에 나 또한 관심이 많다. 길을 찾기 위해 행하는 독서의 기쁨을 부인하지 않지만, 길을 읽기 위함 독서의 매력은 전자와 비교할 수 없다. 저자와 대화를 나눈 이다혜 작가가 이렇게 질문했다. “많이 읽는 것과 글쓰기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 질문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굳이 말하자면 정비례는 하지 않지만 비례는 한다. 세상에는 책을 읽지 않고도 좋은 글을 쓰는 작가도 있으니, 독서와 글쓰기는 정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비례하는 것 같다. 대부분 작가의 경우는 학습한 부분이나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예전보다 더 좋아지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167-168쪽) 글을 읽다가 나는 수학적으로 이해를 하거나 이과적인 뛰어난 머리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서, 후자에 손을 들어준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좋아진 상태를 확보하려면 어제보다 오늘은 더 많은 독서량을 소화해야 하고, 더 많은 글을 써보아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해제다. 저자는 책의 부록에서 본인의 서재에 있는 23,000여권의 장서 중에 800권을 발췌한 추천 도서를 소개한다. 훑다보니 간신히 십분의 일을 건졌다. 물론 목사로 살고 있기에 내가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신학에 관계된 편집증적인 독서 편력을 핑계 삼아 대중적인 인기 평론가가 접한 기존 독서의 목록을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결론은 굴욕이었다. 적어도 저자가 소개한 추천 독서 목록을 보명서 경이로웠던 것은 영화평론가로서 가져야 할 전문성을 포함하여 여타 다른 분야에 대한 다양한 독서량을 보면서 나는 뭐했지? 라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나는 적어도 제 2, 3의 이동진과 같은 회중 멤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인데, 내가 저들의 그룹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글 읽기에 나름 만족한다면 그건 수치임에 틀림없다. 십 수 년 전에 대한민국 불교의 대표적인 이판승인 법정이 읽었던 책을 소개하는 글을 만나 충격을 받고, 오기투합하며 그의 독서력 따라잡기에 올인 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달린 끝에 천 여 권의 장서들을 읽게 되었다. 외로운 싸움이었지만, 치열한 글 읽기를 경험하면서 길을 찾는 일, 길을 잃는 일을 공히 경험했다. 이 일은 내겐 신나는 일이었고, 울고 웃는 일이었다. 이동진은 내게 십 수 년 전에 법정이 주었던 동기부여를 이번 독서를 통해 다시 명한 것 같아, 웃프다. 그때에 비해 눈도 맑지 못함은 물론, 체력도 바닥이지만, 다시 뛰어볼 요량이다. 그가 소개한 양서 약 700권이 지금은 내게는 멀리 있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이동진을 따라 잡아봐야겠다. 영화평론가보다 지적 수준이 덜 떨어진 목사라는 수치는 당하고 싶지 않기에. 김상욱은 과학 공부도 하라고 하고, 유시민은 역사공부는 더 매진하라고 채찍질하는데 못나고 못난 목사는 호흡만 가빠진다. 해서, 꾀가 날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C.S, 루이스의 이 말이 고삐를 다시 죄게 한다. “가끔 나는 글쓰기란 양 떼를 몰고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문이 열려 있으면 독자는 당연히 아무 문으로 들어간다.”(C.S, 루이스, 『책 읽는 삶』, 두란노, 172쪽)
목사의 독서는 양이 길을 잃지 않게 만드는 최적의 무기다. 포기할 수 없는 목사의 운명적 미션이 독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손에 책을 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