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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말씀 등불 밝히고(3)2024-06-11 10:2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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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기석
ㆍ출판사 꽃자리
ㆍ작성일 2023-07-28 18:06:21

 

김기석의 “말씀 등불 밝히고”(꽃자리, 2023년 간)를 읽은 뒤 나누는 세 번째 이야기



오늘 이야기로 김기석의 신간 『말씀 등불 밝히고』 세 번째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세 번째 파트는 618면부터 847쪽에 해당하는 마지막 필드이고 갈라디아서로부터 요한계시록에 관한 원고 리뷰다. 지면에 소개하고 있는 리뷰어의 글은 김영봉, 구미정, 홍순관, 지강유철이 분석한 글 나눔이다. 이번 김 목사의 신간을 들쳐보면서 여전히 느낀 점이 있다. 저자의 글은 이미 논찬을 하거나 비평적 성찰을 하는 것이 하는 사람의 형편이 도리어 작아 보이기 십상인 글이라 출판사측으로부터 리뷰 글 기고를 부탁받은 분들이 수락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공감의 여백이 있다. 하지만 글을 논찬한 분들의 옥고들을 함께 여미어 보다가 이런 감동의 소회가 스며들었다. 저자인 김기석 목사와 같이 그의 글과 설교 원고에 함께 어깨동무하고 가는 결이 비슷한 글벗과 길벗이 많다는 것에 대한 희망적 감회가 필자를 덩달아 기쁘게 했다.
왜? 깨어 있는 지성적 영성 추구자들이 그래도 한국교회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감사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번 신간에 대한 논찬 글을 보내준 집필진에게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저들의 독서 평은 또 다른 감동의 이편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저자인 김 목사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이런 동역자들이 함께 걷고 있으니 말이다.
요한계시록 파트의 북 리뷰를 맡은 양화진문화원의 지강유철 연구원이 저자가 텍스트로 잡은 요한계시록 5:7-14절을 근거한 설교에 대해 이렇게 저자의 설교를 갈무리한 부분은 압권이다.

“온 우주의 합창을 듣고 살지 못하는 이들이 저 장엄한 합창을 듣기 원한다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는 우주적인 선율은 낮고 그윽해서 고요한 영혼에게만 들려오기에 우선은 삶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뭔가 조급한 일에 사로잡혀 있거나 분노의 감정에 삼킴을 당할 때 그 노래는 들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내 삶의 연주자를 바꾸는 일이다. 헛된 욕망이 나를 연주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내 삶의 연주자로 바꾸어야 한다. 한 가지 더 잊지 말아야 할 일은 각자가 자기 선율을 연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803)

저자의 설교도 설교지만, 리뷰어가 파악한 구원 받은 자들의 합창을 논하는 본문 논찬에서 기존 상투적인 해석인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에 의해 울려 퍼질 노래의 정체성을 논한 정도가 아니라, 그 노래에 담긴 사회 신학적 의미를 전개해 나간 해석학적인 의미 확대를 보면서 지강유철 위원의 대단한 통찰력에 감탄하며 그에게 존경의 박수를 쳤다.
그렇다. 저자의 글에 대한 논찬을 맡아 『말씀 등불 밝히며』의 레벨을 업 시킨 논찬자들의 글들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갈라디아서에서 펼쳐나간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스티그마타’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아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흔적이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벌거벗은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가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저자의 갈파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고 보니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이 떠오른다.

“성경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성경 안에 계신 하나님께 헌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현존은 개념이 아니라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사람을 찾는 하느님』, 한국기독교연구소, 312.)

하나님에 대한 현존을 내 상황 안에서 느끼는 자가 어찌 자신의 부족함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어찌 십자가만을 자랑할 것이며, 내 안에 예수의 스티그마가 있다고 증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에베소서 6:5-9절 텍스트는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 애용하는 구절이다. 동시에 가장 많이 악용하거나 왜곡하여 적용할 수 있는 위험한 본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본문의 첫 구절인 ‘종으로 있는 이 여러분!’이라는 대목을 대단히 중요한 구절로 인식했다. 왜?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도는 종들을 사유 능력이 있는 주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존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640-641)
에베소서가 기록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주후 58-64년의 시기에 종은 물건이었다. 물건을 계수할 때 항상 포함되는 또 다른 물건이었다. 인권은 말도 꺼내지 못하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종들에게 종들에 합당한 인격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종들의 일들을 감당할 것을 종용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종처럼” (엡 6:6) 행동하며 성실하게 일을 감당하라고 권한다. 혁명이다. 공교롭지만 또 다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갈파를 눈 여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의미를 필요로 한다. 만일 궁극적인 의미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가 자신을 그것에 연관시키지 못한다면 궁극적 의미는 그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아브라함 요수에 헤셀, 『누가 사람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95.) 

이것을 알았을까? 에베소서 저자는 종에게 의미까지 잃어버리거나 상실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 셈이다. 이것을 편집부에 이렇게 소제목을 붙였다.

“새로운 윤리”

한종호 목사와 꽃자리 편집부의 성찰에 박수를 보낸다, 골로새서 4:2-6절 설교는 우리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한 번 즈음 숙고할 논고를 날린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제국이 든든히 서 가기 위해서는 억압당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경계선, 곧 로마 시민과 미개인을 가르고, 종과 자유인을 가르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가르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 드셨습니다. 사회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땅의 사람’이라고 업신여김을 받았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657-658)

저자의 피력은 너무나도 적절한데, 우리 한국교회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위험한 시도는 하지 말라 한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니 따지지 말라 한다. 기득권 주류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 한다. 경계선을 지키고 그 선을 넘어가지 말라 한다. 심지어 이런 이들의 참담함은 저자가 요한일서 설교를 통해 인용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나오는 글까지 소환하며 재림하신 예수께 잠잠할 것을 종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지적한 점이다.

“당신은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우리끼리 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811)

세상에 이게 말이 되는가! 저자는 이렇게 연이어 갈파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험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완력으로 누군가를 누르려는 이들도 아닙니다. 세상의 힘에 굴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659)

이런 차원에서 저자는 영락없는 진보주의자다.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대화불능의 폭력적인 정의의 일환으로 매도하는 진보주의자 말고, 합리적 진보주의자다.
오늘 이 땅에 고대 로마제국에서나 가능했던 황제적인 폭력이 통하는 권력이 횡행하고 있다. 하지만 ‘땅의 사람’들이 힘에 의한 논리에 굴복당하는 것은 진정한 굴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의 진입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식임을 나는 믿기에 저자의 생각에 한 표를 던진다. 동시에 이 땅에 폭력이 조만간 사라질 것을 믿기로 했다. 필자는 근래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전율하는 감동을 느낀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그리고 디도서 편을 맡아 논찬의 글을 기고한 구미정 교수가 그녀의 글에 이런 리뷰를 남겼다.

“회개는 ‘에너지 집약적인 삶의 구조’를 ‘생태적 삶’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쯤 되면 회심 혹은 전향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겠다. ‘더’ 많이 소유해야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사람이 회심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더’의 삶에서 ‘덜’의 삶으로 개종해야 한다.”(671)

필자가 구미정 교수의 글을 언급한 이유는 저자의 디모데전서 설교를 조금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디모데전서 6:9절을 인용한다.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이렇게 해제한다.

“70-80년대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과 영혼 평안의 복을 받는다는 말에 사람들을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던 진짜 복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조율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바치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과 말을 뒤집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팽개치고 복에만 매달렸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바꾼 결과 오늘의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것은 일종의 경고 나팔소리입니다.” (699-700)

글을 읽다가 착착한 마음을 토로해 본다. 어떤? 적어도 이 정도의 신학적 방향성이 필자가 신학을 시작하는 1980년대의 신학적으로 주류가 되었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참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다. 더불어 2023년을 지나는 길목에 있는 작금에도 이런 식의 토로를 자유주의 신학의 결과물이라고 매도하는 부류들이 적지 않을 터인 영적 기상도에 매우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달리기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나이가 들어서 달리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를 그만두기 때문에 나이를 먹는 것이다.” (미사고 요시아키, 『천년의 독서』, 시프, 246)

이번 주간에 읽었던 독서일과에서 발견한 촌철살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주군이신 예수께서 던지셨던 잘 살아내는 삶을 세속적 권력에 굴복하고, 대세인 로마제국의 아성과도 같은 하나님 없는 막 살기에 굴종한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참된 뜻을 짓밟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원하는 일을 위해 경주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달리기다.

글을 마감하면서 요한일서 설교에서 인용한 카를로 마르티니가 성찰한 문장 하나는 꼭 소개하고 싶어 담아내며 글감을 마치려고 한다.

“너는 참 부족하구나. 그러니 너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고 나는 너를 특별히 사랑한단다.” (카를로 마르티니, 『예루살렘 밤의 대화』, 최수영역, 분도출판사,35, 본서 808 재인용)

마르티니의 이 글을 저자가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나는 이 문장에서 글썽였다. 어쩌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실까에 감격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보다 더 큰 주님의 사랑고백이 또 있을까 싶어 괜히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필자가 네 번째 내놓은 졸저에서 이렇게 표현한 글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자리로 내 삶의 자리를 이동해야 한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1』, 동연, 307.)

섬기는 교회 지체들 중 몇몇 독서하기를 좋아하는 동역자들에게 본서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까지의 글 나눔을 톡을 통해 전달했다. 그중에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답신을 보냈다.

“목사님, 너무 두꺼워서 엄두가 안 나네요. 더운 날에 독서 삼매경이신 목사님 존경합니다.”

제게 이 글을 보낸 지체의 말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면 이런 뜻이다.

“목사님, 좋은 말로 할 때, 잘 쓰셔서 마지막까지 보내세요.” (ㅎㅎ)

같이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정말 많다. 하지만 지체에게 또 야단맞기가 싫어 여기서 멈춘다. 이미 섭렵한 글벗들이 많겠지만 저자의 본서는 매를 맞는 느낌으로 읽어야 한다. 어떻게? 둔감한 죄로 인해 맞아야 하는 죽비 말이다. 기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매 맞으며 행복한 공부를 마쳤다. 저자가 건강하기를 기도한다.
 

ps: 이제 300페이지를 넘는 글은 사양하련다. 허리도, 눈도 매우 아프다. 리뷰를 쓰는 팔과 어깨는 그만하라고 압박한다. 그래 결심했어, 이제는 그만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