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그림하우스에서
“내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단 하나의 생각도 허용하지 않게 하옵소서!” 한 주간 머문 필그림하우스의 식당에 스크랩되어 있는 어느 익명 그리스도인의 글입니다. 문득 보다가 이런 생각에 젖어 보았습니다. 극단일까? 너무 모진 몰아세움일까? 근본주의적인 발상인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속에서 아웅다웅 하다가 무릎을 치며 이른 결론이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 기도했지!’ 코로나 19에게 공격 받은 1년은 목사 안수를 받고 살았던 지난 29년 중 가장 치명적인 한 해였습니다. 한 지역 교회를 섬기면서 살아야했던 현직 목사가 당해야 했던 치명상은 무기력을 넘어 무능함에서 오는 고통이었습니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이 코로나 쇼크가 커지면 대면예배를 닫고 비대면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것 말고는 전무했기에 말입니다, 금년 11월 하순부터 시작된 제천을 강력하게 타격하고 있는 제 3차 코로나 쇼크는 새해 사무총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성산에 올라온 저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였습니다. 2021년 전망 역시, 결코 녹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우스 내에 식당에서 우연히 이 문장을 마주쳤습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매 식사 시간마다 이 글이 있는 식탁으로 자리를 잡아채셨고 저는 이 문장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습니다. 이윽고 묵상하다가 문득 스쳐지나가는 이런 내 자아를 보게 되었습니다. 세속적 아류들이 비집고 들어갈 내 영적 틈새가 너무 커진 것은 아닐까! 내 삶의 영역에 세상적인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의 폭을 나도 모르게 넓혀준 것은 아닐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와 타협하지는 않았는가! 결국 소프트웨어의 문제가 아니라 하드웨어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습니다. 필그림하우스에 입소하면서 가지고 올라간 팀 켈러의 ‘고통에 답하다.’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신정론의 문제는 대체로 하나님과 죄를 믿는 단호한 믿음이 아니라 연약한 형태의 세속적 신앙이 빚어낸 결과물이다.”(98.) 혹시 나는 연약한 형태의 세속적 신앙에 물들어 있는 무늬만 목사는 아닐까 싶어 오싹해 졌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내게 임한 무기력과 무능력은 내 영의 문제지 바이러스의 문제가 아니라는 역동이 한 주간 성산에서 꿈틀 거렸습니다. 2021년 세인교회의 표어는 ‘ad fontes’ 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소원했던 그 삶을 우리도 선택하는 것이 백번 옳습니다. “내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단 하나의 생각도 허용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래야 주님과 함께 고통의 길을 걸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췌장암 투병 중인 팀 켈러가 앞서 소개한 책 제목을 이렇게 비장하게 쓴 이유를.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기” 아무도 없는 필그림하우스의 겟세마네 채플에 울려 퍼지는 기도음악이 너무 은혜롭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