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청탁을 받고
“아, 잠간 멈춰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를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절을 계속했다.”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간, p,356)
작가 김훈이 쓴 ‘남한산성’에 나오는 치욕의 절정이라고 본 글입니다. 저는 이 글에 대한 사족을 제 책에 이렇게 달았습니다.
“치를 떨었다. 마치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하는 자가 인조가 아니라 바로 나인 듯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 치욕을 안겨 준 장본인은 카도 아니요, 인조도 아니라 김훈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글잡이 작가 김훈을 들먹여 작가가 불쾌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훈을 참 좋아합니다. 내가 김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는 언제나 비주류에 대한 글 터치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의 그런 남루함이 참 좋습니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언제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김훈, “공터에서”, 해냄 간, 2017,p,352)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그의 속삭임입니다.
몇 주 전, 교단 신문인 나사렛 신문 편집장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나사렛신문에 매달 글을 기고해 주셨으면 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졸고를 써서 홈페이지와 제 개인 SNS에 매번 올리는 것이 서평인데 교단 신문에 그 내용을 올려서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요청을 담당 목사님께 전화로 받고 교단 정치와는 전혀 별개인 것을 알기에 허락했습니다.
내가 보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 자유로운 일이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내놓는 글을 쓴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며, 해산하는 수고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앞에서 소개한 김훈 작가도 글쓰기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히며 글 씀에 대한 가치를 피력한 바 있는데 뜨겁게 공감했던 기억이 분명합니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김훈,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 2019,p,11.)
컴퓨터와 스마트 폰만을 들여다보고 살아서 도무지 연장을 쓸 줄 모르는 동물로 퇴화했으며, 살아 있는 몸의 기능을 상실했고, 인간성 영역이 쪼그라드는 현실인 작금, 글을 쓴다는 것을 어찌 보면 대단히 모난 짓이며,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신문사에 원고 청탁을 부탁받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것은 나 역시 퇴화의 퇴화를 거듭하는 못난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입문이요, 인문학의 무너짐으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는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을 하고 싶음이요, 또 하나 어찌 보면 너무 천박해진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일어섬을 바장이지만 노래하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늙어서 닥치는 모든 비정상이 곧 정상이다.”(김훈, “연필로 쓰기”,p,460.)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교단 신문에 연재 글쓰기를 허락한 또 다른 이유는 김훈이 이 글로 제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서툰 글들을 독자들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아줄 것에 대한 객기(?)가 친구가 되어주어서.
목양터 이야기 마당을 쓰는 주님 날의 예비일 하늘이 푸르고 시려 고맙고 또 고마운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깊이가 너무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