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7일 주일 오전 예배 (히브리서 강해 3) 제목: 플러스알파 본문: 히브리서 1:4 서론) 몇 주 전에 타개한 조용기 목사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부흥시키는 원동력으로 철저하게 천착하여 사용한 구절이 요한삼서 1:2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조용기 목사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제일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가 만사형통하며, 이로 인해 신유의 복도 받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조용기 목사의 전매특허가 되어 급속도로 한국교회에 퍼져나갔고, 이 구절을 벤치마킹한 수많은 교회들은 같은 맥락으로 요한삼서 1:2절을 해석함으로 적지 않은 유익을 보며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삼서 1:2절은 단순히 순복음 교회만의 레테르가 아니라 상당수 한국교회의 부흥의 슬로건이 되었고, 조용기 목사는 갔지만 아직도 명실상부한 대다수 한국교회의 부흥 슬로건으로 굳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삼박자 축복에 대하여 대단히 비평적인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삼박자 축복이라는 조용기 신학을 번영신학의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이라고 맹공하며 비판적으로 성찰합니다.
물론 이런 주장을 행하는 학자들은 개혁적 신학자들입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두 가지 차원에서 삼박자 축복론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합니다. 그 일선에 있는 신학자의 지론을 소개합니다.
연세대학교 서형석 박사는 요한삼서 1:2절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2절은 한국교회에서는 삼박자 축복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축복의 단락이 아니라 기도의 단락이다. 요한서신의 저자 장로가 수신자 가이오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다. 저자 장로는 가이오가 모든 면에서 잘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있다. 거기에 부가설명을 붙인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그가 잘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엄격하게 분석하자면 삼박자가 아니라 이박자이다.”(서형석, “요한 1,2,3서-연세신학 백주년 기념 성서주석”, 대한기독교서회,p,183.)
무슨 말입니까?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요한삼서 1:2절은 어떤 상태가 결과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보고물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직의 일을 감당하던 요한삼서의 저자 장로가 너무나 사랑하는 동역자인 가이오 형제가 영과 육이 잘 되기를 기도하는 구절이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이 구절을 통해 요한삼서의 저자 장로는 영이 잘되어야 육이 잘 된다는 이원론적인 구분으로 설명한 구절이 아니라, 영과 육은 동시에 잘 되는 유기적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영과 육을 일원화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명백한 성서 구절의 해석이 존재하는데 영이 잘 되면 물질의 복을 받고, 더불어 이어 병 고침의 은혜가 임한다고 주장한 삼박자 축복은 성서 해석의 전형적인 왜곡임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저 역시 3박자 축복론에 대한 신학적 수용 여부는 당연히 서형석 박사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조용기 목사는 이런 삼박자 축복의 메시지를 왜 포기하지 않고 전했을까요?
이제부터 조금은 긍정적인 차원에서 그를 변호하겠습니다. 조 목사는 1958년에 불광동에서 장모인 최자실 목사와 천막 교회를 세워 개척했습니다. 1958년이라는 대한민국이라는 현장은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하여 최악의 가난과 싸워야 했던 굴곡진 역사의 시점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난에 찌들려 있는 자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가난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병도 고칠 수 있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질병과 가난으로 인해 거의 실신 직전에 있었던 1960년대 이 땅의 민초들은 벌 떼처럼 순복음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번영신학을 기초하여 나는 가난에서 벗어났고, 질병에서 고침 받고, 경제적인 부도 얻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착시현상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박자 축복이 맞는 교리가 아니냐고 항변하시겠지만 저는 유감스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말씀드립니다. 요한삼서 1:2절을 삼박자 축복이라는 맥락에서 교리적으로 잘 적용 했기에 그들이 병 고침을 받고,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기 이전 그릇된 삶으로 점철되었던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나니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고, 이전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육체를 병들게 만들었던 자들이 자기 관리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기에 건강한 삶을 살게 된 것이고, 동시에 물질도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인지하고 바른 경제관을 갖고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했기에 부까지 얻게 된 것임을 저는 동의하기에 요한삼서 1:2절을 삼박자 축복론으로 적용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오늘 설교의 서두에 왜 삼박자 축복이라는 화두를 꺼내 교우들에게 설교를 시작할까요? 조용기 목사의 신학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의 차원에서 오늘 설교를 진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설교 제목처럼 플러스알파의 의미를 전개하기 위함입니다. 본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진입이 한참 늦었지요?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무슨 말입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 후속의 증거로 그의 이름이 천사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었다고 말한 점입니다. 왜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천사들보다 그 이름의 권위가 더 뛰어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D. 거쓰리 교수의 주석으로 대답하겠습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 즉 독자들은 실제로 천사를 숭배하던 골로새 사람들과 비슷한 그룹이나 이전에 천사들을 아주 높게 평가하던 쿰란 공동체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그룹에 속해 있었을 수도 있다.” (D. 거쓰리, “히브리서-틴데일 신약주석 15”, CLC, p,104.)
골로새서 2:8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골로새 지역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해 골로새 교회 성도들마저도 천사숭배에 빠져 있었음을 바울이 경고한 메시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천사를 숭배하는 종교적 그룹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천사라는 존재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이기에 본문 4절과 다음 주에 살필 5-14절까지 소개되는 천사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낯설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작성된 주후 60년대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한 유대적인 성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천사에 대한 이해나 신뢰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4절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천사와 비교한 것은 대단히 적절한 전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강조한 본문 4절의 메시지는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 메시지입니까? 아들은 천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 번역된 ‘기업’이라는 헬라어 단어 ‘클레오로메오‘는 영어단어로 표현하자면 ’HERITAGE' 즉 ‘상속’ 혹은 ‘유산’ 등등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무엇을 강조하려는 것입니까?
적어도 아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유일한 상속자라는 신분을 갖고 있는 뛰어난 신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천사 따위로는 감히 비교불가의 대상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들의 이름 하나로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불가의 대상이자,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압박입니다.다음 주일에 자세히 살피겠지만 천사와 같은 존재로는 비교불가는 물론 비교를 당하는 것이 수치일 정도의 존귀한 존재가 아들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히브리서라는 설교문의 초반부에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히브리서 3번째 강해를 통해 우리 모두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레마가 확연해 집니다. ※ 예수가 아닌 예수 플러스알파라는 유사품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사 시몬이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는데 귀신들이 나가고, 중풍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앉은뱅이들이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시몬도 자신이 하던 마술을 다 집어치우고 빌립을 쫓아다닙니다. 마침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이방인들의 땅인 사마리아로 내려와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그 동안 자신이 마술을 통해 번 돈을 사도들에게 주면서 나에게도 안수하면 성령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흥정을 합니다. 사도행전 8:18-19절입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시몬의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시몬을 향하여 저주를 합니다.
사도행전 8:20절을 소개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시몬이 갖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α입니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저주를 퍼부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놀라운 권능을 베푸시는 성령이라는 본질에는 1도 관심이 없고,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 만들어진 권능 즉 플러스알파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고 싶겠지만 적어도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인하기 어려운 현대 크리스천들이 범하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한다고 고백하지만 언제나 상당수 많은 21세기 크리스천들은 예수보다 +α 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어리석음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의 성경적 내증으로 여러 교우들을 초청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 이후에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그 요구를 물리치시고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갈 것을 명령하시고 주님은 산으로 혼자 떠나셨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주님은 가버나움으로 가는 항해 중에 풍랑 속에서 고생하던 제자들의 배에 오셔서 풍랑을 잔잔히 하시고 가버나움으로 제자들과 함께 사역지를 옮기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벳세다에서 없어진 것을 안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전날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엄청난 일을 잊을 수가 없어서 수소문 끝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찾아갑니다.
요한복음 6: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그렇게 가버나움에 예수를 만난 자들이 다짜고짜로 예수님께 불만 섞인 질문을 합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6:25절입니다.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무슨 말입니까? 소리 소문 없이 벳세다에서 사라진 당신을 찾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는 불만이요, 항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버나움에 온 이들은 지금 밥을 먹을 때가 되었기에 시장하였고 그래서 또 다시 주님께서 배불리 채워주실 것을 믿고 그렇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으신 주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전혀 예기치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6:26-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
주께서 말씀하셨던 26절 말씀은 벳세다에서 가버나움까지 찾아온 요한복음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2021년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인 심장을 타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구절이 왜 심장을 타격하는 말씀입니까? 그들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표적으로 인해 일어난 배부름입니다. 플러스알파였습니다. 벳세다 사람들이 굳이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부름 때문이었습니다. 플러스알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서늘하게 그들을 향하여 선포하신 경고성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6:27절을 다시 복기하십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
주님의 요구는 배부름에 혈안이 되지 말고 그 배부름을 준 인자 즉 ‘나’에게 집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α 라는 ‘+α’에 정신 팔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중요한 것이지 +α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작 중요하고 붙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든 토저의 글을 하나 발췌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외치지만 하나님의 교회 전체는 그분의 아들의 두 어깨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 한분으로 충만하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그분이면 충분하다. 오늘날 복음주의에 속한 우리가 왜 이토록 약한가? 그것은 그리스도 다음에 플러스부호를 붙이기 때문이다. 그런 덧붙임 때문에 우리 각자의 영적 생활이 무너지고 약해지는 것이다. (중략)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그리스도 플러스 과학, 그리스도 플러스 교육, 그리스도 플러스 문명 같은 것을 전해서는 안 되고 오직 그리스도만 전해야 한다.” (아이든 토저, “철저한 십자가”, 규장,pp,59-60.) 천사숭배와 초대교회의 가장 강력한 이단종파였던 영지주의라는 두 괴물에 의해 좌초직전이었던 골로새 교회에 전하는 바울의 강력한 선포를 들어보십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로새서 2:8-10)
그레이스 커뮤니티를 담임한 존 맥아더는 미국교회를 좀 먹는 플러스알파를 다음과 같이 열거했습니다, “자유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 율법주의, 실용주의, 마케팅, 심리학, 엔터테인먼트의 침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존 맥아더는 이렇게 사자후를 남깁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충분하다. 그리스도안에 충분함 있는가? 절대적인 충분함이 있다. 우리의 과제는 그분을 더 잘 알고 그분을 더 열정적으로 섬기며 더욱 더 그분의 형상을 닮는 일이다. 나는 나와 여러분이 생명수 강이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을 오늘날 잘 팔리고 있는 물을 잘 담지 못하는 깨진 항아리와 바꾸지 않기를 기도한다.” (존 맥아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 부흥과 개혁사, pp,269-270.) 서슬이 시퍼런 갈파입니다.
여러분의 시선은 플러스알파입니까? 아니면 예수입니까?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6:29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바울, 그가 그였던 정체성을 고린도전서 2:2절이 이렇게 밝힙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교회 리서치 기관에서 외치는 지난 1년 10개월의 소리는 이러했습니다. “펜데믹 상황에 교회는 바뀌어야 합니다. 코로나 19는 이제 교회의 체질을 바꾸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위드코로나,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발 빠르게 보폭을 맞추지 않으면 이제 우리는 도태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종도 민감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체질을 시대에 맞게 바꾸는 것은 필요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을 흔들면 펜데믹이 아니라 펜데믹 할아버지라도 저는 맞설 것입니다. 펜데믹 이후에는 예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아. 플러스알파가 필요해! 이때나 저때나 예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영원히 충분합니다.
플러스알파를 부추기는 사탄적인 수렁에 함몰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플러스알파입니다. 그분은 일체의 존재 중에 가장 우월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수많은 무리들 줄지어 수많은 무리들 줄지어 그 분을 보기 위해 따르네 평범한 목수이신 그 분 앞에 모두 무릎을 꿇어 경배하네 모든 문제들 하나하나 죽음까지도 힘을 잃고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 이름 앞에 모든 권세들 굴복하네 예수 이름 높이네 능력의 그 이름 예수 이름 높이세 구원의 그 이름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 예수 이름을 믿는자 예수 이름 앞에 나오는 자 복이 있도다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소망이 끊어질 때 삶의 주관자 되신 그분 앞에 나의 무릎을 꿇어 경배하네
나의 삶을 그분께 맡길 때 비로소 나의 마음 평안해 구원의 반석 되신 예수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송하네
예수 이름 높이네 능력의 그 이름 예수 이름 높이세 구원의 그 이름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 예수 이름을 믿는자 예수 이름 앞에 나오는 자 복이 있도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를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 주 나의 모든 삶 변화 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