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3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마흔 번째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9:18-27 제목: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오늘 40번째 창세기 강해는 그 동안 교우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학습된 메시지와 다른 의미의 교훈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어렵더라도 조금 더 말씀 경청에 집중해주셔야 하고, 사모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본문은 홍수가 끝나고 테바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들이 땅에서 시작한 삶의 첫 보고입니다. 본문 18-19절을 읽겠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이 구절을 통해 창세기 기자가 알려주려는 메시지는 노아의 아들들로 인하여 홍수 이후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되었고, 그 자세한 보고는 다음에 살피게 될 10장에서 나누게 될 것입니다.이렇게 홍수 이후의 삶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로 인하여 시작되었음을 보고해 주는 창세기 기자는 제일 먼저 노아가 땅에서 포도나무를 경작했음을 알려줍니다. 더불어 결실한 나무에서 얻은 포도주를 먹었는데 취한 나머지 살고 있었던 장막 안에서 벌고 벗고 잤음을 독자들에게 알려줍니다. 이때 마침 아버지의 장막에 방문한 아들이 함이었습니다. 함의 반응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고 장막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알렸다고 22절이 말해 줍니다. 함의 전갈을 받은 셈과 야벳이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장막에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자기들의 얼굴을 아버지 쪽에서 반대로 돌이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고 23절이 보고합니다. 이윽고 노아가 술에서 깨어났는데 직전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고 그는 후속 조치를 단행했는데 본문 24-27절 본문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흔히 우리는 이 본문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말도 안 되게 해석한 본문인데도 그 동안 본문 정황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은 채로 임의적으로 전해진 해석에 길들여져 있기에 대표적으로 잘못 왜곡된 상태로 알고 있는 케이스이기에 오늘 설교를 통해 바로 깨닫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육 받아 왔습니다. 노아의 하체를 덮어주지 않았던 함은 흑인종의 조상이 되었고, 하체를 덮어준 야벳은 백인종의 시조, 셈은 황인종의 시조가 되었다고 선배들에게 전수받았습니다. 얼토당토 하지 않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유대우월주의에 빠져 있었던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10장에 가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이 내용을 부연하겠지만 개괄적인 학자들의 해석만 요약해서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셈, 함, 야벳은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았던 대표적인 세 종족들의 시조다. 개괄적으로 말해서 야벳은 인도-유럽 계열 사람들의 조상으로 거론되고(창10:2-5), 함은 이집트 사람(창10:13-14)을 포함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조상이다.(창 10:6-12) 함의 아들 가운데 막내인 가나안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초기 원주민이다.(창 10:15-20) 셈은 히브리 사람들을 포함한 셈족의 조상들로서 일컬어진다.(창 10:21-31) 이 본문에서 흑인종(함)이 백인종(야벳)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식의 이론을 끌어낸다면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곡해다. 이러한 곡해는 불행하게도 교부들과 랍비들의 왜곡된 성경 본문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한국구약학회 엮음, “창세기에 길을 묻다.”, 물가에 심은 나무, p,80.) 그렇다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해석이 그동안 노아의 술 취함과 하체를 가려준 아들들에 대한 기사로 해석되었을까요? 이희학 교수는 그의 주석서에서 의미 있는 교훈을 줌으로서 이 해석을 갈무리합니다. 보수적인 관점에 있는 학자들이 한국적인 유교 문화적인 차원으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함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전통적인 가정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함이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지 않은 것은 심각한 도덕적, 가정 윤리적 죄악이라는 것이다. (중략) 한 사람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모(어른)에 대한 존경과 윤리적 덕목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연장자들을 향한 존경심은 공동체의 자기 보존의 필수적인 요건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연장자인데, 그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상실한 것이 바로 함이 저주받은 이유라는 것이다.” (이희학,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창세기 1-11장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p,254.) 이 해석의 의미를 제가 수용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틀린 해석이라는 이 교수의 입장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 부모를 공경하는 것, 이것은 인간이 해야 할 의무이자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자존적인 태도라는 것에 1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었던 셈, 함, 야벳이 아버지 노아를 공경하고 그의 아버지 됨을 경외해야 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게 자식이겠습니까? 전적으로 아들들이 노아를 존중해야 한다는 교훈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함은 저주를 받아 흑인종의 조상이 된 것은 물론, 백인종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제가 본문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는지를 말씀드립니다. 본문 24-27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구절을 읽노라면 분명한 것은 함의 자식인 가나안은 저주를 받은 것이 사실이고, 더불어 그의 형제들이었던 셈과 야벳에게 다스림을 받게 될 것임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함의 저주와 셈과 야벳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제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본문 24-27절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어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조건이 아니라 본문 안에 담겨 있는 성서적 정황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볼 문제는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술에 취해 있는 상태에 대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노아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학습되어진 교육 효과 때문입니다. 노아가 술을 먹고 취해 있다는 보고는 범죄 행위에 대한 고발이라기보다는 홍수 이후 인간이 살아가는 상황이 매우 정상적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땅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본문 정황의 의도입니다. (이희학의 위의 책, p,253) 그렇다면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벗고 있었던 행위는 흥청망청 막 산 타락의 흔적이 아니라 도리어 그냥 삶의 정황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벗은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준 것과 드러낸 것으로 형제간의 다스림과 지배당함이라는 도식으로 본문이 기록된 것은 다분히 편저자의 의도성이 엿보인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희학교수는 ‘역사-정치적 해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창세기 연구를 시작하면서 창세기라는 모세 오경의 첫 번째 책은 통상 4명의 저자들이 전해 내려오는 모세의 구전적인 전승을 편집한 4개의 문서가 합쳐진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창세기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전승의 저자들을 편의상 야웨 전승은 J문서, 제사장 전승은 P문서라고 설명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제일 먼저 앞서는 J문서는 주전 950 년경에 이름이 확실하지 않은 남 유다 사람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말씀드렸고, P문서는 J보다 훨씬 후대인 주전 550-450대에 살았던 아론 계열의 제사장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집필되고 편집 된 책이라고 알려드렸습니다. 그렇다면 J, P 문서로 이루어진 노아 홍수이야기는 분열된 지 얼마 안 되는 남북 분열왕국 시대의 이스라엘의 치열한 국가정세가 밑에 깔려 있을 것이고, 남 유다 멸망 이후 치욕스러운 포로기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남 유다 공동체의 비극적인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동시에 밑그림으로 깔고 편집했을 것이 너무 자명합니다. 바로 이런 해석을 담보로 접근하면 노아와 그의 아들들의 오늘 본문 이야기를 분명한 해석 정황을 어느 정도 그릴 수 있습니다. 25-26절을 해석합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5-26절은 노아의 하체를 덮지 않았기에 그 죄의 결과로 함의 자손들이 흑인종이 되고, 백인종에게 지배를 당하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전개가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땅에 먼저 들어와 살았던 족속이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었는데 그 땅에 뒤늦게 들어와 가나안 족속을 내쫓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된 셈의 정복이 정당성이 있는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강조하는 메시지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27절을 또 한 번 읽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10장 강해 시간에 더 자세히 살피게 되겠지만 "야벳은 블레셋 사람을 포함하여 지중해 지역에 살고 있던 해양 민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희학, 위의 책, p,256)고 말한 것처럼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함께 땅을 공유하며 살았기에 거기에서 오는 역사적 투쟁과 갈등을 예고하고 있는 본문이 27절입니다. 이상 본문 해석은 우리들이 이미 세뇌되어 있는 노아 아들들과 후손에 대한 전 이해를 180도 뒤집어 엎는 해석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인종 차별적인 해석으로 점철된 오류를 바로 잡고 본문 정황에 걸 맞는 바른 해석으로 그동안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 전개된다는 교훈입니다. 함이 저주를 받아 흑인종의 조상이 되었고, 백인종의 지배를 받는 것이 성서적이라는 황당무계한 스토리 전개가 오늘 본문이 아니라 인류는 노아 홍수 이후에도 바벨탑 사건을 필두로 계속하여 투쟁하는 역사가 이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하셔서 당신의 통치를 이어간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면서 공존하고, 그 가운데에서 또 반목하며 투쟁을 반복하는 역사를 이룰 것도 주님의 계획 하에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공식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하나님은 인류 역사가 굴곡진 일이 있겠지만 그 과정의 끝에 서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와 역사의 하나님이심을 본문을 통해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 큐티를 통해 살피고 있는 욥의 이야기가 4-37장까지 지루하고 지루한 변론, 반증으로 계속 이어질 때 하나님은 일언반구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안 게신 것처럼 침묵하십니다. 그러자 욥과 엘리후 그리고 친구들은 난타전을 벌입니다. 결국 욥 역시 친구들과의 반론의 반론을 펴며 이 모든 것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악다구니를 하는 지경이 될 즈음에 카운터펀치를 한 방 날리심으로 사건을 종결시키십니다. 욥기 38:4-7절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단번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시편 기자는 욥의 길고 긴 물고 늘어지는 정력 소비에 비해 엄청난 신앙고백을 한 셈입니다. 시편 31:15절입니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My times are in thy hand.”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역사의 흐름이라는 결과는 이유이신 주님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은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고 고백하는 것인데 역사의 흐름은 그 역사의 이유이신 주님의 통치 안에 이루어지는 과정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멋있는 신앙이 세인 지체들의 신앙이기를 소망합니다. 동방현주 자매가 부른 이 곡의 가사가 그래서 가슴에 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내 비웃음 나를 향해 돌아오고 어리석고 미련한 그 백성들 나의 모습과 같네 찢기고 상한 나의 영혼을 끝까지 사랑한 아버지의 그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으리요 내 생명 다해 주 노래하리라 내 생명의 근원되신 나의 삶의 이유되신 내 모든 것 나의 전부 아버지 나 다시 일어섭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나 믿음 없어 실패한 나 그런 나를 안아주시는 아버지 나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