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0일 주일 오전 예배 (히브리서 강해 2) 제목: 아들 이야기 본문: 히브리서 1:1-3 서론) 넷플릭스에서 방송된 드라마나 영화들이 근래 엄청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곤 합니다. 얼마 전, 아들이 제게 오징어 게임이라는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개봉되었는데 꼭 한 번 볼만한 것이라고 말해주어 기억에 담고 있었습니다. 이후 여기저기에서 오징어게임, 오징어게임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구나 정도로 지나쳤는데, 지난 주간 제가 접하고 있는 한 신문에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하나 같이 빌런으로 등장한다는 논평과 더불어 대단히 시니컬한 태도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논조를 읽고 나자 매우 불편해져서 인터넷 시놉시스를 찾아 줄거리를 읽었습니다. 읽고 나서 역시 이 영화는 안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나마나 아프기 그지없는 부분의 일을 기독교의 일상이라고 보편화시켰을 것이 분명할 것이고, 더불어 기독교에 대한 비평적 성찰이라는 이름하에 기독교를 공격하였을 것이 안 봐도 비디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특히 젊은 계층들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시청한 분들이 있을 줄 아는데 어떤 이들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 분들도 많았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저 역시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중에 기독교를 향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기에 현역으로 사역하는 목사로서 동통의 아픔을 갖고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성찰하는 정도로 새기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의 소회를 남기고 싶습니다. 잘못된 교리로 무장해서, 바르지 않은 신학의 결과물로, 성서적 앎을 신앙적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목사와 성도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질타를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는 묻고 싶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대로 교회가 사라진 세상, 어떨까요? 세상의 논리가 이제는 성경이 되어 휘몰아치는 세상은 어떨까요? 제 표현이 조금 과격하더라도 이해하고 들어주십시오. 저는 결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 조지 오웰이 쓴 ‘1984’를 밑줄 그으면서 탐독했습니다. 빅 브라더에 의해 일체의 것이 통제 당하는 전체주의 망령을 고발했던 조지오웰의 그 상상력이 절대로 오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지만 지금 교회가 존재하는 이 시대에 빅 브라더는 이미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서 인간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동의할 수 없다고요? 뭐 그 정도의 지적인 성찰의 수준이라면 더 이상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오징어게임의 빅 브라더는 누구입니까? 456억 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직은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456억 원이 모든 이들이 구주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가 무슨 상관입니까? 교회의 목사, 신자들도 456억 원을 섬기는데요! 라고 대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대들어도 이런 반론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은 교회가 제대로 가고 있다고 고집을 피우며, 불통하자는 우격다짐의 논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기독교인 빌런들의 자화상처럼 남을 짓밟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정신병자들이 부지기수인 한국교회임을 인정합니다.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딸을 성폭행한 야수보다 못한 목사가 참담하게도 한국교회에 많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자 교회의 존재 목적인데 오로지 딱딱하게 굳어있는 도그마의 우상에 빠져서 예수 천당을 목 놓아 외치는 비신학적인 종교인들이 한국교회에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대단히 속상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국교회는 그 반대의 경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습니다. 아직은 이타적으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습니다. 돈에 환장한 목사도 있지만 성도들의 피땀 흘린 노동의 대가로 하나님께 드려진 물질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아는 대다수의 정상적인 목사들은 넷플릭스를 시청하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회원 가입비를 내야 하는 데, 그 물질이 목회자가 써야 하는 물질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벌벌 떨며 그 근처도 가지 않는 목사들이 아직은 더 많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옴니버스식의 드라마이기에 그 드라마를 섭렵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것을 알고 쓸데없는 시간에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다짐하며 기도의 자리에, 성경연구의 자리를 사수하며 자기를 관리하는 목사들이 아직은 더 많습니다. 제가 설명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직은 교회와 목사와 성도 중에 상식의 선을 향하여 달려가는 퍼센트가 더 많음에도 이 지경인데 교회가 사라진 세상이 어떻게 될까를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456억 원만이 보이는 집단적인 정신병 수용군도가 될 것이 너무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이 길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론) 히브리서 저자에 대한 학자들의 담론은 대단히 맹렬합니다. 이 담론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신학교 교실이 아닌 개 교회 설교의 현장에서는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에 가장 원론적인 말씀만 첫 번째 강해 시간에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주후 60년대에 닥친 로마 교회의 위기, 그리고 그 교회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지역교회의 성도들에게 임한 대단히 심각했던 기독교 신앙의 붕괴와 배교의 위험을 극복하도록 돕는 설교문을 작성한 히브리인이자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었던 지성인임을 알려드렸습니다. 저자는 주후 60년대 로마 교회에 밀어닥친 456억 원 섬기기와 같은 그릇된 우상들에 빠져 있었던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 신자들을 다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고취시킴으로 돌이키게 하는 대 사명으로 본 서인 히브리서를 작성했다고 주지시켜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를 시작하는 첫 인사말과도 같은 본문에서 저자가 강력하게 설교문 수신자들에게 각인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에 대한 스토리였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공부를 통해 추적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1-4절은 4절로 구분되어 있지만 원래 원어성경을 보면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1절은 중요합니다. 1절을 보십시다.“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1절의 주어는 분명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2절의 주어도 1절의 주어와 동일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2절을 읽어야 합니다. 2절을 마저 읽어보십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2절을 연결하여 해석한다면 이런 추론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1절의 ‘말씀하신’의 주어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2절의 ‘말씀하셨으니’의 주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옛적에 말씀하셨던 것과 이 모든 날에 말씀하시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그분 즉 아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1절은 말합니다. ① 하나님은 히브리서를 기점으로 과거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부분과 모양(계시)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② 히브리서를 기점으로 지금부터 마지막 날까지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2절 하반절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③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웠다. ④ 아들을 통해 모든 세계를 지었다. 두 가지를 말씀하신 하나님은 두 가지에서 머물지 않고 본문 3절에서 연이어 아들에 대한 묘사를 5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이 설명한 아들의 정체성을 조금만 더 보십시다. ⑤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다. ⑥ 본체의 형상이다. ⑦ 아들의 능력의 말씀이 만물을 붙들고 있다. ⑧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맡기셨다. ⑨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했다. 무려 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은 아들에게 9가지의 정체성을 부여하셨고 일을 맡기셨다고 천명합니다. 지금 교우들에게 아들이 갖고 있었던 9가지의 권위에 대해 소상히 열거하며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했던 아들에게서 오늘 강해 설교 두 번째 시간에 우리들이 레마로 삼아야 하는 은혜를 붙들어 보겠습니다. ※ 아들의 권위에 상대할 이 땅의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앞으로 강해를 진행하면서 자세히 살피겠지만 아들은 천사의 권위로 비교할 수 없는 절대 권위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아들은 히브리인들의 영원한 로망이자 우상과도 같은 존재인 모세와도 비교될 수 없는 권위를 소유하신 분입니다. 아들은 종교적인 권위자인 제사장들과는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권위자이십니다. 런던 바이블 칼리지 D. 거쓰리 교수는 본인의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는데 의미심장했습니다. “아들은 더 나아질 수 없는 중보자이시다.” (D. 거쓰리, “히브리서-틴데일 신약주석 15”, CLC, p,69.)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들의 존재 자체가 완벽하다는 의미입니다. 진보할 이유도 없고, 성장할 이유도 없고, 성숙할 이유도 전혀 없는 상태를 갖고 계신 분이 바로 아들이었습니다. 저자는 왜 이렇게 아들에 대해서 담대하게 전합니까? 앞으로 히브리서를 통해 계속 강조하겠지만 아들보다 우월한 권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들은 권위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이 로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대단히 담대하게 선포한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왜 바울이 이렇게 서늘하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경종시켰습니까? 주후 1세기 로마라는 대도시 안에 세워진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적지 않은 숫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분명히 정의합니다. 로마서 1:2-4절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약한 소수 그룹이었고, 불온한 그룹으로 왕따를 당하던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련의 이유로 주눅이 들어 자신을 변화시킨 복음을 단호하게 붙들지 못하는 유감스러운 행동들을 보였습니다. 로마 교회 신자들의 이런 나약함을 안타깝게 여겼던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는 1:1절에서 강력하게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지난 주일 첫 강해 때 선포했던 것처럼 히브리서 저자는 바울의 공동체에 속하였던 자로 여겨진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설교 내내 곳곳에서 바울 신앙의 냄새가 자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도 바울처럼 아들의 권위는 대적할 존재가 없음을 분명히 했고, 심지어 오늘 3절에서 이렇게 강하게 역설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 번역된 본체의 ‘형상’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단어 ‘카라크테르’인데 이 단어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영어단어 'character'입니다. 즉 성품, 특징, 개성 등등으로 변역되는 단어입니다. 본문을 적용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들이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징을 아들이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성을 아들이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권위가 곧 아들의 권위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권위를 갖고 계신 아들을 높이며 히브리서를 열고 있습니다.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세상은 교회가 바로서지 못한 것에 대하여 질타합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매섭게 비판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 목사가 전혀 목사답지 못함, 성도가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참담함을 바로 보고 뼈 깎는 성찰이 필요함은 과장하여 강조해도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담겨 있는 사탄적인 행태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입니까? 오징어게임처럼 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권위를 삭제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 맞서야 합니다. 지난 주간, 크리스천 여론을 빌려 직전 합동 총회장이었던 소강석 목사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런 호소를 했습니다. “한국교회 성도 여러분! 불온하기 그지없는 오징어게임이 더 이상 이 땅에서 방영되지 않도록 힘을 모읍시다. 교계가 한 소리를 내어 이런 사악한 방송들은 설 자리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의 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떠오른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40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소 목사가 그렇게 말한다고 세상은 결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오징어게임에 승자가 되기 위해 독기를 품게 하는 자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의 비아냥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일은 허접한 여론몰이가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내신 삶을 우리도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오징어게임의 메시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위이자 능력입니다. 아무리 오징어게임의 승자독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날이 오면 깜부기처럼 흩어 날리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믿는 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복음의 권위에 함몰되어 올바른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456억 원이 유일한 목표로 설정되어 있는 미친 세상에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내 영혼 쯤이야 얼마든지 신흥 페피스토펠레스에게 팔 수 있다고 열광하는 2021년의 파우스트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흰 옷 입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파우스트가 사탄인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기 전에 그를 가볍게 여기며 이렇게 조소 섞인 말로 질문합니다. “너희 같은 족속은 이름만 들어도 그 본성을 알기 마련이다. 파리의 신, 유혹자, 거짓말쟁이라는 말들이 그 본성을 얼마나 극명하게 드러내느냐? 그래, 네가 누구냐?” 이 질문을 받은 메피스토펠레스가 기막힌 수사어구로 자신의 정체를 말합니다.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만들어내는 힘의 일부지요.” (괴테, 파우스트, 열린 책들, p,65.) 고결했고 도도했던 파우스트는 이 자에게 영혼을 팝니다. 우리도 지금 이 무시무시한 21세기의 메피스토펠레스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가장한 악을 이 땅에 심는 메피스토펠레스들이 지금 승자처럼 군림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의 그 권위로 그날에 반드시 상황을 역전시킬 것을 믿으며 복음 위에 굳게 서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셨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 이들 주를 시인해 영광 중에 오실 주를 보니라 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