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말씀 앞에 다시 서서2024-03-07 16:10
작성자 Level 10

2021년 9월 26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제목말씀 앞에 다시 서서

본문느헤미야 8:1-12

 

서론)

 

지난 수요일 오전에 권숙진 집사의 차남인 김양진 청년이 추석 인사차 서재를 방문했습니다.

양진이는 세종대 동아리 총 연합회 회장으로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대학생활을 이제 마무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졸업을 하게 되면 학사 장교로 임관을 해서 군 복무를 마치게 될 것이고이후 본인의 꿈을 펴게 될 것인데 신실한 크리스천 정치가로 서는 것이 양진의 꿈입니다.

지난 대학생활 동안 다양한 사람철학사고를 가진 각종 인간군이 총결집된 세종대학교 총동아리 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리더십에 대한 경험그리고 팔로워십에 대한 섬김 등등을 고루 경험하면서 대학 내의 정치적인 역량을 키워왔기에 가능하다고 하면 정치가로의 비전을 이루어 가겠다는 소신을 제게 피력했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던 어간양진이가 제게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제게 던진 질문은 총 동아리 연합회 회장으로 여러 다양한 동아리 회원들과의 관계를 이루어가면서 발휘해야 했을 경험들을 반추하며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님혹시 목사님께서는 말씀을 준비하실 때설교의 내용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하면서 설교를 하십니까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메시지를 선포하십니까?”

경우에 따라서 대단히 당돌한 질문처럼 여겨지지만 녀석의 진정성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양진이가 제게 정말로 답을 듣고 싶어 한 질문이었습니다.

추가하자면 지금 서울에서 섬기고 있는 청파 교회 김기석 목사께서 설교를 통해 전해 주시는 메시지와 제 메시지가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을 나름 확신하지만 목사님에게 직접 듣고 싶어서 질문 드린다며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마침 옆에 있었던 이요한 전도사가 양진의 질문을 받아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정상적인 사역자라면 반드시 한 가지를 유념해서 말씀을 준비하고 전한다조명하심이다그 조명하심의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한 가지는 분명하다요한복음에서 말한 것 그대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이다이것이 없이는 감히 설교 할 수 없다.”

내가 전할 말을 아들이 대신 전해주어서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듣는 것부터 한단다.”

이 답변은 정치를 꿈꾸는 청년의 질문에 대해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럴 듯하게 포장한 말잔치의 답변이 아닙니다.

인도의 슬럼가에서 평생 헌신했던 마더 테레사에게 한 기자가 와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수녀님수녀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지요.하나님도 들으십니다.”

정말로 기막힌 영성이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음 주일부터 히브리서 강해라는 장정에 들어갑니다.

저는 지난 2개월 동안 이 준비를 위해 기도하면서 히브리서 공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렵고 떨리는 마음 금할 길이 없지만 총 13장으로 이루어진 현존하는 최장 설교라고 하는 히브리서 연구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 사역에 앞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마지막 제목 설교를 통해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으로 여러 성도들을 초대합니다.

에스라는 주전 458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주전 516년에 이미 재건된 제성전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세우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반면 느헤미야는 에스라보다 12년 뒤인 주전 446년 11-12월 사이에 자신의 주군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에게 드라마틱하게 윤허를 받고 445년 3-4월로 예상되는 시기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그 해 엘룰월 25일 즉 10월 25일에 성벽 재건을 완료합니다.

성벽 재건에 소요된 시간이 두 달이 채 안 되는 52일이라고 6:15절에서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은 일사분란하게 속도전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성전 봉헌의 역사가 느헤미야 11-1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은 이런 감격적인 성벽 봉헌을 앞두고 성벽 재건은 극적으로 완성했지만 왠지 모르게 유다 공동체가 영적으로 빈사상태에 있다는 것을 직감한 그들은 본인들의 열심과 그들을 돕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기막힌 콜라보레이션을 소개합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시 영적으로 부흥시켰던 사역이 수문 앞 광장 말씀사경회임을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본인들도 성벽을 재건한 뒤에 뭔가 허전하고 영적으로 공허한 상태임을 직시하고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와 달라고 청합니다.

이들이 모여 있던 장소는 수문 앞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수문 앞 광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벽부터 모이기 시작해서 정오까지 계속되었음을 보고하는데 그들의 신분을 남자여자 할 것이 없이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들이었다고 역사가는 적시했습니다.

아마도 이 모임을 주도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느헤미야 총독이었을 것입니다.

모일 사람이 다 모이자 에스라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학사 에스라는 특별히 제작된 나무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나무 강단에 올라선 에스라는 본문 5-9절에서 다섯 가지의 사역을 감당했다고 역대기 역사가는 기록합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5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율법서 펴기 (8:5)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② 율법서 낭독하기 (8:8, 1f)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③ 율법서 해석하기 (8:8, 2f)

그 뜻을 해석하여

④ 율법서 깨닫게 하기(8:8 3f)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⑤ 울게 하기(8:9 1f)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이렇게 5-9절까지에서 보고된 이 구절들을 보면서 저는 짜릿하다 못해 학개가 말한 그대로의 표현처럼 영적으로 흥분함까지 느낍니다.

왜 제가 이 구절에서 이런 엄청난 감동을 받을까요?

이 5가지 과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한 가지 중요한 은혜가 담겨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보여 있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부흥을 가져온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 말씀 앞에 다시 서기입니다.

 

에스라는 모세오경으로 추측되는 율법서를 들고 나무 강단에 서서 그 율법책을 폈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이윽고 에스라는 그 율법책을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율법책의 문자는 히브리어 두루마리일 것입니다.

수문 앞에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약 70년이라는 세월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당시 공용어였던 아람어였습니다.

그러니 히브리어를 모르던 그들은 에스라가 읽던 율법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학사였던 에스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율법책의 의미를 번역(translating-NASB)했고또 해석했습니다.(interpreting-NRSV)

뜻을 이해하게 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즉시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통곡이었을까요?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대로 순종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치리하셨고그로 인해 유다는 멸망을 당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동시에 작금 포로에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온 것도 이 때문임을 사경회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울음은 이것에 대한 통곡이요 뉘우침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통곡하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하여 에스라느헤미야그리고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본문 9-11절 말씀입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깨달음과 통회함이라는 영적 부흥을 일으킨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지도자들이 이렇게 독려한 것입니다.

이제 그만 울자그리고 여호와께서 주신 기쁨의 날이니 금식도 중단하고 살진 것과 단 것을 섭취하자더불어 이웃들을 위해 내 것을 나누자동시에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고 근심하지 말자고 격려합니다.

이런 격려에 힘입어 이스라엘 공동체는 본문 12절 마지막 절에서 영적으로 회복되고 부흥되는 감격으로 본문이 마무리됩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저는 본문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런 소회를 가져보았습니다.

어떻게 포로 귀환 공동체가 이렇게 극적인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완전하지도 않은 국가 공동체의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이런 부흥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을까?

오늘 주일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영적인 레마입니다.

 

그들이 말씀 앞에 다시 서기를 갈망했고 그로 인하여 그들은 영적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한 번 복기하십시다.

수문 앞 광장에서의 부흥사경회의 시작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출발입니다.

이 부흥회가 열리자 지지자로 하나님이 세워둔 동역자가 에스라요느헤미야요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동역자였지 은혜의 출발 근원지는 아니었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하나님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에스라에게 종용한 주체들은 예루살렘 본성에 거하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일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책을 가져와달라고 요청한 것은 말씀 앞에 다시 서기를 갈망했다는 말입니다.

말씀 앞에서 다시 서기를 열망했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인 사모함은 에스라를 강단에 서도록 하는 시너지를 발휘하게 했고그 현장에 함께 했던 레위 사람들 즉 영적 지도자들도 은혜로 각성시키는 바람을 일으켰고결국에는 이 모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느헤미야까지 성벽봉헌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독려한 신앙의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한 것입니다.

다시 설교의 서두에서 말한 양진이의 일화로 돌아갑니다.

양진이는 대학 동아리의 연합회 회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맡고 있는 크리스천 리더입니다.

전술했듯이 그는 지금 청파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는 매주 담임목사인 김기석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김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에는 빈틈이 보일 리 만무입니다.

올바르고 또 선명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가르치는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경우에 따라 수없이 말을 바꿔야 하고상황에 따라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하는 리더로서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제게 토로했습니다.

간접적인 위로라고 합시다.

본인이 크리스천인데 매우 크리스천답지 못한 액션을 해야 할 때담임목사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제게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서 제게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목사님목사님은 설교를 준비하실 때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확신하면서 준비하십니까?”

아마도 제게 여백이 있다고 위로 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제게 조금의 빈틈이라도 제공받아 상황윤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해하실 거라는 위로의 답변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양진이에게 제가 주었던 메시지는 여백이나 빈틈이 아니라 이것이었습니다.

양진아말씀 앞에서 부들부들 떨자

이 말을 바꾸면 이런 뜻이 됩니다.

크리스천이 살아가야 할 좌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타협할 수 있는 다른 것은 없다.”

주전 6세기 예언자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3:1-3절입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바벨론에서 조국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던 에스겔은 아프고 쓰라리고 울고 싶은 통절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의 마음을 알고 계셨기에 두루마리(Bible)를 주시며 먹으라 하셨고 먹었더니 꿀처럼 달았다고 표현함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사후 약 700년 후에 하나님은 또 다른 사역자인 요한에게 이렇게 미션을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0:8-10절입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사도 요한이 먹었던 두루마리는 에스겔이 먹었던 것처럼 달지만 않았습니다.

에스겔처럼 입에서는 달았지만 배에서는 썼다고 말합니다.

예언자의 시대와는 달리 시대말의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쓰디 쓴 맛을 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말씀대로 살기를 신경질적으로 싫어하며극도로 거부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말씀이 쓰고 또 써서 뱉어내기에 급급한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바로 지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패역의 시대에 나를 다시 세우고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견고하게 붙들게 해주는 것은 말씀 앞에 다시 서는 것 외에는 없음을 명심하고 날마다 말씀 앞에 다시 서는 훈련과 복기가 지속되기를 기대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자이기에 먼저 성경이 나에게 매일 말씀하시도록 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풀이할 수 없다만약 내가 기도하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면내 직무를 감당하면서 그 말씀을 잘못 사용하게 될 것이다만약 그 말씀이 매일 내가 행하는 직무 속에서 자주 공허한 것이 된다면만약 내가 더 이상 그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다면이는 내가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하도록 말씀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거룩한 시간을 오랫동안 소홀히 했다는 명백한 표지임에 틀림없다만약 내가 매일 나의 주님이 그날 나에게 말씀하시도록 말씀을 읽지 않는다면 내 직무를 잘못 행하는 것이다.” (스티븐 니콜슨,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아바서원,pp,127-128)

양진이에게 제가 풀이해서 설명해준 본회퍼 목사의 일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목사도 말씀 앞에 날마다 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또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도 성도로서 이 배교의 시대를 살아내려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시대의 미션입니다.

다음 주일부터 우리 세인교회는 히브리서 앞에 설 것입니다.

히브리서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비춤으로 다시 일어서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고/우리의 캄캄한 마음이/그를 몰랐으며/우리의 무지한 채찍질로/그를 내리쳤고/우리의 악독한 혀가/그를 정죄했으며/우리의 폭력의 손길이/그 몸 멍들게 때렸으며/살인자의 본 받아/우리는 그를 찔렀소/우리는 그를 죽였지만/우리는 그를 죽였지만/그는 살아나셨고/우리의 악함을 벗기셨소/우리는 그를 죽였지만/우리는 그를 죽였지만/그는 살아나셨고/우리의 악함을/우리의 악함을/우리의 악함을 벗기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