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그네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13-16
서론)
“우리가 거기에 이르면 기쁨에 겨워 소리칠 것이다. ‘드디어 집에 왔다! 그래, 여기가 진짜 고향이지. 본래부터 난 여기 사람이었어.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지만, 평생 이 땅을 그리워하며 살았거든’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여태 거쳐 온 온갖 모험들은 사실 ’표지와 제목이 적힌 속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누구도 읽어보지 못한 이야기, 영원히 계속 될 이야기, 한쪽을 넘길 때마다 이전 보다 더 근사한 내용이 튀어나오는 더없이 위대한 이야기의 첫 장이 펼쳐질 것이다.”(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두란노, p,345.)
리더반 교재로 보고 있는 팀 켈러 목사가 쓴 ‘하나님을 말하다’에 나오는 감동의 문장입니다.
이 말을 되새긴 팀 켈러 목사는 지금 췌장암 투병 중에 있습니다.
최근 켈러 목사는 자신의 근황을 저널 크리스천 투데이를 통해 알렸는데 14번의 항암화학요법(chemotheraphy)을 통해 종양의 크기가 현저하게 작아졌다고 보고하면서도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진짜 거기에 계시다’고, ‘하나님으로 충분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대개 고통의 순간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행복한 시간을 고통 중에 느끼고 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암 진단을 받기 전의 영적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 들 때다.”
글을 읽다가 팀 켈러 목사는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담대하고 용기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이렇게 자답해 보았습니다.
“그는 나그네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베드로전서 1:1-2절을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본인이 전하는 서신의 수신자에 대하여 두 가지의 특징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①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이라 했습니다. (1절)
② 이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2절)이라고 정의합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는 지금 터키를 지칭하는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베드로가 히브리적인 혈통을 갖고 있던 골수 유대인인 점을 감안할 때 이방의 지역인 것이 당연합니다.
바로 베드로가 보고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단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는 '흩어진‘ 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나그네‘라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쓴 편지를 받는 대상자 즉 수신인의 정체성을 ‘흩어진 나그네’라 했습니다.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 즉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이들은 지금 네로의 박해로 인해 전무했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로마라는 도시 뿐만 아니라 로마의 속주에 속한 이들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핍박의 상황은 매일반이었습니다.
이 핍박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핍박과 죽음의 공포 속에 있었던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가 바로 베드로전서입니다.
베드로가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한 메시지의 근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영원히 거주할 땅이 아니라는 권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만 이 고통의 끝은 반드시 있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1:6-7)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나그네라는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본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오늘 본문으로 제시한 히브리서 11장을 학자들은 믿음장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히브리서 11장은 아벨을 시작으로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요셉, 모세 그리고 사무엘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믿음의 롤 모델로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본문 13절 기록을 보십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메시지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된 것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약속된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반겼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임을 인정했습니다.”
이 사람들 즉 믿음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등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언급한 이 사람들에 비해 아주 오랜 후대에0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믿음의 선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한 가지의 사실에 주목하며 논했습니다.
이들은 공통분모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 의식입니다.
횃불트리니트 신학대학원 조재천 교수는 이 두 단어를 아브라함에게 적용하면서 아주 의미 있게 해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외국에서 살 듯 그 땅에 얹혀살았다.”(조재천, “히브리서”,홍성사, p.186)
잘 아시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고향은 바벨론 지역인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곳에서 나름 부유하게 살던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고향을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창세기 11:31절의 보고에 의하면 그가 떠날 땅은 가나안이었습니다.
우르에서 떠나야 할 가나안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정말로 낯선 땅이었습니다.
생소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 있어서 가나안은 말 그대로 외국인이요 나그네였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 모두가 이렇게 외국에 얹혀사는 나그네 같은 인생을 공히 경험한 자들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이런 나그네 같은 삶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 14-16절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적어도 이 땅이 내가 머물 영원한 장소가 아니라 잠시 머물 땅임을 아는 자는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더 중요한 것을 인식하며 산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적시합니다.
바로 본향을 기대하며 사는 삶입니다.
나그네는 이 신앙의 정신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영어성경 번역을 보면 ‘본향’이라는 단어를 ‘homeland'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풀면 ‘조국’, ‘고국’, ‘모국’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7장을 보면 우리들이 예민한 영적 의식을 갖고 살펴야 하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아들 요셉으로 인해 7년 동안 극한 흉년이 든 가나안으로 떠나 애굽의 고센으로 이주하여 17년을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본인이 열조에게로 돌아갈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알고 요셉에게 다음과 같이 하명합니다.
창세기 47:29-30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은 이방의 땅에서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창세기 50장의 증언에 의하면 야곱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혀 있는 마므레의 막벨라 굴에 묻히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적어도 야곱에게 있어서 자신의 homeland는 고센이 아니라 가나안이었습니다.
무엇을 영적으로 시사합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이 본향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해 줍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믿음의 선진들은 본향을 더 사모한 자들임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추석 명절이 시작되는 연휴의 첫 날이 공교롭게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해석을 통해 어떤 은혜를 공유해야 할까요?
※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본향을 사모하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한 가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적어도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으면 항상 우리들이 천착하는 것이 나에게 종말론적인 믿음이 있는가에 대한 확인으로 답하려고 하는 우를 범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졌는가를 확인하며 사는 삶이 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본향을 향하여 살아가는 신앙인인가를 대답하기 위해서는 더 중요한 과정이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일까요?
※ 오늘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에 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제 조용기 목사의 발인 및 하관 예배가 한국교회 장으로 실시되었습니다.
86세를 일기로 한국교회의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조용기 목사는 별세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차준희 교수와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조문을 가려고 해. 상당수 교수들은 조문을 안 가려고 하는데 내일은 가보려고 한다. 그분은 내게 분명히 학교의 틀을 바꾸게 해준 사람이니까.”
차준희 교수는 독일에서 학위 과정을 마치고 모교에서 강의를 할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용기 목사께서 차 교수를 만나고 싶어 해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한세대학교를 설립한 조 목사는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친구에게 제의하며 도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평생 한세대학교 교수로 사역하게 된 친구는 조용기 목사와 인연을 무시할 수 없는 관계이기에 조문을 가려한다고 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도 저와 같게 조용기 목사의 신학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가장 한 복판에 번영신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세대학교에서 재직한 친구는 순복음 신학 중에서 삼박자 축복과도 같은 신학적 노선이 다른 이유 때문에 적지 않게 어려움을 당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친구가 전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 목사님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오늘 여기까지 양적 성장을 하게 된 실질적인 역할을 그 분이 했다고도 했습니다.
그가 행한 한국교회를 향한 功이 분명히 있는데 過에 가려져서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했습니다.
별세한 조용기 목사를 향하여 던져지고 있는 비난과 화살을 보면서 한편으로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진심어린 소회를 제게 피력해 주었습니다.
전화를 끊기에 앞서서 저도 한 마디를 했습니다.
사정이 어떻든지, 상황이 어떻든지 고인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무자비하게 달리는 댓글 폭력을 보면서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도 악할까에 경악한다고도 했습니다.
최소한의 예의가 지켜지는 가운데 장례 일정이 진행되기를 기도한다고 전했습니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 나서 여러 가지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다가 제 마음에 깊이 침잠한 생각이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았는가가 본향을 향하여 한 발을 더 내 딛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크리스티아노스로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시금석이다.”
누가복음 10장과 18장을 비교해서 보면 우리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고, 한 사람은 부자 청년관원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에 붓고 싸매고 주막으로 인도하고 가서 그를 보호해 달라고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부탁을 합니다.
돌아올 때 돈이 더 들었다면 그 비용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말까지 남깁니다.
누가목음 18장을 보면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두 가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청년은 큰 부자인고로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상황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나그네 의식을 갖고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 입니다.
나그네 의식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추구하는 세상적인 욕심으로부터의 단절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갈파는 새길 만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누가 인간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p,89.)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그가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건 생각할수록 재앙이며 비극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면 그건 최고의 복이자 희망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본향을 향하여 사는 것이 이 땅이 지겨워서 탈출하는 유토피아로 옮겨지기를 원하는 삶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도리어 본향을 향하는 믿음은 이 땅에서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차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이타적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김기석 목사가 갈파한 이 말은 그래서 타당합니다.
“천국을 가고 싶은 사람은 이 땅에서 천국에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을 내 삶에서 제거해 버리고, 있을 것 같은 것은 채우며 살아야 한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고향에 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펜데믹의 한 복판에 있는데 오시느라고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셨습니까?
고향이기 때문에 오신 것일 겁니다.
부모님이 있고, 가족이 있고, 그리운 친구들이 있는 곳이니까요.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다시 추석 명절이 끝나면 또 여러분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젠가는 진짜 고향에 갈 때가 올 것입니다.
그곳은 왔다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나그네의 삶을 마치고 가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 나그네로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는 날,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본향에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김두완 장로가 쓰고 김희보 목사께서 쓰신 명곡이 있습니다.
‘본향을 향하네’ 입니다.
공유 사이트에 있는 동영상을 통해 이 곡의 은혜를 듣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