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2일 주일 오전 예배 제목: 내가 목회하는 이유 본문: 요한계시록 3:1-7 서론) 금요일, 아침에 하소 천으로 운동을 나갔습니다. 걷기 운동은 조금은 빠른 속도로 일정하게 걸어야 하기에 그날도 조금 숨이 찰 정도의 속도로 걸었습니다. 걷다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멈춰 서서 휴대폰 카메라로 한 컷을 찍었습니다. (그림 보기) 하소천 둘레길 담벼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 넝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흙바닥이 아닌 담을 타고 올라가며 피어난 넝쿨을 보다가 갑자기 도종환 시인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지금 제천시민들이 시민들의 품에 돌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비행장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들을 보면서 가을을 정취를 물씬 느낍니다. 코스모스의 아름다움은 코스모스만이 줄 수 있는 특징입니다. 그러나 코스모스에 비해 정말로 볼품도 없고 향기도 없으며 사람들의 시선에서 언제나 열외 되다시피 관심 외에 있는 담쟁이 넝쿨을 보다가 도종환시인의 시어가 너무 크게 다가왔습니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왜 이 시가 그리 크게 다가왔을까를 걷는 동안 사유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이래야 한다는 교훈에 도달했습니다. 제 1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메시지를 유다 백성들에게 뼈아프게 전한 글입니다. 이사야 29:13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펜데믹을 거의 2년여를 경험하면서 절절하게 체감하는 유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유리(遊離)함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 그대로 입술의 잔치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종교인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 입술로 주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자들은 펜데믹 이전보다 더 들끓고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입술의 고백이고 마음의 고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글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좋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김기석, “죽음을 넘어 부활을 살다”, 두란노, 179)
단 한 자도 뺄 수 없는 촌철살인입니다. 분명히 신앙의 노정 안에 있다고 입술로 고백은 하지만 실상은 내가 좋은 대로 사는 이율배반에 빠져 있는 자들로 넘쳐나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런 자기만족의 신앙의 여정이 본문의 배경이 되는 초대 교회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더 아픈 것은 이런 비틀어진 신앙의 왜곡은 초대교회시대를 뛰어넘어 오늘 즉 호모데우스의 시대에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는 아픔입니다.
본론)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7교회가 있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입니다. 이 7교회 중에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로 등장하고,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는 칭찬과 책망을 공히 받은 교회로 기록에 나오지만 유독이 라오디게아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데 교회는 칭찬은 찾아볼 수 없고 책망만 묘사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둘 다 책망만 받은 교회인 라오디게아와 사데 교회 중에 그 책망의 무게가 라오디게아보다 사데 교회가 더 무겁고 엄중하다는 점은 주목해야 하는 점입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는 이 책망이 사데 교회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데 교회를 이렇게 무섭게 책망하셨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의 일갈을 답으로 제시하겠습니다. 그는 세 가지로 일축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 두란노, pp,108-110) ① 영적인 묘지 같은 교회 ② 거짓 명성을 가진 교회 ③ 위선을 행한 교회
세 가지 중에 그 어느 것 하나 오싹하지 않는 명제가 없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 중에 이런 별명이 붙어 있는 교회라면 어떤 생각이 들어야 정상입니까?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소회가 들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사데 교회를 이렇게 극언을 서슴지 않고 책망하셨을까요?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분노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데가 유명해진 이유는 이곳이 바로 옛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한 고대 도시의 수도가 정해졌다는 말은 그만큼 이 땅이 비옥한 땅이라는 말입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50km, 서머나에서는 동쪽으로 약 80km 떨어져 있는데, 트몰루스 산기슭을 따라 헤르무스 강의 비옥한 골짜기에 위치해 있기에 여러 내륙 도시가 만나는 천혜의 도시이기에 활발한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부를 창출해 내는 화려한 도시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소아시아 성지순례 때 사데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을 방문했다가 왜 이 교회가 무서운 책망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데를 방문하였을 때 너무 놀랐던 것은 사데 지역에서 당시 섬기고 있었던 아데미 신전 터의 위용이었습니다.
사데 사람들은 이 우상의 제단을 실로 어마어마하게 건축했습니다. 지금은 지진으로 거의 대부분의 터가 무너졌지만 그 당시에 세워진 기둥들이 오늘의 사데 터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할 정도입니다. 거기에 비해 가이드가 안내한 사데 교회는 정말로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 문에 십자가 표시가 있어서 이곳이 사데의 교회 터라고 짐작할 수 있지 도무지 이런 곳이 소위 말하는 소아시아 교회의 큰 교회였던 사데 교회 터였을까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초라함이 남아 있어 충격이었습니다.저는 지금 건물의 크고 작음을 빗대어 외형적인 비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상징인 아르테미(아데미)의 위용에 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예배당의 초라함을 보면서 당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들의 영적인 피폐함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버려짐은 사데 교회가 영적 우선순위의 무감각이라는 교회의 치명적 상태에서 초래되었음을 마치 고발하고 있는 듯한 서늘한 경종을 사데에서 느꼈습니다. 사데 교회는 버젓이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번지르르 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자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주님은 요한을 통해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구절을 통해 또 하나, 저와 여러분이 긴장해야 하는 도전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주님의 이 설파는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익숙한 지인들이 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인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신앙공동체의 지체들이 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으셨습니까? 나의 행위입니다.
가만히 이 말씀을 묵상하면 한 발자국도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감출 수 있는 나의 추악한 비밀, 사람들은 멀쩡하다고 여기며 심지어 참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야, 저 정도면 본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나의 감추어져 있는 영적인 더러움과 이중적인 삶을 주님은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정말로 살 떨리는 두려움이 있다면 혹시나 하나님께서 우리 세인 교회를 향하여 이런 책망을 던지실까봐 두렵고 또 두렵습니다.
2절을 보십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무슨 의미입니까? 사데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나 사데 지역에 있는 불신자들이나 내가 구분을 못하겠다는 토로입니다. 소위 말하는 세속화에 흠뻑 적셔져 있어 예수 믿는 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주님의 성토가 담겨 있습니다. 전혀 세상과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라는 이름만을 갖고 있는 자들의 세속화입니다.
정리하자면 1-2절을 통해 사데 교회에 내린 무서운 책망의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교회와 성도의 세속화 ② 영적 구별성의 상실입니다.
본문 3절은 이런 망가짐에서 회복할 수 있는 단서를 만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회개하며 돌이키는 삶입니다. 주님의 방법 제시입니다.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문 1-2절만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와 지체들과 별반 다름이 없는 것 같아서입니다. 펜데믹의 과정 중에 우리 교회를 위시하여 상당수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정체성이 사데 교회의 자화상에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기까지 사데 교회를 진단하면 정말로 유구무언이며 사면초가이며 고립무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게 책망을 받은 교회인 사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내 심령을 울컥하게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저는 이 구절이 눈물 나게 반갑습니다. 사데 교회에 이런 성도가 있었다는 인정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흰 옷 입은 자 몇 명’
사데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 상당수가 이름만 살았지 실상은 영적으로 싸늘하게 송장처럼 죽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면 이런 자도 있었습니다. 거짓 명성으로 포장되어 있던 교회이자, 위선을 행하던 사데 교회 안에는 그것들과 정 반대로 영적인 순결함을 사수하고 고독하지만 세속적인 일체의 것들과는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위로를 받습니다. 누구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로 흰 옷을 입은 자 몇 명입니다.
본문 5절을 소개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일곱별을 가지신 주님이 이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당신의 몇 안 되는 백성들을 향하여 약속하셨습니다. ① 지속적으로 흰 옷을 입게 하리라 ②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으리라 ③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여 줄 것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성도가 달려갈 길의 끝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왜 이 땅에서 우리가 수고합니까? 왜 영적인 분투를 합니까? 왜 고독하지만 이 길을 갑니까? 바로 주님이 사데 교회의 몇 안 되는 이런 성도에게 약속하신 그 은혜와 축복을 믿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는 설교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내가 목회하는 이유’ 그리고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더 만들기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사데 교회의 영적 실상을 그대로 노출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존 스토트 목사의 인용대로라면 영적인 묘지 같은 교회, 거짓 명성을 가진 교회, 위선을 행한 교회일 테지만 담임목사의 진단은 조금 다릅니다. 저는 사데 교회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세속화에 무능력하게 점령당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목 설교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통감해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세속화와 치열하게 싸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제 목회의 미션은 그런 하나님의 사람 더 만들기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걷기 운동을 하면서 ‘잘잘법’을 통해 시대의 경종을 울리는 이재철 목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 목사께서 전한 메시지의 요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야기된 펜데믹은 절대로 교회가 펜데믹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이 겸손하게 이제 두 트랙 즉 온라인과 오프라인 교회 중에 온라인 교회에도 집중하여 사역해야 함을 권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결코 오프라인을 강조하는 목회를 고수해서는 안 됨을 강하게 역설했습니다. 교우들께서 아시는 것처럼 이재철 목사는 그 어른이 현직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마음의 멘토십을 갖고 그분의 목회를 닮으려고 노력했고, 또 지금 현직에서 은퇴를 한 그 분의 가르침을 놓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하는 목회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어제 들었던 이 목사님의 가르침과 권면의 의도를 기 십년 동안 주목했던 사람으로 충분히 공감하고 또 인정합니다. 그러나 펜데믹 상황이라는 전무했던 참담한 현실을 목도한 오늘, 아직은 현직에 있는 목사인 저는 이 목사님께서 말씀하려고 했던 의도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해석의 빈틈과 다름이 보여 재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독교 여론에서 말하는 포스트 코로나 이후, 혹은 위드 코로나의 시대가 앞으로 펼쳐질 터인데 이 시대에 코로나 19 이전의 교회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명제에 대해 조금도 이의를 달지 않고 동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19 이전 시대의 한국교회의 신자 분포도를 전제하며 설명할 때 여론은 약 20% 정도의 신자들이 이탈하거나 궐석 신자(대면 예배는 포기하고 온라인 신자로 굳어진 신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보다 조금 더 우울하지만 적어도 저는 30% 이상을 상회할 것이라고 진단할 정도로 더 예민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를 비롯한 조금은 앞서간다고 인정받는 목회자들은 바로 이 신자들을 위한 목회가 필요하며 그런 목회를 감당하는 것이 지혜로운 펜데믹 이후의 목회가 될 것이라고 종용하며 심지어는 압박하고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목회를 바라보는 목회자가 그 상황에 대해 민감하지 않은 목사가 있겠나 싶을 정도로 저 역시 사유하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저의 목회적인 고집이나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목회 철학이 있습니다.
오프라인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하면서 그것이 목회의 원칙이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목회하는 목회자와 성도는 뭔가 부족한 자이고, 바른 시대적, 역사적 인식을 하지 못하는 답답한 목사이자 성도라고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코로나 정국이기에 온라인 예배가 신학적인 대안이며 그것만이 한국교회 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세상과 함께 하는 방법이라고 몰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가니 따라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하는 예의라고 호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세인 교회입니다. 적어도 세인 교회를 담임목사도 그 정도의 역사적 인식은 갖고 목회합니다. 다만 제가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대세가 그러니 따르는 것이 정의인양 부화뇌동하는 세속적 사상에 대한 강제적 동의를 요구하는 작태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데의 상황이 그러니 사데를 품어야 한다고 압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하는 이유는 사데를 품어야 하기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목회하는 이유는 사데(세속화의 물결)가 괴물 같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담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담벼락을 용기 있게 올라가며 자라는 담쟁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사데에 속하지 않고 사데에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내가 왜 이 목회에 목숨을 거는가? 본문 4절을 마지막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라는 극히 질이 나빴던 세속화에 타협하지 않고 본인들의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데 교회 안에 있었던 극히 작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주군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와 함께 다니는 합당한 자이다.’
나는 세인 공동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한 자들이 만들어지도록 남은 사역의 시기를 보낼 것입니다. 내가 목회하는 이유는 예수께 합당한 자라고 인정받는 주의 거룩한 흰 옷을 입은 자 만들기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 페이스북에 아이튼 토저 목사의 글 서평을 올렸습니다. A.W. 토저의 “철저한 십자가, 주의 사자가 앞서 인도하신다, 믿음에 타협은 없다”(규장)를 읽고 필자가 좋아하는 출판사의 책들이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이겠지만 20대 신학 공부에 한참이던 시절에는 한국신학연구소에 나온 책들을 상당수 독서했다. 현장 목회를 막 시작하던 30대에는 교회 부흥이라는 화두에 밀려 두란노 서원, 그리고 규장에서 나온 책들을 많이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40대에는 목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있어서 그랬는지 부흥과개혁사, 홍성사 책들에 열광했다. 40대 후반 즈음에는 분도출판사에 한동안 필이 꽂혔던 시간도 있었다. 50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이동이 있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책들을 섭렵하려고 나름 노력했고, 한들 출판사와 동연의 책에 몰입하려고 했다. 물론 지금 열거한 것은 기독교에 관련한 분석이다. 그러다보니 지난 세월동안 보수, 중도, 진보적 출판사의 과정을 모두 거친 셈이다. 결론의 이야기를 먼저 들추어내고 싶다. 나름 그런 대로 거론한 일련의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들은 내게 많은 공부를 하게 해 준 좋은 길라잡이의 역할들을 해 주었다. 하지만 작금에 거의 손절한 출판사가 있다. 개인적으로 거론해서 유감이기는 하지만 규장의 책들이다. 때늦은 후회이기는 하지만 규장에서 출간한 책들 중에 상당수는 성과주의 혹은 성공주의 그리고 positive thinking을 근간하는 매우 위험한 책들이 많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규장에서 출간한 책 중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목회에 성공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줄곧 쓰는 상투적인 어구는 부정적인 사고방식들이다.”
말한 이를 거론하면 개인적인 공격이 될 것 같아 피하겠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지금 목회현장에서 탈락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글 중에 내가 기억하는 최악의 문구다. 그가 실패의 자리라고 정의한 현장에서 주군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선혈이 낭자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다. 그러기에 그의 선동질은 주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아주 질 나쁜 행위다.
이런 종류의 글을 규장에서 발간한 책에서 곧잘 발견한다. 대단한 유감이다. 사정이 이러기에 나는 규장의 책들을 거의 손절한 상태다. 그런데 틈새가 있어 나도 고민스럽다. 완전히 손절하지 못한 이유는 20세기의 선지자라고 호칭되는 A,W 토저의 글이 규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 2주 동안 토저의 글 3권을 읽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펜데믹 2년의 상황을 거칠게 경험한 2021년 9월 9일인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글 때문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고 다시 불편한 목사 살기를 복기했다. 몇 구절만 나누자.
“나는 더 거룩해져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쓸 뿐이다. 내가 지나치다면 이해해 달라. 말씀대로 사는 일이라면 모자라는 것보다 지나친 것이 차라리 낫다.” (믿음에 타협은 없다, p,218.)
“당신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영적 무감각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멀리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주의와 무관심은 영적 무감각의 독버섯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토양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부터 살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영적 무감각을 지적하는 것은 쉽다.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영적 무감각운 잘 찾아내면서도 자신의 영적 무감각은 의식하지 못한다. (중략) 영적 무감각에 빠진 그리스도인은 목적 없는 게으른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위의 책, pp, 260-265)
“교회가 편안함에 빠져 버리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것을 망각하고 만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편해지는 것을 싫어하고 편해지는 것을 좋아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편해지기를 원한다. 그들의 등을 두드리며 ‘여기서 우리는 친구입니다.’라고 말한다.” (주의 사자가 앞서 인도하신다. p,143)
“오늘날 우리의 귀에 ‘지루해 죽겠는데 뭐 재미있는 것 없나? 라는 아우성이 들린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churchgoer)을 즐겁게 해주는 소설, 드라마, 그리고 온갖 종류의 오락을 제공한다. 오늘날 복음을 믿는 교회에 세상만큼 오락이 넘쳐난다.” (위의 책, p,192)
“오늘날 복음주의에 속한 우리가 왜 이토록 약한가? 그것은 그리스도 다음에 + 부호를 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십자가, p,60.)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그분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위의 책,p,64)
“십자가를 피하려고 애쓰지 말라. 편안한 길을 거부하라. 능력도 열매도 없이 교인들을 등을 두드려 주어 편히 잠들게 만드는 교회에 안주하지 말라. 십자가에 물감을 칠하지 말고, 꽃으로 장식하지 말라. 십자가를 십자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것이 죽음과 생명에 이르는 힘든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가 당신을 완전히 죽이게 하라. 하나님을 찾으라. 거룩함을 추구하고 당신이 당하게 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위의 책, p,131)
2주 전에 토저의 이 갈파를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인용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그분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날 인터넷으로 섬기는 교회의 설교 영상을 매주일 보고 듣는 지체 한 명이 나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목사님, 세인 교회 설교가 대단히 불편한데 자꾸만 클릭하게 되네요.” 2022년 세인 교회의 표어를 잠정적으로 정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 (갈 6:14)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믿음에는 타협은 없습니다. 사데 교회 안에 있는 옷을 더럽힌 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사데 교회 안에 있었던 주의 거룩한 희 옷을 입은 자로 살 것인가? 이강덕 목사의 목회 이유는 흰 옷 입은 자 더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 누구도 내 생명 다하도록 주 얼굴 만구하리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 누구도 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 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 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 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 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 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