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당신의 삶에 예배가 있습니까?2024-03-07 16:09
작성자 Level 10

2021년 9월 5일 주일 오전 예배

 

제목당신의 삶에 예배가 있습니까?

본문로마서 12:1-2

 

서론)

 

휴가처에 가지고 올라간 책이 세계적인 정신과 전문의인 스캇 펙이 쓴 아직도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그의 일갈을 하나 소개합니다.

사랑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걸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확실히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이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삶의 첫 번째 목적이 수동적으로 사랑 받는 것이라면 당신은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율리시즈, p,145.)

정신과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정신분열증 환자의 초기 증상이 자기애적 퇴행(narcissistic regression)이 너무 심한 상태라고 진단하는데 동의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상태가 극도로 심해지면 정신병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스캇 펙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정의했는데 시의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 마음에 담았습니다.

사랑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분별 있게 주는 것이다동시에 분별 있게 주지 않는 것이다.” (위의 책,p,158.)

신앙생활도 이런 관점에서 적용해 보면 참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첫 시작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명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맞는 접근입니다.

깊은 영성이 아니라 표면적인 종교적인 감성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나를 위해서 믿는 종교에 첫 발을 디딘다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의 공통분모이며초기적 신앙생활의 이유입니다.

이번에 휴가기간동안 낙산사를 방문했습니다.

낙산사 경내에 붙어 있는 수없이 많이 붙어 있는 리본에 쓰여 있는 기도문을 스치면서 읽었습니다.

수능대박로또 대박부자 되게 해주세요암을 고치게 해주세요예쁜 여자 만나게 해주세요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만수무강 등등 소원들의 면면이 모두가 내게로 향해 있는 복이었습니다.

딱 하나 눈에 띠는 문구가 보였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윤석열이 되게 해주세요!

다시 강조하지만 표피적 종교에서는 얼마든지 이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첫 발걸음은 거의 대부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상례입니다.충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신앙생활이 세월이 흐르면서 교리도 공부하고신앙의 내외적 체험도 경험하면서 영적인 시각이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건 재앙이자 참극이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연조가 1년을 넘어 2년이 되고 2년을 넘어 5년이 되었고또 5년을 넘어 1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 되었을 때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중심적인 신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스캇 펙의 말대로 나는 가치 없는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일이고동시에 영적 정신분열증 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위험성을 인지하고 일찍이 이렇게 경고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6:1-2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유치원생 수준으로 그리스도를 그리는 데서 벗어나멋진 작품을 만드십시오그리스도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가십시오그 기초가 되는 진리는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노력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서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과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입니다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우리는 이 모든 진리를 충실하게 붙들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니 계속 나아가십시오.” (메시지 히브리서 6:1-2)

성경의 권면이 이런데 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진단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은 본인들이 공부한 내용으로 해석하여 질문에 답할 것입니다.

나름 경청해야할 내용들이 그들의 제시함 속에 있다는 것을 저 역시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자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자기중심적인 자기애그리고 극단의 이기성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사용할 방법으로 오늘 주일 아침에 영적 스펙트럼을 제시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자기애적인 영적 질병에서 허덕일까요?

본문을 통해 찾아보십시다.

 

본론)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는 첫 번째의 단어에 주목하십시다.

그러므로입니다.

이 단어는 원어성경에 보면 ‘ou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 이라는 헬라어 접속사는 인과관계 접속사입니다.

이 말은 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앞에서 말한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1-11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키고 믿어야 하는 교리를 역설했습니다.

그런 뒤에 12-15장까지 바울은 교리를 배웠으니 이제는 그렇게 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편지로 남깁니다.

주목할 것은 11-12장을 이어주는 단어가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라는 점입니다.

배웠으면 마땅히 살아야 한다는 영적 압박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압박하고 있을까요?

 

※ 삶의 예배를 드리라고 압박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바울의 관점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삶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도발했습니까?

이미 알고 계신 교우들은 주지하듯이 바울이 뵈뵈 집사에게 전달하라고 쥐어준 로마서는 로마라는 당대 최고의 도시에 살고 있었던 문명인들이 대상자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서의 특징은 이 서신은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수신의 대상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환언한다면 타 지역에 있는 그 누군가 신실한 형제가 제천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제천세인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기 위해서 쓴 글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로마서라는 대서사시라는 말입니다.

수신자가 이미 예수 믿는 자들인데 표현이 도발적이지 않습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드리는 것이 영적인 예배라고도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도발한 것은 당시 로마 교회에서 신앙의 여정 안에 있었던 로마 교회의 신자들의 영적 상태와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서가 집필 될 당시 로마는 세속 도시의 금자탑을 쌓고 있을 정도의 무소불위의 물리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제국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표어를 주창했습니다.

번역하면 로마를 통한 평화라는 슬로건입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완전히 거짓된 평화였습니다.

로마의 군사적인 복종 하에서만 누리게 되는 힘에 의한 평화라는 말입니다.

결국 로마는 철권통치를 통해 평화를 강요한 셈입니다.

허호익 교수는 이렇게 그 거짓된 로마의 민낯을 고발했습니다.

그대로마인이여힘으로 나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평화의 길을 부과하고 정복된 자를 살려주고 거만한 자들을 짓밟는 것이 그대에게 맡겨진 일이다.” (허호익, “예수 그리스도1”, 동연, p,444.)

폭력에 의한 평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장소가 로마였습니다.

바로 이런 땅에 로마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로마 교회도 어떤 경우에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기도 했고세속적 관점에서 교회가 운영되기도 했습니다.

동성애의 죄가 그대로 인정되고신자들의 성적 윤리는 일탈되었습니다.

그 상태는 실로 심각한 상태였고 집단적 정신병적인 증세가 횡행하던 판세가 로마와 그 로마교회에 있었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의 자화상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로마서 1:26-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추악탐욕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살인분쟁사기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 지경으로 망가져 있는 로마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바울은 사자후를 선포합니다.

다시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이 로마 교회의 지체들에게 요구한 것은 외형적인 그 무언가의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내적인 예배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내 몸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식인종입니까?

내 몸을 요구하시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바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된 내 몸을 요구하신 이유는 후반절에 분명한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렇게 내 몸을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번역된 영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로기켄의 번역입니다.

이 로기켄의 원형이 로기코스인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영적이라고 해석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는데 바로 합리적인’ 혹은 이성적인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절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이 더 원어적으로 가까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어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형제자매 여러분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표준 새 번역 로마서 12:1)

저는 바로 이 대목에서 오늘 주일 설교의 가장 강력한 레마의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몸으로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무엇일까요?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찬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한 내 삶은 어떤 삶일까요?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입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대한 소개가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1:26절입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

이 표현은 안디옥 교회의 지체들끼리 부르던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칭은 철저히 안디옥의 비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던 호칭이었습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은 이해를 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구별되게 모여서 비밀스럽게 모임을 갖고성만찬을 인간의 고기를 먹는 행위로 알고 식인종처럼 그렇게 폄훼하였고남녀가 함께 모여 집단으로 혼숙하는 아주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인정하여 평가절하 시키던 호칭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안디옥 교회의 지체들은 이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그리스도인처럼 오늘날 세상을 본받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휴가처에 읽은 또 하나의 책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지는 것은 멍에가 아니다다른 사람이 이 짐을 지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당신의 어깨에 얹어 놓는 것이 진짜 멍에다.” (아이든 토저, “믿음에 타협은 없다.”, 규장, p,150.)

가만히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멍에를 상황 때문에 짊어지게 된 자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맨 자여건 때문에 짊어진 자를 향하여 괜찮다고하나님도 이해하실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분위기가 오늘의 기독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본받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또 아무렇지 않은 것이라고 압박하는 세상이 오늘입니다.

저는 사정이 이 지경이기에 도리어 전율하는 감동을 바로 안디옥 교우들에게서 받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는 영적인 사람의 정의는 안디옥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 밖의 사람들이 한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한 복판에서 삶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진성 크리스천이라고 여러분 밖의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있습니까?

 

2) 변화를 날마다 경험하는 삶입니다.

 

2절 중반절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본문 2절에서 말하고 있는 변화를 받아로 번역된 메타몰포호오는 단순한 겉모양의 변화를 말하는 ‘change’의 의미가 아닌 본질적인 형체가 바꾸어지는 ‘transform'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렇게 원어적인 의미를 적용하여 2절의 내용을 다시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라면 이 세대의 풍조를 뒤따라가지 말고 우리들의 본질적인 내면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꿔지는 사람들이라는 권면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8-2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단순히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한 구절이지만 이 구절의 고백은 경천벽지의 고백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여인의 후발 액션입니다.

두 가지를 했다고 요한은 보고합니다.

① 가지고 온 물동이를 버렸다.

② 살던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를 전했다.

이 구절을 주석한 더렘 대학교의 챨스 바렛 교수는 의미 있는 해석을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물동이를 버림으로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절연하고 있다.” (챨스 바렛,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1”, p,384.)

변화를 받아의 상태는 바로 이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코 가볍게 여기는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변화는 모양이 아닙니다.

이 변화는 삶의 내용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변화를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까?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본문 2절의 마지막 부분에 집중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분별하라는 헬라어 도키마조는 진짜라고 증명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 증명은 세 가지를 구비해야 합니다.

① 목적이 선하여야 하나님의 뜻입니다.

②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③ 과정 자체가 온전해야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 가지를 경험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사람이자 자기만족의 삶입니다.

우리는 여론을 통해 56세의 강윤성의 보도를 접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문 보도로 인해 목사로 살고 있는 저는 멘붕이었습니다.

전자발찌를 훼손한 뒤에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던 자가 감옥에서 만난 목회자에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새로워졌습니다새로운 삶을 살 것입니다.”

마치 밀양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유괴살인범을 실제로 벤치마킹한 것처럼 보여 오금이 저렸습니다.

삶의 예배는 입술의 토로로 드려지는 말잔치가 아닙니다.

삶의 예배는 내가 목숨을 걸고 있는 나만의 물동이를 버리는 경우에만 도키마조 즉 증명될 수 있는 삶입니다.

물동이도 버리지 않는 자에게 무슨 변화를 기대하겠습니까?

적어도 삶의 예배자는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두 가지의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수고했어도 고기를 잡지 못했던 베드로는 주군이신 예수님을 고기를 잡기 전까지 에피스타테스‘(선생)라고 평가절하 했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잡고 난 뒤에 그는 주군을 큐리오스’(주님)라고 고백하며 나 같은 죄인을 떠나달라고 진정성이 있게 고백하는 입술의 고백과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삶의 결단이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예배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9월 1일 오전에 월삭예배를 마치고 쓴 칼럼을 읽어드리면서 설교를 맺겠습니다.

이번 주는 정기 휴가기간이다안수 받은 목사가 나 말고는 없어 월삭 새벽예배 시간에 집례 하는 성찬식 인도 때문에 휴가처에서 잠시 교회로 복귀했다. 10월 총회에 전담 부사역자가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성찬 사역을 맡길 수 있어 조금은 자유로울 있을 것 같다다시 휴가처로 떠나기에 앞서 아침 큐티를 마치고 국민일보 신문 미션 라이프 란을 열었다글벗 김기석 목사가 쓴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전체주의적 발상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한 가지 예를 들려준다막강한 적들이 도시를 점령한 후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그는 적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이것이 성경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을 좋아하는 이유를 글벗이 고스란히 인용한 것을 보면서 또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가져본다내가 살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이기성이 인간에게 있다이런 소회가 사유함 속에 임했다혹시 이기성이 원죄의 뿌리는 아닐까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 또 이렇게 말했던 갈파가 9월의 첫 날나를 다잡이 하게 한다.

성서적 종교에서 이해된 하나님의 명령은 깨어 있어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을 향하여 가슴을 열라는 것이다존재하는 것일어나고 있는 것다가오고 있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하라는 것이다.” (누가 사람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p,147)

나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진대모든 것에 대하여 가슴을 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인데내가 살고 있는 현장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매우 아프다. 10월부터 섬기는 교회에서 히브리서 톺아보기를 주일 예배 시간에 진행한다신약성경 27권중에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책이라 겁나고 두려워 뒤로 미루고 미뤘는데 지난 초여름 고린도후서를 마친 뒤부터 성령의 압도하시는 강권이 느껴져 시작하려고 한다. 10여권의 히브리서 저작들을 심도 있게 읽고 있다역시 만만치 않다보스턴 대학의 해링턴 교수는 말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을 열어 준다.”(다니엘 J. 해링턴, “최근 히브리서 연구 동향”, CLC, p,117.)

연구를 결정했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다나부터 실천하는 삶의 정체즉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기 말이다신앙생활 잘 하는 목사가 되고 싶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부터 실천하는 삶을 사십시다.

삶으로 예배하십시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당신에게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을 모르던 세월

 

주님을 모르던 세월 방황하던 내 영혼 아름다운 목자 음성을 거역하며 살았네

달콤한 유혹과 즐거움 나를 썩게 하여도 사망의 그늘이 지는 줄 생각지도 못했네

그림자 같은 나날을 욕심으로 채우고 항상 나 하나만 위하여 쓸모없이 지냈네

분토만도 못한 소욕이 어찌 그리 중했나 오 주여 용서해 주소서 머리 조아립니다

부드런 주님의 손길 나를 어루만질 때 육신으로 살던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져

더러웠던 나의 옛사랑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새 옷을 입었네 주여 나를 보소서

시간과 물질과 노력 나의 생명까지도 주님께만 바치렵니다 나를 받아주소서

좁은 이 길 모두 걸으며 주님 다시 뵈올 때 영광의 면류관 쓰고서 영원토록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