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9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본문: 호세아 4:1-4 제목: 3무(三無)를 회복하라 서론) 지난 금요일, 왼쪽 아래 어금니를 끝내는 잃었습니다. 그 동안, 많이 저를 괴롭혔던 왼쪽 어금니를 발치했기 때문입니다. 참고, 참고 참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서 결단하고 발치를 했습니다. 치과에 들려 그 동안 집요하게 괴롭혀 왔던 어금니 상태를 엑스레이 사진으로 찍어 보니 어금니의 근간인 뿌리가 다 녹아내려 위쪽의 치아만 달려 있는 상태였기에 그 동안 참아온 게 용할 정도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대단히 유감스러웠지만 뽑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계속 갖고 있으면 통증은 통증대로 심할 것이고, 잘못하면 옆에 있는 치아까지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6개월 정도는 되어야 치근(齒根)에 뿌리가 납니다. 그때까지는 불편하시더라도 어금니가 없는 상태로 지내시다가 뿌리가 자라면 그때 가서 임플란트 시술을 하시면 됩니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 날이면 으레 동네 친구들하고 골목에서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놀이문화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눈사람 만들기는 참 재미있는 놀이였습니다. 동네 악동들과 누가 더 큰 눈사람을 만들었나를 내기하듯 열심히 눈사람 만들기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친구들과 열심히 만들었던 눈사람을 집 대문 앞에 보란 듯이 세웠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친구들이 만든 눈사람은 아주 추운 겨울 날씨가 아니면 오후까지 버티는 눈사람은 없었습니다. 왜? 녹아내려 흔적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눈사람은 왜 녹아내리면 흔적이 사라집니까? 뼈가 없기 때문입니다. 2020년 2월부터 코로나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WHO는 펜데믹을 선언했고 그렇게 1년 8개월이 지났습니다. 펜데믹은 참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지금도 현재진행 중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펜데믹이 언제 끝날지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코로나가 엄습하고 난 이후, 그 동안 깜깜이로 지나칠 수 있었던 교회의 뼈대 혹은 성도의 뼈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은 그나마 코로나가 준 선물입니다. 아마도 펜데믹 이후에 교회의 뼈대, 성도의 뼈대가 든든한 교회는 살아남겠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는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위드 코로나 혹은 포스트 코로나를 전제하면서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 우리 교회와 지체들이 견고하게 해야 할 영적 뼈대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며 상고하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본문 텍스트로 삼은 호세아 예언서의 주인공 호세아는 주전 750-725년 사이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던 예언자입니다. 호세아의 활동 시기를 밝힌 이유는 그가 활동하던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한 시기가 주전 722년임을 적용할 때, 그의 사역 시기가 얼마나 북쪽 왕국의 입장에서 볼 때 격동의 시간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북쪽 왕국의 멸망은 북 왕국을 통치하던 왕들(베가와 호세아를 비롯한 4명의 왕들)의 무능력이 가져온 비극이라고 진단할 수 있겠지만, 영적인 차원으로 접근한다면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진 북 왕국을 향한 하나님 심판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원대학교 구약학 교수인 이희학 교수는 본인의 책에서 이런 진단을 내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야웨 종교가 가나안 바알 종교의 영향을 받아 심하게 변질된 것이 북 왕국의 멸망의 원인이었다.” (이희학, “북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 프리칭 아카데미, p,238.) 이런 변질은 본문의 고발에 의하면 심각한 영적인 본질을 상실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호세아 예언자는 본문에서 세 가지를 들춰냅니다. 본문 1절이 이를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1) 에메트(진실)의 상실입니다. ‘에메트’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유명한 어구 ‘진실로진실로’의 번역인 ‘아멘아멘’이 히브리어 ‘에메트’에서 나온 파생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 개정판에는 ‘아인 에메트’를 ‘진실도 없고’로 번역했지만 유진 피터슨은 ‘아멘’의 의미를 살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신실한 자가 아무도 없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예언서 호세아 4:1) 사실 이 에메트는 법정 용어였습니다. 법정에서 증인이 증인 선서를 합니다. 그럴 때 증언은 위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위증이 있으면 처벌을 받기에 증인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바로 이렇게 진실만 말하겠다고 선언하는 단어가 에메트입니다. 전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상태가 에메트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진실하셨습니다. 호세아 2:2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하셨습니다.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러나 북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호세아가 예언하던 주전 750-725년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여로보암 2세(주전 787-747)의 통치 초창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통치 하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와 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는 사마리아의 지배층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 극소수의 지배 계층은 향락과 사치를 즐겼고 가난한 이웃들을 착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사회는 극심한 양극화에 빠졌고, 부익부 빈익빈의 골을 깊어갔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결국 여로보암 2세가 사망하게 되자 북 왕국은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주전 747년에 사망하는데 이후 왕국의 패망이 있었던 주전 722년까지 약 2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무려 6명의 왕들(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그리고 마지막 왕이었던 호세아)이 우후죽순으로 쿠데타, 반정 등으로 정권을 잡고 실각하고 하는 악순환 끝에 주전 722년에 이방 민족인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대목입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의 사마리아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세속적 가치를 통한 만족이 절정에 이를 때였습니다.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부유층들은 이대로 본인들의 나라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에게 풍요와 만족을 주는 바알 신에 대한 만족도는 100% 이상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세속적 가치의 충만함이 그들의 조상들이 섬겼고 지켜왔던 야웨 신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찝찝함이었습니다. 북 왕국의 사마리아인들은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해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종교적 혼합주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공동체의 야웨 신앙은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사악했던 북 왕국은 이것을 교묘하게 역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바알리즘(바알숭배사상)은 철저하게 제의 중심적 종교였습니다. 비를 내려 풍요롭게 농사를 짓게 해주는 역동을 바알 신에게 올리는 제의를 통해 행함으로 농경적인 사회의 풍요로움이 온다고 믿었던 바알 숭배자들은 바알리즘과 야웨 신앙을 섞기에 이릅니다. 이 제의 방법은 일거양득이었습니다. 그들이 거추장스럽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몹시 찝찝한 야웨가 기뻐하는 것이 제사라는 것을 감안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형식을 취하되(번제와 같은) 그 제사의 대상은 야웨 하나님이 아닌 비를 주는 바알에게 드리는 혼합의 제의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북 왕국의 이런 작태를 하나님은 영적 매춘으로 여겼고 당신의 분노를 예언자 호세아에게 행동으로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음란했던 여인 고멜에게 장가를 들게 하셨고 자녀를 낳아 이름을 짓게 하셨는데 이스르엘(흩어버린다.), 로루하마(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로 짓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분노하신 이유는 북 왕국이 가증하게 드리던 제사에 진실함이 담겨 있지 않은 배은망덕에 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2) 헤세드(인애)의 상실입니다. 1절을 다시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북 왕국에 없었던 두 번째의 요소를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애’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인애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 의 번역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너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에 딱히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세드를 신약성경의 단어로 바꾸면 조금은 단어의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신약성경에서 ‘헤세드’ 의 번역으로 가장 많이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아가페’입니다.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의 김필회 교수가 헤세드 즉 인애를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헤세드는 의무에 속하지 않으며 또 단순한 경향성도 아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행위로서, 사회적 틀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면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김필회, “호세아 주석서” 프리칭 아카데미, p,138.)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이 북 왕국 백성들이 상실한 두 번째의 지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셨던 조건 없는 사랑을 상실했다는 지적일 것입니다. 애굽에서 받았던 사랑, 광야에서 베푸셨던 사랑, 그리고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에서 받게 되는 사랑까지 하나님은 그렇게 에메트를 갖고 헤세드 사랑을 하셨건만 북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호세아를 통해 경고하시며 고발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관용구 하나를 소개합니다. 신명기 5:15절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 구절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광야로 함께 나온 지체들 모두가 안식일을 지키도록 상생하라” 광야로 함께 나온 지체 중에는 ‘에레브’ 잡족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2:38절을 봅니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민수기 11:4절을 읽어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그렇습니다. 섞여 사는 다른 인종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고아도 과부도 객도 모두가 안식일을 공평하게 쉬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너희도 애굽에서 종이었고, 노예였는데 내가 너희를 해방시킨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명하신 주님의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애굽에서 내가 너희들을 위해 베푼 그 헤세드를 너희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우연히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에서 임명한 난민 홍보대사 정우성 씨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난민 홍보대사로 활동을 하고 발언을 하자 도무지 인간이라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인신공격적인 언어폭력으로 그를 난도질하는 기사를 보면서 참 마음 아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난민의 지위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도 방자한가? 대한민국의 정신이 이 정도로 금치산자인가를 생각하면서 치를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아프칸 공로자들을 또 얼마나 매도할까를 생각하면 맥박이 빨라집니다. 교회가 만일 인애를 상실하면 그것은 정말로 절망입니다. 주께서 하늘보좌를 버리신 사건이 인애의 극치인데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인애를 상실한다면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강남순 교수가 쓴 글이 인애 즉 헤세드 상실을 보이고 있는 교회와 성도에게 조종을 울리는 것 같아 소개합니다. “한 종교가 그 종교에 헌신하는 이들을 지극히 개인적인 안녕과 성공에만 집착하는 ‘이기적인 종교인’들로 만들어갈 때, 이미 그 종교는 이기적 개별자들을 위한 사유화된 기제로서 역할만을 수행할 뿐 공적 세계에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강남순,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새물결플러스, p,258.) 3) 다아트(지식)의 상실입니다. 1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여기에 기록된 ‘지식’은 히브리어 ‘다아트’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잠언 기자는 1:7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지식’이 ‘다아트’입니다. 지혜자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미분, 적분, 3,4차 방정식을 아는 것이 지식이라고 했습니까? 3,4개 국어에 능통하면 지식이 충만한 것입니까? 지혜자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아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김필회 교수가 그래서 이렇게 주석한 것은 적절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단절을,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상실을, 공동체 관계의 파괴를 의미한다.” (위의 책, p,139.) 역으로 해석해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헤세드의 마음으로 경외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정립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에메트의 마음으로 경외할 때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다아트’ 할 때 공동체를 건강하게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저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갖고 아는 것입니다. 에메트, 헤세드의 마음을 갖고 아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 큐티에서 본 구절이 사사기 10:10-16절이었습니다. 이 구절 중에 주제절로 보았던 16절을 다시 복기해 보십시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근심하셨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카짜르’는 어원적인 의미가 ‘곡식을 짧게 자르다.’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곡식을 짧게 자른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낫 알들이 무르익어 이제는 더 이상 추수를 기다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긴박하신 상태를 에두르고 있는 단어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진심어린 돌이킴 때문에 더 이상은 버티기기 힘들다는 표현이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 영어성경의 표현은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지실 것 같지 않게 호언장담하셨지만 이스라엘이 우상을 제거하고 회개하자 다시 흔들리셨습니다. 어느 정도였다고 표현합니까? KJV: His soul was grieved for the misery of Israel. 슬퍼하셨다고 말합니다. RSV: He could bear Israel's misery no longer.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겠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와 당신이 당하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시는 사랑, 슬퍼하시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야 말로 에메트와 헤세드의 마음으로 우리들에게 장가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히 극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실함이 없는 나의 영적 상태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함이 없는 나의 영적 상태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소홀히 하려 했던 다아트의 상실을 극복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 번역으로 읽다가 오금이 저렸습니다. 제게 폭격하는 하나님의 레마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난할 대상을 찾지 마라. 손가락질 할 생각 마라. 너 제사장인 네가 피고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예언서 호세아 4:4) 물론 저는 구약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세아의 예언에서 빗겨간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상당수 제사장들이 해야 하는 역할의 일부분을 교회 공동체에서 감당하고 있는 자이기에 말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레마를 이렇게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이강덕 목사야, 에메트, 헤세드. 다아트를 시급하게 회복하라. 내가 네게 기대를 건다. 나를 실망시키지 말라” 더불어 세인 공동체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세인의 자녀들아, 에메트, 헤세드. 다아트를 시급하게 회복하라. 내가 네게 기대를 건다. 나를 실망시키지 말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CCC 초대 총재였던 김준곤 목사님의 걸작인 예수 칼럼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노바디니스(nobodiness), 낫씽니스(nothingness), 노훼어니스(nowhereness), 노이즘(noism) 이후에 올 것은 무엇인가? 예수는 나를 따르라, 내게로 오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다.” (김준곤, 예수칼럼, 규장문화사, 1981, p,268.)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앙의 뼈대임을 고집스럽게 주장한 어른의 결기가 보이는 문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無主義시대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 사조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뼈대를 잘 형성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3무는 앞에서 언급한 진실함,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진실함,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 뼈대가 견고한 교회와 성도는 펜데믹 이후도 무너져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를 위해 튼튼히 서 갈 것입니다. 지금 교회와 성도는 호세아를 통해 경고하신 3무를 극복해야 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3무 시대의 3무를 잘 극복하는 하나님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항해자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 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항해의 끝이 되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에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이 깊은 바다에 날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