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4일 화요일 성서 일과 묵상 느헤미야가 왜 거기서 나와!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63편, 요엘 1:1-14, 데살로니가전서 3:6-13, 시편 78편, 느헤미야 8:1-12 꽃물 (말씀 새기기) 느헤미야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마중물 (말씀 묵상) 지난 주일에 느헤미야 10장 강해를 마쳤다. 교우들에게 최대한 쉽게 전하려고 몸부림치며 10장 사역을 마쳤다. 운명적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목사의 고통을 교우들이 그리 크게 알 리 없다. 뭐,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목사는 회중들이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주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정말 身魂心을 다 쏟는다. 내게는 적어도 느헤미야 8-10장이 그랬다. 오늘 성서 일과인 느헤미야 8장을 만나고 설교를 준비하며 고민했던 기억이 떠올라 복기해 본다. 느헤미야 8장은 고통스러운 텍스트다. 에스라가 약 5,000여명 정도의 제 2차 포로 귀환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연대를 학자들은 주전 458년 즉 아닥사스다 재위 7년으로 보는 것에 동의한다. 이때는 우여곡절 끝에 주전 515년에 완공한 제 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지어진 지 57년이 지난 시기였다. 상황에 의해 에스라는 수문 앞 광장에서 귀환 공동체의 강력한 요청으로 부흥회를 인도한다. 엄청난 은혜가 임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불쑥 나타난 이를 오늘 성서 일과인 느헤미야 8:9절이 소개한다. 느헤미야다. 학자들이 역시 동의하는 것이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귀환 시기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재위 20년인 주전 445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다시 말하면 에스라보다 13년 뒤에 예루살렘 땅을 밟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성서일과인 느헤미야 8:9절에 느헤미야 등장한다. 교우들에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 텍스트를 해석하여 설교할 때, 이렇게 전했다. “느헤미야 8장은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안 되는 텍스트다. 수문 앞 광장의 부흥회를 묘사한 느헤미야 8장은 원래의 위치는 에스라 8장과 9장 직전에 놓여야 하는 텍스트인데 에스라, 느헤미야라는 역대기역사를 편집한 최종 편집자들이 의도적으로 이렇게 배열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느헤미야 8장에서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의 선조들이 잃어버렸던 율법 복기를 확인했고, 9장에서는 복기한 율법에 대하여 후손들이 다시는 이 율법을 버리지 않고 사수하겠다는 신앙고백을 천명했고, 10장에서는 이렇게 고백한 신앙고백을 말로만 행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 약속 서명으로 나열함으로서 성전과 성벽 재건과 봉헌이라는 화두는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가 함께 실천해야 하는 쌍두마차이지 선민 공동체의 의무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설교자의 고집이지만 해서 나는 오늘 성서일과인 느헤미야 8장의 연대기를 에스라 8장과 9장의 연대기로 고정해서 강해했다. 많이 고민하고 공부한 뒤에 전했던 느헤미야 8장에 관련된 오늘 성서일과를 만나자 다시 그때의 주일 설교가 떠올랐다. 평신도들에게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텍스트일지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교자는 본문 해제에 대해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것이 예의이기에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뜨끔한 것은 섬기는 교회 지체 한 명이 8장 강해를 마치고 9장을 진행할 때 이렇게 질문했다. “목사님, 그렇다면 느헤미야 9장에서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인봉한 내용들을 서약하고 결단한 시기도 느헤미야 시대가 아니라 에스라의 시대인 성전 재건 이후로 보는 게 맞죠?” 담임목사가 나름, 고민하고 공부한 뒤에 전한 설교를 듣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그 지체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목사를 계속 공부하도록 채찍질하는 교우와 함께 달려가는 것이 목회의 기쁨이자 행복이다. 금년에 강해를 마치려고 했던 느헤미야는 내년 초는 되어야 마칠 것 같다. 버겁기는 하지만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 공부할 수 있어 행복하다. 두레박 (질문) 나는 교우들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는 목회를 하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세인교회가 질문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질문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이 말씀을 사유하고 그 말씀을 곱씹고, 되새기는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오늘부터 항암 치료에 들어간 지체가 있습니다. 이번 치료를 마지막으로 휴지기와 완치로 진입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