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4.02 지역 셀 사역2024-04-23 16:1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4월에 하고 싶은 일들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날 대속하신 예수께 (찬송가 321장)
● 문들아 머리 들어라 (ccm)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나부터
● 본문: 고린도전서 5:9-13
1) 바울이 본문에서 교통정리 한 음행에 대한 행위자들의 두 가지 부류들을 설명해 보자.
①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음행 (본문 10절)   

②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음행 (본문 11절)                   

2) 11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형제’라는 단어를 오늘 설교 주제와 관련하여 해석해 보자.
① 헬라어 ‘아델포스’의 의미 분석

② 설교 주제와 관련하여 접목해 보자.   

3) 적용하기
① 나는 선포된 설교의 객관화 선수인가? 아니면 주관화 선수인가?

② 내가 받은 설교 중에 1인칭화에 성공한 사례를 나누고 간증해 보자.  

 
사역하기 (WORK)
1) 다음 주간에 있을 지역 셀 열린 모임 점검하기
● 열린 모임에 사용할 악보 준비에 인턴들은 최선을 다할 것. (다음 주일에 안내석에 비치)
● 열린 모임 시에 간증자 한 명 선정하기
● 열린 모임 시에 드릴 헌금 먼저 드리기 (열린 모임 시에는 헌금을 하지 않음)
● 초청 신자에게 주는 편지 낭독자 선정
● 전도 대상자들의 기도 제목 미리 파악하기
● 담임목사 집필 서적 선물 준비하기
● 파스타 준비

2) 기도하기
● 전도 대상자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환경의 어려움이 없도록
● 지역 셀에서 최선을 다해 섬겨 교회로 인도하는 길이 열려지도록
● 전도 대상자들의 기도 제목 중보하기
● 지역 셀 열린 모임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충만하도록,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는 사역이 되도록
● 나약한 환우들을 위하여

3) 헌금
4) 광고
5)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7년 4월 2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7번째 강해)
제목: 나부터
본문: 고린도전서 5:9-13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자행된 음행의 죄(한 사람이 자행한 계모와의 공개적인 간음과 그 행위를 박수쳐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남성들)에 대하여 날 선 비판을 행한 것을 두고 적지 않은 부정적 반응들을 엿보게 해주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9절은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너희에게 쓴 편지’(주석학자들에 의하면 고린도에 보낸 편지는 전후서 외에 두 개의 서신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로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보냈던 A라는 편지에 앞서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편지가 오늘날에는 분실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A 편지 이전에 보냈던 분실된 그 편지 안에는 간음에 대한 바울의 혹독한 비판의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아마도 그 편지 안에는 음행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담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기에 그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지체들 중에 음행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그리고 별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던 상당수의 남성 신자들이 바울의 편지에 불만을 품었을 것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남성들은 계모와의 결혼을 과부를 돌보는 차원으로 해석하고 용인하려 했는데, 바울은 분실된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용인해 준 모든 사람들을 간부(姦夫)는 물론 용인한 자들까지 포함하여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서 바울이 보낸 첫 번째 편지(분실된 편지)에 대한 부정적인 반론들이 제기되는 반응을 보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음행에 따른 심판과 정죄에 대한 나름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교회의 치리에 대해서 선을 긋고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 9절에서 언급한 음행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제한폭의 부연 설명이 본문 10-11절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믿는다고 하면서도’-현대인의 성경 역)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바울이 정리한 내용은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할 분명한 대상의 설정입니다. 믿지 않는 저들이 아니라 나와 같이 믿는 자들입니다. 믿지 않는 저들을 12-13절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고, 나와 같이 믿는 자들을 ‘교회 안에 있는 자들, 그리고 이 악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본문 해석을 통해서 선명하게 보이는 바울의 갈파를 정리하면, 고린도교회의 지극히 평범하고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전언한 것은 세상의 음란한 사람들, 탐욕이 많은 사람들, 사기꾼들, 우상 숭배자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소개하고 저들의 죄를 회개시켜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할 전도 대상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거부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세상에 있는 즉 밖에 있는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말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관계를 끊고 공동체의 회중에서 출교를 시키고 단절시켜야 할 대상자는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이미 믿는 자들 중에 음행한 자들입니다. 또한 그것을 덮어 준 자들입니다. 출교 대상자, 교제 금지 대상자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음행자와 그 음행을 묵인해 준 공범자들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우리가 새길 하나님 말씀의 진중한 교훈은 ※ 말씀의 적용은 언제나 나부터라는 교훈입니다.
  
  본문 11절에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기록된 ‘형제’라는 헬라어 ‘아델포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공동체 안에서 묶어진 형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은 ‘믿는다고 하면서도’라고 번역하였고,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형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친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에서 ‘형제’라는 단어를 도입한 것은 그 형제에는 나도 포함된다는 전제입니다. 바울은 음행, 탐욕, 우상 숭배, 모욕, 술 취함, 탈취함이라는 죄악에서 나는 예외라고 선언하지 않고 나도 그 안에 언제든지 포함될 수 있음을 전제하고 단호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만일 이런 악을 행한다면 나를 비롯한 일체의 무리들은 공동체에서 축출시켜야 함을 전제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나에게 철저하게 냉정해야 합니다. 불편한 말씀은 나에게 더 철저하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전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하교(下敎)에 복종하기 싫었던 요나는 여호와 얼굴을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의 그 뜻을 꺾기 위하여 풍랑을 내셨고 배는 파선 직전에 이르게 됩니다. 배에 타고 있었던 사공들은 두려워하며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짐들을 배 밖으로 던지며 그들이 섬기는 신을 부르며 기도하는데 배 밑층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요나를 발견한 선장이 그를 깨우면서 네가 믿는 하나님께 간구해 보라고 다그칩니다. 이윽고 이 풍랑이 누구로 인함인가를 뽑는 제비뽑기에 요나가 당첨이 되자 배 안에 있던 선원은 물론 승객들이 요나를 압박하며 왜 이 배를 탔느냐고 공격합니다. 그러자 요나가 그들의 공격에 반응한 내용이 요나 1:8-12절입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는 선원들에게 ‘나 때문이다.’라고 시인합니다. 원인의 제공자는 1인칭 단수인 ‘나’였습니다. 요나는 지금 배가 이 지경이 된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음이라고 1인칭 화 시키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와 반대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남 왕국 유다에 살고 있었던 평범한 농부인 아모스를 급히 부르셔서 그에게 소명을 주시고, 북 왕국으로 이사하여 그들의 종교적인 중심지였던 벧엘에 가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이때는 북 왕국 여로보암 2세의 치하로 북쪽이 가장 잘 나아가던 때였기 때문에 쉽지 않은 부름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북쪽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궁정 예언자들로 정치권력과 타협하여 무소불휘의 종교적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그들과 맞설 것을 종용하셨기에 아모스는 적지 않은 부담감과 압박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모스서의 클라이맥스는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벧엘에서 자행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영적인 타락과 범죄에 대한 맹공을 퍼붓는 아모스가 달갑지 않은 것을 인지한 북쪽 궁정 예언자의 대부인 아마샤가 아모스와 한 판 대결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아모스 7:11) 아마샤 쪽에서 보면 아주 기분 나쁜 메시지입니다. 지금 북 왕국은 너무 잘 나가고 있는데 왕은 칼에 죽을 것이고, 북은 사로잡혀 이 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만 머문 것이 아니라 아마샤 개인의 가문에 저주를 내립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아모스 7:17).
  아모스의 예언은 주전 722-723년에 완전히 멸망하여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비극의 땅이 되었지만 아모스의 예언을 아마샤가 자신의 기득권적인 물리력으로 깔아뭉갭니다. 도리어 힘을 가지고 있었던 아마샤는 두 가지를 아모스에게 경고합니다. ① 북 왕국 이스라엘은 건재한데 자꾸만 멸망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왕을 모반하여 반역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② 아모스 너는 유다 사람이니까 이 곳 벧엘의 내 영역에서 떠나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언을 하면서 먹고 살라고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참 예언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 예언을 본인에게 적용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말씀의 적용을 나부터 시작하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나’라는 개인의 스펙트럼 안에서 나에게 적용되기를 기대하는 것임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은 자신의 걸작인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그 답을 아주 간단하지만 그러나 아주 선명하게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p,13) 세상 속에 살아야 하지만 그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되는 존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 정체성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렇게 쉽지 않은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이기에 이 길을 가는 구도자로서 그리 큰 실수를 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한 가지 길일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철저하게 적용시켜 사는 삶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