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가 268장) ●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정말로 피해야 할 것 ● 본문: 고린도전서 5:1-5 1)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의 일탈(음행)에 대하여 진짜로 분노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적시했는가? 2) 항목 1)에 따른 두 가지의 내용이 주는 신학적 교훈을 담임목사는 무엇이라고 설교했나? ① 에스라의 이야기를 접목시켜 보자.
② 에스겔의 이야기를 접목시켜 보자. |
3) 적용하기 ① 죄에 대한 둔감함과 민감함을 나에게 적용해 보기.
② 주님이 계속하여 나에게 ‘나함’하시는 것을 적용해 보기.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 지역 셀이 섬기는 전도 대상자들을 위하여 ● 교회 소그룹 성경 공부반들을 위하여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 피선교지를 위하여 (특히 루존교회를 위하여) ● 춘계 셀 대 심방 사역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 부활주일 셀에서 섬기는 전도프로젝트 상의하기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3월 12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4번째 강해) 제목: 정말로 피해야 할 것, 본문: 고린도전서 5:1-5
오늘 본문 1절은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린도교회의 성도 중에 한 명이 계모와 동거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계모가 아버지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정황으로 볼 때 아버지가 사망한 것으로 가늠되기는 하지만 이 일은 소위가 악한 일이었습니다. 레위기 율법은 분명히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레 18:8),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1)고 했습니다. 신명기 율법에서는 레위기 율법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0).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서는 근친상간을 범한 남자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규범을 직접적으로 위반한 사례이기에 단호한 징계를 내릴 것을 천명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본문 1절에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를 다니는 남자는 이 율법을 버젓이 위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당당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단어가 “에쓰네신” 즉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는 이방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에쓰네신’이 아니라고 선언을 한 것은 이방의 회심자인 고린도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상 이방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바울의 독특한 신학이 담겨 있는 발언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마땅히 율법에 즈음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울의 이 사상을 전제할 때 근친상간을 죄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다는 핑계로 전혀 죄책을 느끼지 않은 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남성의 죄질은 아주 소위가 악한 것으로 바울은 평가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과부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한 불쌍한 여인을 구제하는 선을 행한 것으로 치부하는 어처구니없는 정당성을 바울은 비난한 것입니다. 이 뻔뻔한 처사에 대하여 바울이 보인 반응이 본문 2절입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이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바울은 본문 2절에서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음행의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음행 자체에 대한 분노보다 또 다른 측면에 대하여 분노했습니다. 1) 그 죄(음행)에 대하여 통한이 여기지 않는 무감각에 대하여 분노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의 음행에 대하여 분노한 것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 무감각 때문이었습니다. 죄에 대해 울지 않는 세태에 대하여 분노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민감할 것을 지천에서 소개합니다. 율법 학사 에스라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바벨론 포로 이후 세 번에 걸친 예루살렘으로 귀환 시 많은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이끌고 두 번째 횟수에 들어온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무너진 성전 재건과 하나님 신앙 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부담감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오자마자 위기에 봉착합니다. 제 1차 포로귀환의 일등공신들이었던 예수아와 스룹바벨이 사망을 하고 곧이어 예루살렘에 도착해 있었던 제 1차 포로귀환자들 중에 지도자들이 버젓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따라 가증한 일을 행하며 이방여인들을 받아들이는 심각한 죄에 빠져 들었기 때문입니다(포로 이전과 같은 상황을 반복). 이 기막힌 일을 목도한 에스라가 낙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이 기막힌 위기의 순간에 희망의 빛을 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자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고 영적 순결을 지키던 자들이 에스라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스 9:2-4).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는 또 다른 기막힌 영적 황폐의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이 암울한 세태에 대하여 기막혀 하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하여 민감해 하던 자들이 에스라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영적 공황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그래도 존재했다는 것이 소망 그 자체였습니다. 무감각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벌벌 떠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벌벌 떤다는 것은 말씀에 대하여 예민하다는 것이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에 벌벌 떠는 자들이 존재하는 우리들의 세상이 될 때 결코 우리들은 무감각의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한 이후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의 감정을 노래한 시편 51:8-10절을 보면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윗의 회개의 압권이 ‘주께서 꺾으신 뼈들’이라는 문구입니다. 죄에 대한 아파함은 이 아픔입니다. 에스라는 포로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저지른 비참한 죄에 대하여 대신 이렇게 토하여 냅니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절대로 피해야 할 것은 죄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2) 그 죄와 동거하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본문 2절 후반절). 이것은 바울의 고린도공동체 안에 음행한 자를 머물게 한 것에 대한 단호한 징계 선포입니다. 죄는 동거의 대상이거나 긍휼히 여길 대상이 아니라 결별의 대상이며 척결의 대상입니다. 더불어 지혜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죄에서 떠나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그 죄가 나와 함께 머물기를 유혹할 때 단호하게 그 죄를 쫒아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백성들입니다. 에스겔 예언서를 보면 주님의 확고부동한 의지가 보입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겔 36:24-25).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여러 나라 가운데 있게 하시지 않고 반드시 내 백성들을 모아서 고국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곳에서 맑은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시겠다고 천명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이방의 거처에서 동거하지 않도록 장소 이동, 공간 이동을 통해 이방의 족속과 함께 머물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에스겔 10:18-19절을 보면 또 다른 측면에서 먼저 전개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너무나 타락하여 하나님이 거주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역겨워 그 성전에 들어와 가증한 제사를 드리는 자들과 동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직접 그 성전을 떠나시기로 결단하십니다. 그리고 행동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에스겔 10:18-19). 죄와는 함께 거하시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면서 역발상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죄와 함께 머무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죄와의 동거를 피해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적용하면 음행이라는 죄를 범한 자를 고린도교회 공동체에서 출교시키지 않은 것을 보고 바울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그들을 내쫒을 것을 종용합니다. 바울은 비록 지금 자기가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어 음행의 죄를 범한 자로 인한 고린도교회의 영적 상태를 육적인 측면에서 볼 수는 없지만 영으로는 지금 고린도 공동체의 상태를 충분히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3절에서 피력한 뒤에 음행한 자를 용납해주고 받아주고 있는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선언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본문 4-5절). 바울의 역설은 음행한 자들의 치리는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통제가 아니라 사탄의 통제를 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심판이자 치리이며 징계임을 고지한 것입니다. 성도가 받는 심판 중에 가장 혹독한 심판은 아무리 해도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내어준 자는 감동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탄의 전적인 통제를 받기 때문입니다. 죄와 동거하면 감동은 사라집니다. 정말로 피해야 하는 것은 죄와의 동거이며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죄와의 결별입니다. 신앙의 변질은 항상 유한 그 자체인 자아에게 쏠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 자아가 결국은 하나님으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음행을 자아의 실존이라는 차원으로 해석한 고린도교회 남성과 그것을 그대로 승인해 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무감각은 그래서 비난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자아의 만족 그 이상의 것이 아닌 음행을 피하십시오. 그러나 정말로 더 피할 것은 그 음행을 음행으로 인정하지 않는 무감각을 더 피하십시오. 더불어 음행의 자리에 함께 앉아 있지 마십시오. 그 자리를 떠나십시오. 아니면 그 음행을 쫒아내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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