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적어도 이 점만큼은 내가 타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되는 것이 있으면 자랑해 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찬송가 461장) ● 여호와의 유월절 (ccm)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어떤 자신감이 있었기에 ● 본문: 고린도전서 4:14-17 1) 바울 사도가 ‘미메타이’(본받으라)고 말한 것은 본문 17절을 참고할 때 무엇이었는가? ① 본문 17절 참고: 1) 2)
② 1번 항목을 전제로 결국 종합하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 2) |
2) 바울이 당당하게 자신하며 자랑했던 것은? ① 고린도전서 1:18 ② 갈라디아서 6:14 ③ 고린도전서 2:2 |
3) 적용하기 ① 바울이 자랑하라고 권면한 것 외에 내가 정말로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풀어 헤쳐보자.
② 설교에서 언급한 챨스 프라이어의 촌철살인을 나에게 적용해 보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 지역 셀이 섬기는 전도 대상자들을 위하여 ● 교회 소그룹 성경 공부반들을 위하여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 피선교지를 위하여 (특히 루존교회를 위하여) ● 춘계 셀 대심방 사역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 부활주일 셀에서 섬기는 전도프로젝트 상의하기 ● 피선교지 담임목사와 전화하여 교제하고 섬기기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월 26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2번째 강해) 제목: 어떤 자신감이 있었기에 / 본문: 고린도전서 4:14-17 본문 16절에서 바울은 자신 있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로 자신을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본받으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미메타이’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의 문자적 의미는 ‘이미테이션’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강하게 역설한 ‘본받으라’고 말한 단어의 의미가 바로 이 이미테이션의 의미입니다. 주목할 것은 바울이 본받으라고 한 것은 짝퉁 가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몹시 교만하여 자신이 있었기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유진 피터슨의 번역으로 고린도전서 4:16절을 읽어보면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는 내가 직접 행하지 않은 것을 여러분에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의 증거들은 신약성경의 1/2에 해당하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수없이 보고되고 있기 때문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메섹에서의 회심을 경험한 바울의 삶과 생애는 단 한 문장으로 표현됩니다. 예수의 삶 따르기와 살아내기였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바울의 의도는 결국 예수를 본받으라는 역설과 일치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17절을 보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에베소에 거주하면서 그가 사역했던 고린도에서 일어난 기막히고도 참담한 교회 무질서의 상태를 보고 받고는 곧바로 다시 고린도에 방문해서 무너진 영적 질서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영적 상태를 염려한 바울은 자기가 다시 고린도로 가는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항에서 디모데를 고린도로 급파하는 차선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를 대신 파송한 목적은 ①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행사와 ② 고린도의 각 처에서 가르쳤던 것들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위임한 두 가지의 사항들은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역설한 내용에 대하여 왜 이렇게 자신만만해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역했던 행사와 그가 고린도에서 18개월을 머물며 가르쳤던 것들을 사도행전 18:5절에서 고린도 사역을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선포였고, 두 번째의 보고는 고린도전서의 내증인 1:18절의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종합해 보면 영적인 시각으로 볼 때 파당 싸움으로 난장판이 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디모데를 보내면서 위임한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렇게도 자신만만해했던 신앙의 요체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이 절대로 교만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나를 본받으라고까지 역설하며 당당하게 밝힐 수 있었던 그 자신감의 실체는
* 예수께서 나의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이 자신감의 근원이었다는 교훈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은 바울이 쓴 서신 중 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마케도니아 지방은 주후 1세기 로마의 속국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도 예외는 아니었고 고린도도 매일반이었습니다. 로마의 속국에 들어가 있는 나라의 그리스도는 유일한 한 사람, 로마의 황제 시저였습니다. 만에 하나 이 분명하고도 명확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바울은 육체의 죽음에 대하여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선포한 것이 있습니다. ‘나의 그리스도는 시저가 아니라 예수시다.’ 예수만이 나의 그리스도이며 나의 주군이라고 그는 천명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자신감의 근원이었고 기초였습니다. 케직 사경회의 주창자인 찰스 프라이어 목사가 쓴 ‘예수님을 위해 살려고 하지 말라’ (부제: 예수님이 내 안에 살게 하라)에 보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그의 촌철살인 문장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리는 내가 그 분을 믿고 복종할 때만 진리인 것이 아니라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진리이다. 내가 믿든 믿지 않든지, 내가 복종하든 복종하지 않든지 확고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항복함으로서 시작된다. 그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의 부활은 인간들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관계의 기초는 인간의 항복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다.”(pp, 65-67에서)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에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바울의 당당한 자신감은 본문에서 이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나의 주이시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다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디모데를 파송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전부는 십자가의 도라는 결론입니다. 신앙의 변질은 십자가에 나를 위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나의 주군이 예수라는 사실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유일한 그리스도 되심 가지고는 2%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하여 복음을 변질시키고 이상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그것을 듣고 혹했던 자들에게 경고했던 것과 같은 맥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1:6-7절). 조엘 오스틴은 일체의 성공의 비결은 긍정하는 힘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주권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에게 주는 조건부적인 것처럼 말하며 긍정의 힘을 가진 자가 받는 메리트를 맘몬으로 둔갑시켰습니다. 그가 말한 관점으로 말한다면 가장 부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삶을 철저하게 실패한 자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큼 삶의 굴곡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의 나약함을 갖고 오셨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질시와 시기를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새도 거처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었지만 정작 당신이 거할 처소는 마땅하지 않은 거리의 노숙자였습니다. 그는 결국 시기하는 무리들에게 누명 씌움을 당하고 십자가라는 최고의 극형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엘 오스틴은 예수님이 그토록 공생애 기간 외치셨던 회개의 복음이라고는 320페이지 전체에 단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기독교 최고의 메시지는 그의 책에서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두란노서원은 너무도 자랑스럽게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이 책을 소개합니다. “그는 죄인더러 회개하라고 닦달하거나 소리치지 않는다. 정치와 주요 정책 이슈보다 철저히 성경 중심으로 돌아가 희망과 자기계발에 관한 참신하고도 설득력이 있는 복음만을 전하고 있다.” 신앙의 변질이란 긍정의 힘과 같은 유사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또 그것에 현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신감은 유사 복음을 가질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복음을 사수할 때 나에게서 자랑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나를 본받으라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의 삶을 따르기와 살아내기에 천착하고 있는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이지 바울의 연약한 인성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음을 재강조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조한 이 간절함을 본문에서 이렇게 에둘러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본문 14-15절).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란 다름 아닌 복음으로 임신하고 복음으로 해산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전달자인 선생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매개체로 씨를 뿌리고 또 그 복음이라는 것으로 해산까지 했다는 바울의 선언은 그가 얼마나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품고 사랑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 하반절) 바울은 고린도교회라는 밭에 복음이라는 ‘sperm’(씨)을 뿌렸습니다. 그래서 얻은 열매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수고와 사랑을 담보로 얻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분파논쟁으로, 음란함과 우상에게 드린 음식 논쟁과 각종 은사주의에 열광한 탓에 기형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을 그냥 묵과할 수 없어 바울은 다시금 자신이 당당하게 자랑하고 싶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능력을 디모데를 통해 재확인시켜주기 위해 그를 파송했고, 그가 말하는 복음의 씨앗을 다시 받아들여 예수의 삶 따르기와 살아내기에 승리할 것을 종용하고 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나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랑할 것이 없지만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라고 선포할 수 있다면 그는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