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2.19 지역 셀 사역2024-04-22 16:23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주변에 점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으면 나누어보고 신앙적으로 조명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십자가를 질 수 있나(찬송가 461장)
● 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정말입니까?
● 본문: 고린도전서 4:9-11
1) 고린도교회 지체들과 바울(아볼로)의 차이점을 도표를 통해 다시 한 번 재확인하고 그 차이점을 말해보자.
① 도표 확인

② 차이점 설명  

2) 바울이 신앙의 비주류를 선택하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고린도전서 1:26-29절 참고)


  

3) 적용하기
① 교회와 현대 교회 신자들의 주류되기 쟁탈전 소개하고 반성하기

② 나의 주류되기 고백하기와 회복하기 결단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서정수 집사, 최정희 집사, 강영자 권사, 문혜경 자매, 김제원 집사 등)
● 졸업예배를 위하여 (다음 세대를 위해 중보)
● 지역 셀이 섬기는 전도 대상자들을 위하여
● 교회 소그룹 성경 공부반들을 위하여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 피선교지를 위하여 (특히 루존교회를 위하여)
2) 헌금
3) 광고
● 부활주일 셀에서 섬기는 전도프로젝트 상의하기
● 피선교지 담임목사와 전화하여 교제하고 섬기기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 2017. 2. 12 주일 낮 예배 고린도전서 강해 (21번째)
● 제목: 정말입니까?
● 본문: 고린도전서 4:9-11

  고린도교회 지체들의 교만함은 특히 그리스도파로 여겨지는 바울이 언급한 네 번째 분파의 표어가 ‘우리는 성경 밖으로 넘어간다.’ 일 정도로 성경을 가볍게 여기며 교만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극도의 교만함으로 도배하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바울의 수사학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비판적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만한 자들과 사도의 권위를 갖고 사역하고 있는 바울과 아볼로의 겸손함을 극명하게 대비함으로 지금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 영적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도표를 참고해 봅시다.

  우리 (바울과 아볼로)                            너희(고린도교회 지체들)                        본문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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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련하다                                            지혜롭다                                                    10절
    약하다                                                강하다                                                        10절
    비천하다                                            존귀하다                                                      10절
    주리고 목마르다                                  이미 배부르다                                              11절
    헐 벗고 정처 없다                                이미 부요함                                                11절
    세상의 더러운 것, 만물의 찌꺼기            왕 노릇                                                  9, 13절
    매 맞고 핍박당하며 비방 당함                서로 대적하고 교만함                              11-13절
 
  본문에서 바울이 증언하는 것을 도표를 통해 비교해보면 바울과 아볼로가 선택하여 달려가고 있는 신앙의 길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선택하여 달려가고 있는 길이 대단히 상반된 입장임을 알게 됩니다. 이 상반 된 길에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를 선택하라면 바울이 선택한 전자의 경우와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선택한 후자의 경우 중 아마도 대부분의 지체들이 심정적으로는 후자를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것보다 미련하다고 평가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으며, 강하다고 인정받기보다 약하다고 평가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이자 찌꺼기 같은 것이라고 평가받는 것을 왕이 되는 것보다 더 좋아할 이 땅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상식의 차원으로 접근을 해도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선호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너무나 당연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이 기막힌 수사학적인 어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전하는 진의는 전자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미련해지라는 것입니다. 약해지라는 것입니다. 비천해라는 것입니다. 헐벗으라는 것입니다. 매 맞고 핍박당하라는 것입니다. 만물의 찌꺼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이것을 강조하는 바울에게서 조금의 양보와 타협점을 발견할 수 없는 이 단호함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6-29절에서 이미 밝힌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식이 세상의 식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식은 지혜의 추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은 미련한 것들을 통한 지혜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식은 강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식은 약한 것을 가지고 강한 것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식은 있는 것을 많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은 천한 것과 멸시 받는 것을 들어서 그 있는 것들을 항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당신은 ‘신앙의 여정에서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함에 있어서 전자와 후자 중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바울과 아볼로의 식인 전자입니까? 아니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식인 후자입니까?’
  당신이 만약 전자를 선택했다면 즉 하나님의 식을 택하겠다고 결정했다면, 이 결절에 반드시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이 땅에서의 주류됨을 포기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언제나 대문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대다수의 기득권자들은 대문자에게 물러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요구는 교회가 소문자가 되어 사회를 선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류가 되기 위해서 낮은 자를 외면하고 힘이 있는 자와 타협하는 죄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권력에서 항상 정권을 잡은 세력과 연대하여 유익만을 추구하려는 길 예언자의 사악함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류는 정치적인 함수관계에서 힘 있는 자의 편이 되어야 하는 공식에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비주류가 되어야지 주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주류의 길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비주류의 길은 언제나 흙 수저의 길입니다. 비주류의 길은 언제나 토사구팽당하는 것 같은 녹록하지 않은 길입니다. 비주류의 길은 언제나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비주류의 길은 언제나 높은 성 위에서 뛰어내리라는 세속의 소리를 거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비주류의 길은 언제나 세상의 유익이라는 거대한 유혹을 거절한 것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해서 비주류의 길을 가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에 들어서서 살아가는 삶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 힘들고 버거운 길을 누가 가려고 하겠습니까?
  반대로 주류의 길을 가는 것은 매력 만점입니다. 아주 근사합니다. 그것은 주류의 길을 가게 되면 떡으로 돌을 만듦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명예와 인기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는데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음으로 인해 세상들이 추앙하는 신적 권위를 얻게 되는 그럴듯한 명성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까짓 것 한 번 사탄에게 절하지 뭐, 그래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차지하지 뭐! 유익이 뒤따르는 매력덩어리입니다. 
  바울은 이미 주류와 비주류를 다 경험해 본 자입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주류의 매력을 넉넉히 경험한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경험하면서 비주류의 인생도 톡톡히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선택은 참으로 귀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주류와 비주류 중 그가 선택한 것을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하며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비주류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철저한 비주류였습니다. 이 바보 같은 선택을 한 바울에게서 왜 주체할 수 없는 은혜가 몰려오는지 선교신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른바 기독교 세계(CHRISTENDOM)에서 기독교와 정치권력과 손을 잡은 결과, 마침내 교회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군이 되기에 이르렀다.” (누가 진리를 죽였는가? P.85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번 그의 공생애 동안 주류로 사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삶의 주변은 언제나 갈릴리였습니다. 그의 삶의 주변에는 언제나 환자, 창녀, 세리, 왕따를 당하는 자들이 들끓었습니다. 바른 교회 아카데미 이사장으로 수고하고 있는 정주채 목사께서 이번 세미나에서 이런 발제를 남겼습니다.
“일반인들은 기독교 교리나 신학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이다.” (제 21회 바른 교회 아카데미 세미나 록 P.115 에서)
  교회가 지금처럼 정치기득권에 기생하고 아부할 때, 교회가 더 이상 주류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힘의 논리로 싸울 때, 세상은 완전히 우리 교회에게 등 돌리는 날이 더 빨리 올지 모릅니다. 세상은 교회가 비주류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대신 짊어져 주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교회가 중세의 십자군처럼 행세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데린 구유 지하 도시에서, 카타콤베 지하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사수를 위해 비주류로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성을 잃지 않고 이 기막힌 랜덤의 세상에서 빛이 되어주기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주기를 줄곧 원하고 있습니다. 주류로 살기를 포기하고 비주류로 사시기를 정말로 원하십니까? 정말로 원하십니까? 정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