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연주 (CCM) ●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찬송가 212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하나님도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일 ● 본문: 고린도전서 4:6-8 1) 고린도교회 분파 중에 그리스도파가 가지고 있었던 치명적 교만함을 본문과 더불어 설명해 보자. ①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와 관련한 그리스도 파의 표어 비교(본문 6절) ②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를 무시한 교만(본문 7절) ③ 이미 왕이 된 자세(본문 8절) |
2) 프랜시스 맥너트가 말한 일갈과 톰 라이트 교수의 일화를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말해보자. ① 프랜시스 맥너트의 촌철살인: ② 톰 라이트의 일화: ③ 본문과 연관하여 말해보기: |
3) 적용하기 ① 나는 말씀 밖에 있나? 안에 있나? ② 밖에 있으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③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겸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용하라.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강영자권사, 서정수집사, 최정희집사, 문혜경자매, 김제원 집사 등) ● 담임목사 세미나를 위하여 ● 지역 셀이 섬기는 전도 대상자들을 위하여 ● 교회 소그룹 성경 공부반들을 위하여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2월 12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0번째 강해) 제목: 하나님도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일 본문: 고린도전서 4:6-8 신정론과 같이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모순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건강한 신학과 신앙의 견지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보편적 본성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의 류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 는 격언의 뜻을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배워서, 어느 한 편을 편들어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 6절, 표준새번역 성경).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교회 공동체에서 백해무익한 계파적인 우월 논쟁의 빌미를 자의는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제공한 것에 대하여 자신과 아볼로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바울의 이 토로는 무척이나 억울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역했습니다. 그가 자랑한 것은 예수였지 결코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작금에 고린도에서 교회를 황폐하게 하는 분파 논쟁의 빌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의 터에서 발현된 그들 스스로가 제공한 것이지 바울 자기의 탓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 모든 일의 빌미는 나와 아볼로가 준 것이라는 결론으로 문제의 핵심을 객관화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은 아볼로의 이름이 여기에 첨가된 것을 보면 아볼로도 바울의 이 언급에 동의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바울 혼자만의 독자적인 진술이 아니라 아볼로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절 본문의 단락에서 또 하나의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입니다. 신약학의 대가인 더럼 대학의 C,K 바레트 교수는 ‘기록된 말씀’을 고린도전서에 인용된 구약성서의 인용문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1:19절 같은 경우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이사야 29:14절을 인용한 것인데 바로 이런 경우를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이해할 때 성경을 토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성경 안의 내증만으로 해석할 수 없을 때는 제 2차, 3차의 자료들을 통하여 치열한 투쟁과 기도를 동반한 확신이 있을 때에 선택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주관화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때부터는 내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4분파 중에 바울이 소개한 4번째 파는 ‘그리스도 파’였습니다. 4분파 중에 가장 골칫거리 분파가 바로 그리스도파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화가 안 되는 안하무인의 무식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직통계시를 받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류의 신앙인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교만덩어리들이었습니다. 신약학자 슐라터는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다’는 그리스도 파의 표어였다.” 우리가 말씀 밖으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말씀 밖으로 나아가는 순간 교만해 지기 때문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본문 7-8절). 바울은 본문에서 세 가지를 선언하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합니다. ①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냐? ②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③ 네가 받았는데 어찌 받지 않은 것을 자랑하느냐? 즉 하나님의 은총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재능, 지위, 그리고 본인들이 속한 당파만을 자랑하며 진짜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인정하셔서 왕 노릇하게 해 주실 것은 기대하지 않고 이미 교회 안에서 섬기는 자가 아닌 왕 같은 자세로 자신들이 속한 분파만이 가장 위대한 공동체라고 우기면서 교만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음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한 은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도 도무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그릇되게 달려가는 극단의 절망이 있습니다. 마치 완전히 부서진 바이올린과 같은 상태가 있습니다. * 말씀 밖으로 넘어간 교만의 상태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본문 7절). 여기에 기록된 ‘자랑하느냐’의 어원은 ‘악의로 뽐내다.’입니다. 교만이 바로 자랑질입니다. 그리스도 파에 속한 자들은 고린도교회를 이렇게 무시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미 구약성경을 통달했다. 성경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성경 밖을 넘어서는 수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경에 대해서는 더 배울 것이 없으니 성경 밖의 것을 알아야 하겠다는 극도의 교만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27년 동안 필리핀 오지에서 의술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병을 치료하며 주님의 길을 달려간 박 누가 선교사는 필리핀 오지의 예수였습니다. 남을 위해 27년을 봉사한 그는 지금 위암 4기, 더불어 다른 장기에 전이되어 남은 시간이 6개월 남짓인데 인술을 중단하지 않고 봉사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암 투병을 하면서도 봉사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픈 만큼 아픈 사람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이지요.” 이성적 합리주의로 무신론자들은 박 누가 선교사를 “종교적 꺼풀로 무장한 종교적 과시욕”, “개인적 포플리즘에 마취된 자기만족”이라고 이렇게 폄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 누가 선교사의 삶은 그냥 예수께서 살아갔던 삶의 살아내기입니다. 그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낮아지고, 섬기고, 봉사했던 예수의 삶이 그대로 복사되어 있기에 그는 이 엄청난 고난의 터널에서도 겸손하게 그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예수의 삶이 시시하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의 삶보다 더 위대한 삶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헛한 자신만의 주관적 의지를 지식으로 알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무지함이 바로 교만입니다. 본문에서 본 바처럼 구별하여 세워준 주군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부여하신 주님의 은혜는 저버리고,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고 착각하며 그 헛한 것에 목숨 거는 교만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바로 그 장본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름이 돋습니다. 이 교만함을 갖고 있는 자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십니다. 시편 145: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하면서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하나님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고백이지만 이런 속성의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도 어쩔 수 경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 있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빗장 삼아 도리어 성경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너무나 식상하니 이제 다른 말을 해달라는 자, 말씀을 들으면 너무 뻔하다고 불평하는 자들은 경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계실지 모르며 그래서 당신을 도무지 어쩔 수 없어 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었던 고라는 레위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총회를 이끌고 있는 모세와 아론의 독주에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이유는 나도 레위지파 출신인데 저들 때문에 항상 조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고라는 다단과 아비람과 온을 부화뇌동시켜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반역을 일으킵니다. 이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장면이 민수기 16장입니다. 민수기 16:4절을 보면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이렇게 한글성경에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를 보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기도하고 나서” 모세는 대적들의 공격을 자신의 생각으로 맞받아치지 않았습니다. 듣고 있다가 하나님께 방법을 구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론적 생각으로 무장하여 얼굴을 쳐들고 대적한 고라, 다단, 아비람, 온과는 달리 자신의 생각을 겸손히 누르고 하나님의 식을 구한 모세는 집단적 반역의 위기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현명하게 이 랜덤의 시대를 극복하며 영적으로 실패하지 않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때때마다 엎드리는 겸손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는 어떤 방법이든 동원하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말씀 밖으로 넘어간 교만한 자는 하나님도 도무지 어떻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도 부서진 바이올린으로는 연주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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