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운전을 하면서 혹은 차를 타고 가다가 추월하는 차 때문에 아찔했던 기억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찬송가 560장)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앞지르기 금지 ● 본문: 고린도전서 4:3-5 1) 바울이 본문에서 사람들의 평가나 판단에 좌지우지 되지 않은 담대함의 근거는? ① 본문 4-5절을 중심으로 말해 보자.
② 월권금지라는 단어와 맞물려 말해 보자. |
2)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앞지르기라는 개념을 담임목사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① 설교 테마를 중심으로 말해 보자.
② 열왕기상 21:10절과 관련하여 오늘의 언어로 이해를 구해보자. |
3) 적용하기 ① 하나님은 나의 목적이신가? 수단이신가? ② 신앙의 한 복판에 내 생각이 중심인가? 하나님의 생각이 중심인가? (치열하게 논의하여 정직한 내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바로 잡기를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강영자권사, 서정수집사, 최정희집사, 문혜경자매 등) ● 사업체 심방을 위하여 ● 지역 셀이 섬기는 전도 대상자들을 위하여 ● 교회 소그룹 성경 공부반들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2월 5일 주일 낮 설교 제목: 앞지르기 금지 본문: 고린도전서 4:3-5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는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이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당하신 사건을 단 한 줄로 “어려운 길로 가지 말고 지름길로 가라”고 일갈했습니다. 톰 라이트는 사탄의 교활한 공격에 대하여 예수께서 반응하신 반응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극단적으로 사탄과의 거래에서 파우스트 식으로 거래하실 수 있었지만 거절하셨다. 왜냐하면 그 거래는 하나님을 하나의 신, 혹은 마스코트로 이용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앞지르는 행위들은 단순히 하나님보다 내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의 부속물로 여기는 것이든지 아니면 가장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일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휘페레테스(일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그 분을 주인 삼아 해야 할 일이 주인을 신뢰하는 믿음(피스티스)을 갖고 충성(피스토스)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일꾼 된 자, 즉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체의 일꾼인 우리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신중한 태도가 바로 월권금지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본문 3절).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아주 민감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고린도교회에 상존하고 있는 네 개의 분파 중에서 특히 바울을 추종하고 있는 바울파 사람들(너희에게나)에게 대단히 위대한 존재로 부상되기를 갈망하는 존재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나머지 세 분파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파) 사람들(다른 사람들)에게 싸늘한 평가를 받으며 노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호의적인 사람들과 아주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바울은 겹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번역된 이 말의 헬라어 ‘엘랔키스톤’은 ‘아주 사소한 일’ 을 말할 때 쓰이는 최상급 형용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교회에서 들려오는 바울에 대한 이타저타의 평가와 판단에 대하여 별로 개의치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는 확인사살과도 같은 말이 3절에서 확인됩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감히 판단한단 말인가? 를 전하는 공격적인 말입니다. 쓸데없는 짓,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일에 대하여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자신감을 본문 4절에서 보게 됩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 “나는 여러분의 좋은 안내인이 되기에 어긋날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판단을 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바울 스스로가 고린도에 있었던 성도들에게서 이런 저런 말씨름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견고하게 담대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평가는 주님의 몫이고 주님의 고유권한인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평가와 판단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바울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파의 극찬도, 나머지 바울에 대하여 적대적인 분파의 부정적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본문 5절). 본문 5절에 근거하여 볼 때 어둠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는 주체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실 때가 분명히 온다고 바울은 피력했습니다. 그 날, 그 때가 반드시 온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날이 도래하면 판단하지 않고, 앞지르기 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주의 사역을 감당한 자들을 향하여 주실 상인 칭찬이 있음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절).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교훈은 *상황을 핑계로 하나님 앞지르기를 금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쓰라린 신앙의 변질은 하나님을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유불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을 인용하여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 발언들과 행동들을 한다는 점입니다. 열왕기하 21장을 보면 아합은 사악한 이방 여인인 이세벨을 등에 업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스르엘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은 아합 왕궁과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던 나봇의 사유 재산이었습니다. 이 포도원은 나봇에게 있어서 조상들의 유산이었기 때문에 재산상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상응한 대가를 줄 테니 포도원을 팔라는 아합의 제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아합은 이 일을 이세벨에게 알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수중에 넣어 자신에게 주게 합니다. 그녀에게는 의미 없는 존재인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리력과 공권력이라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악함을 갖고 있었던 이세벨의 포도원을 빼앗는 과정의 소위가 너무나도 악했습니다(왕상 21:8-16절). 많이 망가져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북 왕국의 여론은 무시하지 못할 일이었음을 안 이세벨은 합법적인 포도원 뺏기에 동원한 계략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불신앙으로 나봇을 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세벨은 국가적인 비상상태에만 선포할 수 있는 금식을 아합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이유는 역사가가 생략했기에 제시한 열왕기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분명히 나봇에게 금식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재판 때에는 위증을 막기 위해 제정한 율법에 적시되어 있는 증인을 두 명 세우는데 이세벨이 세운 증인은 모두가 권력에 매수된 야합꾼들이었습니다. 더불어 금식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과 왕을 능멸하였기 때문이라는 악한 누명을 덧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힘이 있었던 이세벨의 계략은 그대로 힘없었던 나봇에게 적용되어 결국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 모든 악함이 하나님의 뜻을 근거로 이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의 논리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는 정 반대되는 논리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악한 일은 자행되었습니다.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하였더라”(왕상 21:10). 불량자들을 동원한 거짓 증언은 악한 자들의 본질이었다고 하더라도 악인들이 동원한 ‘하나님을 저주하였다.’는 해괴한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악함 그 자체입니다.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하였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궤변을 저지르고 있는 이세벨과 거짓 증인들이야 말로 지금 진짜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여 하나님보다 앞서 나아가 하나님의 역할을 악으로 대신하고 있는 하나님 앞지르기의 이 악을 행한 자들을 하나님이 그냥 묵과하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셔서 이 악행의 결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열왕기상 21:23절).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 증식을 눈감아 준 아합은 길르앗 라못에서의 아람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또한 이세벨은 하나님이 역성혁명으로 예후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셨고 그는 이세벨을 처단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신 9:33-35절). 혁명이 일어나자 이세벨을 돌보던 내시들이 이세벨을 창밖으로 내던져 살해를 당합니다. 예후는 아무리 악한 일을 저지른 여자라고 해도 일국의 여왕을 지낸 자였기에 그녀를 장사지내주려고 했지만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세벨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개들이 이세벨의 시신을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신은 훼손되었지만 두골과 손과 발은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갖은 악행을 저지른 여인의 손으로 행한 흔적, 발로 행한 족적, 그리고 그녀의 이성적 근거의 자리인 머리로 자행한 일체의 스티그마를 남겨두신 하나님의 경종의 메시지를 신명기 역사가는 남겼습니다. 바로 대목에서 우리는 나의 유불리에 따라 얼마든지 자행하는 하나님 앞지르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교훈을 가슴에 새깁니다.
바울은 참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누군가를 정죄하고, 누군가에게 올무를 씌우고, 그럴듯한 신앙의 겉치레로 하나님의 일을 월권하는 일체의 어리석은 일에서는 손을 떼겠다고 선포한 것이 그 근거입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본문 4절). 심판의 유일한 판단자는 주님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지르기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월권을 하지 않겠다는 선포입니다. 만에 하나 내 신앙의 여정 중에 하나님을 나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용하는 일체의 짓들, 이것이 하나님 앞지르기입니다. 담임목사는 오늘의 시대가 신 사사시대라고 정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시대를 넘어 이제는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시대로 치닫고 있는 것에 대한 담임목사 나름의 진단입니다. 신 사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지르기를 하지 않는 것은 내 생각 중심으로 하나님이 굴복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하나님 생각 앞에 철저하게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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