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신실하게 진실하게 (복음성가) ●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찬송가 597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이왕이면 좋은 꾼 되자. ● 본문: 고린도전서 4:1-2 1) 바울이 뵈뵈 집사에게 로마서라는 대작을 로마교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기게 된 결정적 이유는? (로마서 12:2절을 중심으로 설교를 참고하여 말해 보자.)
|
2)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노예’(휘페레테스)가 되라고 말한 결정적 반전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① 설교를 곱씹어 보자. ② 주님의 ‘휘페레테스’로 살아가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
3) 적용하기 ① 충성하기에 뒤따르는 전제 조건은 무엇인가? 를 나누고 나에게 적절히 적용해 보자. (김영봉 목사의 글 ‘주기도 참고)
② 설교에서 담임목사가 강하게 말한 이 시대의 기상도를 점검하고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다짐하고 기도하기 (속이는 야바위꾼, 말꾼, 훼방꾼 되지 않도록 집중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강영자권사, 서정수집사, 최정희집사, 문혜경자매 등) ● 2월 월삭예배를 위하여 ● 지역 셀이 섬기는 전도 대상자들을 위하여 ● 교회 소그룹 성경 공부반들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2월 목회 계획 1일: 월삭예배 (명예 권사를 위한 중보기도) 4일: 1/4분기 실행위원회 12일: 2020 비전주일, 교회학교, 지역 셀 대항 윷놀이 대회 10,17,24일: 2017년 사업체심방 13-15일: 바른 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 세미나 19일: 제 3남전도회 헌신예배 26일: 정기 선교주일 겸 졸업예배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1월 29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열여덟 번째 강해) 제목: 이왕이면 좋은 꾼 되자. 본문: 고린도전서 4:1-2 바울은 로마서 16:2절에서 뵈뵈 자매를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 소개하면서 그녀가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의 보호자였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여기에 기록된 ‘보호자’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타티스’는 당시 자비량 사역을 감당하던 바울에게 그녀가 바울의 경제적 조력자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선포가 놀란 만한 이유는 바울은 앞서 기록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여성 폄훼적인 발언을 했었는데 그러한 정서를 가지고 있던 바울이 여성에게 보호를 받았음을 로마라는 대도시의 교우들에게 그의 적나라한 상태, 그것도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보고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뵈뵈 자매가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뵈뵈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서를 전할 것을 명령하면서 그 안 편지의 말미에 당시 시대적 배경이었던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 분명한 로마의 지체들에게 심증적인 염려로 로마의 성도들이 여자라고 깔보지 말고 합당한 예절을 지켜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동시에 로마에서 여성이기에 당할 수 있는 차별을 막아달라는 당부와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줄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로마서 16:2절 전반절). 바울이 이렇게까지 특별하게 당부하는 이유는 뵈뵈가 그 정도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바울의 충성스러운 신뢰할 만한 일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본문 1-2절). 오늘 본문에서 ‘일꾼’이라는 이 단어는 흔히 쓰이는 오늘날의 ‘집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디아코노이’가 아니라 ‘휘페레타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로마 치하의 해군 부대가 이끄는 함선의 맨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와 함께 운명을 마감해야 할 처지에 놓인 전혀 자유가 없는 노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이 단어를 썼습니다. 그냥 육지에서 주인과 함께 살면서 그래도 가끔 숨을 쉴 수 있는 노예인 ‘둘로스’라는 단어로 희석시킬 수도 있었고, 아니면 청지기, 사역자를 말하는 ‘디아코노이’를 쓸 도 있었는데 가장 부담스러운 ‘휘페레테스’라는 극단의 노예라는 단어를 여기에 쓴 까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극단의 노예인 ‘휘페레테스’의 역할은 노예선의 자유가 없는 노예입니다. 한 가지 일, 노를 젓는 것만이 그의 일입니다. 너무 단순하지만 무척이나 힘이 든 일이 노를 저는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인간에게 임하는 가장 큰 절망은 무의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는 삶 자체에 의미가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메타포가 신학자의 말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휘페레테스는 가장 큰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본문 1절의 일꾼은 정말로 짊어지기 싫은 단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반전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너희들은 휘페레테스들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휘페레테스’라고 선언했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의 노예”입니다. 이 말은 상당히 부담되는 문구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때에 사람들에게 이 말은 궤변이요 설득력을 얻지 못합니다. 무신론자의 교황이라 할 수 있는 리처드 도킨슨은 “앞으로 인간 진화는 유전자의 변화보다는 문화의 진화일 것이며, 그 진화가 미래를 완전히 지배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라면 가치중립적인 문화는 언제든지 상황과 이용하는 자의 윤리적 상태에 따라 변질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과연 믿을만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죗성 때문에 인간은 가치중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죗성을 말하고 있는 종교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악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한 무신론 학자에게 열광하고 있는 것이 21세기의 자화상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은 물론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당신들은 예수의 노예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고 한 이유는 예수는 가치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분은 완전하신 가치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완전하신 가치인 하나님이신 예수, 그 분의 노예로 산다는 것은 그래서 부담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걸어가는 길은 도무지 실수가 없는 길이기 때문이며, 그 분이 살아내신 삶은 인간이 또 다시 살아내야 할 식(式)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걸어가셨고 살아내신 식의 끝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이지만 그 분의 휘페레테스(노예)로 살 때 유일하고 진정한 자유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것을 믿고 가는 좋은 일꾼이 되려면 한 가지의 일에 천착해야 합니다. ● 충성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본문 2절). 김영봉 목사는 그의 책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설명하면서 이 뜻을 “아버지의 뜻은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가는 것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충성’ 이라는 단어는 원어 성경에 ‘피스토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믿음’인데 이 단어가 ‘피스티스’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단어와 충성이라는 단어는 어원이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믿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단어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가는 것”입니다. 좋은 일꾼은 하나님의 뜻을 믿고 가는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부흥회에서 회자되던 ‘일꾼에서 탈락되면 반드시 되는 꾼이 말꾼과 훼방꾼’이라는 뼈있는 말을 기억합시다. 말꾼과 훼방꾼의 공통점은 믿음과 충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존재해야 하는 인물들은 휘페레테스 즉 일꾼들입니다.
리처드 도킨슨과 같이 생물학을 전공한 무신론자이지만 도킨슨과는 전혀 다르게 그가 전공한 학문과 타학문의 통섭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학자 중에 한 명이 하버드대학교 석좌교수인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입니다. 그는 그의 책 ‘통섭’(consilience)에서 천박하지 않은 학자로서의 아주 의미 있는 자세를 견지하는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물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의 말이 중요한 까닭은 무신론자들이 확신하는 학문적 교만함을 인정한 겸손함이 보이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윌슨과 같은 이런 인격적인 무신론자들 때문에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겸손한 지식은 강력한 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은 자 된 우리들이 왜 신실한 일꾼이 되어야 하느냐면 겸손함으로 무장한 무신론자는 정말로 상대하기가 버겁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나약한 존재들이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힘들고 벅찬 상대입니다. 다만 그 엄청난 상대들과 싸울 수 있는 여력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싸우는 방법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싸우실 때 대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의 철저한 일꾼이 될 때입니다. 나는 아무런 능력이나 지적인 혜안이나 방어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고 있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예수께서 그런 것을 갖고 싸우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싸우시는 무기는 나의 충성입니다. 그 충성은 한 번도 영적 싸움에서 실패하시거나 패하시지 않는 주님이 일하시는 무기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역설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