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1.15 지역 셀 사역2024-04-22 16:2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 취미 나누기 (혹 집 관리가 취미인 지체가 있으면 귀담아 듣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옳은 길 따르라 (찬송가 516장)
● 어느 민족 누구게나 (찬송가 586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내 집이니까
● 본문: 고린도전서 3:16-17
1) 오늘 본문 16절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지난 주 설교와 오늘 설교를 통합해서 적절하게 설명해 보자.
① 본문 16절 참고: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2) 성령이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에 반드시 필요한 ‘거룩’의 개념 이해를 고전적 이해와 성경적 바른 이해로 나누어 담임목사의 설교를 참고해서 말해 보자.
① ‘거룩’의 고전적 개념:

② ‘거룩’의 성경적 바른 개념:  

3) 적용하기
① 그리스도인으로 바른 거룩의 삶을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고백하고 나누기:

② 부족한 경우, 실천적 살아내기를 한 주간 동안 시연해 보기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서정수 집사, 최정희 집사, 강영자 권사 등)
● 2017년 소그룹 성경공부 및 사역을 위하여
● 학생, 청년 동계 수련회를 위하여
● 담임목사의 목회 리더십의 승리를 위하여
● 1월 교회 표어의 실천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7년 1월 15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열여섯 번째 강해)
제목: 내 집이니까
본문: 고린도전서 3:16-17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셨던 혁명적인 일 중에 하나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전관의 판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정된 관심은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보이는 가시적 건물로서의 성전이었으나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펼치시면서 보이는 성전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선포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임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심령의 한 복판에 세워진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교회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교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건물이 아닌 내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임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이 선언은 파격이요, 혁명적 선언이었습니다. 동시에 내 심령의 한 복판에 세워진 교회는 금과 은과 보석과도 같이 화재가 나도 타지 않는 재료를 상징하는 십자가의 도라는 재료를 써서 외부적인 영적 공격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날마다 교회를 세워가야 함도 역설했습니다. 더불어 바울은 이 비가시적 교회의 전형적인 특징이 성령이 내주하시는 장소임을 밝혀 두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교회 특징은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속에 건축되어 있는 교회, 그것도 그냥 교회가 아닌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는 내 심령의 교회를 내가 관리하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며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내 마음의 교회를 잘 관리하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레마입니다. 잘 관리하려면 ★ 내 마음의 교회에 교회답지 않은 것을 척결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17절 전반절). ‘더럽히다.’로 번역된 헬라어 ‘프흐데이레이’의 문자적인 뜻은 ‘주름지게 하다.’ 혹은 ‘시들게 만들다.’라는 동사입니다. 내 심령의 교회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교회를 더럽히는 행위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교회를 더럽히는 것은 성령님을 시들게 하는 것이고, 성령님을 혹 의인화하여 설명하자면 그 분의 이마에 주름을 지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내 심령의 교회 안에 거주하는 조건은 내가 거룩할 때라는 대 전제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의 이해를 왜곡시키지 말고 예레미야 7:1-15절의 성경적인 내증으로 해석해 봅시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전 627-585년까지 생존하면서 남 유다의 멸망을 직접 눈으로 목도하며 당시 세속적, 종교적 대세에 이끌리지 않고 외롭게 남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며 예언자적인 선포를 감당했던 이로써 남 유다의 가장 비극적 시대에 태어나 가장 쓰라린 아픔과 고통을 경험했던 비운의 예언자였습니다.
  주전 609년에 그런 대로 남 유다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요시야 왕이 애굽과의 전투였던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를 하자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넷째 아들이었던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당시 근동의 패권국이었던 애굽의 바로 느고가 마치 속국 같은 신세였던 유다를 압박하여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강제로 퇴위시키고 그의 형이었던 친 애굽주의자인 엘리야김을 왕위에 세워 여호야김이라는 애굽식의 이름으로 강제로 개명시킨 뒤에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식물인간과도 같이 힘이 없었던 여호야김인데도 자주적인 유다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정의로운 정치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정치를 했습니다. 이런 정치에 실망한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져 있는 성전에 올라와 신세 한탄 겸 대리만족의 위안을 받는 일을 습관적으로 행합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예루살렘 사람들의 심리적 허약성을 이용하여 돈벌이혈안이 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 종교 권력자들이 더 심각하게 타락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과 맞물려 있었던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 권력자들과 야합하여 민중을 억압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더욱 많은 경제적 압박을 가하는 이른바 흑암의 시대가 바로 여호야김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들어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고 빈틈없는 심판을 천명하시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거짓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권력자들에게 예레미야의 예언이 귀에 들러올 리 없습니다. 도리어 흉 예언을 선포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눈엣 가시거리였습니다. 예레미야를 물리력과 공권력과 기득권적 힘으로 짓누르며 핍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당시 성전종교의 거짓과 허울만 있는 가증스러움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도전하고 있는 것이 예레미야 7장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솔로몬 성전에 올라와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종교 지도자들이 이렇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들이 삶에 지쳐 성전에 올라왔는데 참 잘 왔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올라온 이 성전에서 하나님이 큰 축복을 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탁은 제사장들이 그렇게 외치더라도 그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지금 성전에서 앉아 외치는 말씀의 내용이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을 전하는 것을 단지 제사장의 에봇 옷을 입었다고 그 말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입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하게 보이는 에봇이라는 세마포 제사장 옷을 입고 지금 이 성전에 올라온 자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샬롬의 은총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가증스러운 언어와 말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주전 6세기 중반의 남 유다의 성전주의자들을 향하여 거짓된 자들의 현란한 말잔치에 현혹되지 말라고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선포하고 있는 샬롬의 메시지가 거짓의 메시지라는 사실은 예언서 전반에 무궁무진합니다. 지금 성전에서 거룩을 떠벌이는 일체의 종교 권력 지도자들과 거기 야합한 정치 권력자들이 행하고 있었던 행태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하며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은 죄 ② 이웃들 사이에 불의를 정당화한 죄  ③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와 같이 당시 최고의 나약한 자들을 힘이 없다고 압제한 죄 ④ 무죄한 자들을 무고하여 억울한 피를 흘리게 한 죄. 5-6절이 정치적, 사회적인 죄라고 한다면 9-11절은 종교적인 죄입니다. ① 우상을 버젓이 섬기면서도 전혀 무감각한 죄, ② 하나님의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든 죄, ③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자의적으로 구원의 선포를 남발한 죄입니다.
  김근주 교수의 예레미야 7장의 지론은 예레미야 당시 성전 종교의 심각한 일탈, 하나님과 관계없는 무관계성, 당시 성전 제사장들의 행태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정황과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런 천박함에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교회는 이제 거의 소망이 없는 그로기 상태의 실신 직전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는 도리어 지금의 대형교회를 완전히 해체하고 보이지 않는 예수께서 말하고 있는 심령에 세운 보이지 않는 원형의 교회로 나아가지 않는 한 교회는 미래와 희망이 없다고 단정하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준희 교수는 한국교회가 예레미야 시대의 성전 종교의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점을 직시하면서 정신 차릴 것을 맹공하고 있습니다. ‘예언서 다시 보기’에서 7장 해석의 희망 섞인 여운을 남겨 놓습니다.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성전이 망할 것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성전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길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다음 권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설교에서 죽음의 사실만을 알린 것이 아니라 살 길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길은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는 세 가지의 공존의 영성을 여는 방법입니다. ① 도덕적 삶(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 ② 공의의 삶(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해야 한다.) ③ 구제의 삶(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아야 한다.)입니다.”(예언서 다시보기 pp,97-101)
  오늘 설교의 레마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내 마음의 교회를 관리하고 지키며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내 마음의 교회에 교회답지 않은 일체의 것들을 척결하는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거룩함’이고 또 이 거룩함을 유지해야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교회가 됨을 역설했습니다. 거룩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내 마음 속의 교회에 다음과 같은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 거룩성은 교회와 성도가 진짜로 아픈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며, 맘몬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어 도무지 구조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천민자본주의 체계 아래에서 일어설 수 없는 소외된 자들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엄청난 구제를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고통 중에 있는 자들과 그냥 옆에서 앉아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불의로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위해 함께 분노해 주는 것입니다. 못 먹은 자들에게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의 속성으로 교회를 채우면 나는 하나님의 집을 관리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심령 안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주하시는 집입니다. 내 집 관리를 성경이 말하는 거룩으로 채워 깨끗이 관리합시다.
  이제부터 내 마음속에 있는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사유합시다. 보이는 건물이 아닌 성령이 내주하시는 내 심령의 교회가 건강할 수 있도록 달립시다. 그리고 보이는 예배당에서는 견고한 내 교회를 만들기 위해 배우기에 힘씁시다. 내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내 교회를 든든하게 관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