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한 해를 마감하고 송년 주간을 보내면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덕담 나누기. (개별적으로 돌아가며) | 경배와 찬양 (WORSHOP)●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가 115장) ● 주님이 흘린 눈물은 (CCM)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같이 아파하기 위하여 ● 본문 : 이사야 22:1-4 1) 예언자 이사야가 본문에서 탄식했던 이유를 설교 되새김질을 통해 나누어 보자. 2) 본문의 영적 상태와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한국교회의 영적 상태를 비교하고 예언자 이사야의 마음과 오늘 교회를 위한 나의 마음을 적용시켜 보자. ① 본문의 영적 상태와 이사야의 마음:
② 오늘 한국교회의 영적 상태와 나의 마음: |
3) 2016년 성탄절 메시지를 통해 가다듬어야 할 영적 교훈 두 가지를 설교에서 추출하자. 그리고 결단을.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서정수 집사, 최정희 집사) ● 송구영신예배가 은혜롭게 진행 되도록 ● 제 9회 사무총회가 기쁨의 잔치가 되도록 ● 나약한 이웃과 함께 하는 연말이 되도록 ● 2017년 계획을 잘 수립하고 2016년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성탄절 설교 제목: 같이 아파하기 위하여 본문: 이사야 22:1-4 오늘 본문은 남 유다의 제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 치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전 728-687년까지 재위하였던 히스기야 왕은 주전 714년에 죽을병에 걸렸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로 인해 정상적인 국정을 관할하지 못하는 불상사 때문에 당시 정승이었던 국고지기 셉나가 대행 딱지를 갖고 국정을 지휘하게 됩니다. 유다는 히스기야 치세 때만 하더라도 친앗수르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셉나의 판단 착오로 인해 잠시 동안 반 앗수르 정책을 폄으로서 앗수르와 대립각을 세운 위험한 모험을 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셉나는 앗수르의 군사적 압박에 대비하여 예루살렘에 수로 공사를 하고, 궁에 무기를 준비하는 등 나름 군사적 대비를 하였던 것을 이사야 22:8절 이하에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군사적 정책이 예언자 이사야가 받은 하나님의 신탁과 어긋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앗수르를 대적하는 것은 도리어 제 무덤을 파는 것과 다르지 않은 무모한 짓임을 예언자 이사야는 계속해서 선포합니다. 그런데도 셉나는 예언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군사적 대비를 하므로 결국 주전 712년 앗수르의 강력한 제왕이었던 사르곤 2세의 침공을 받고 거의 유다의 성읍들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역사의 한 획을 이룬 내용을 살펴야 합니다. 사르곤 2세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은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유는 메소포타미아 남방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2세의 입장에서 볼 때 유다의 예루살렘은 비옥한 땅인 메소포타미아의 남방 지역에 비해서는 별로 주목되지 않던 땅이었기에 예루살렘 정복을 포기하고 더 중요한 땅에서 일어난 반란을 정복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런 극적인 살아남음이라는 궁색함을 경험한 유다가 사르곤 2세가 떠나자마자 행동한 반응이 오늘 본문에 여지없이 예언자 제 1이사야를 통해 보고되고 있습니다.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 인고”(본문 1절 하반절). 그곳에 올라간 이유를 2절 전반절이 설명해 줍니다.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평평한 지붕에 올라가서 소란하게 떠들었습니다. 즐거워했습니다. ‘즐거워하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리즈’는 ‘기뻐서 날뛰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자들은 거의 광란의 수준으로 지붕 위로 올라가 잔치를 벌였음을 걱정스러움으로 바라보는 예언자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시끄러운 파티소리는 무엇이냐? 길거리에 환호소리, 박수소리 요란하구나!”(유진 피터슨의 번역) 예언자가 이런 걱정에 찬 소리를 하는 이유는 당시의 상황이 결코 파티를 벌일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맛보지 않은 것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잘 해서가 아니라 가까스로 멸망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정말 우연의 일치로 예상하지 않는 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르곤 2세가 예루살렘에서 돌렸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언제든지 멸망이라는 비극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은 말도 안 되는 샴페인을 터트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고 있음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본문 2-3절). “존경할 만한 군인, 자랑스러운 전쟁 영웅 하나 없는 너희다. 너희 지도자들은 모두 칼을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붙잡힌 겁쟁이들이다. 너희는 싸움터에서 줄행랑치다 붙잡힌 겁쟁이 나라다.”(같은 본문, 유진 피터슨 번역). 이때가 주전 712년이니까 역사적으로 남 유다의 멸망 125년 전의 상태인 셈입니다. 극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의 비극은 모면했지만 이후 남 유다의 국가적 상태는 히스기야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아들과 손자인 므낫세와 아몬이 왕위를 이어 받으나 이들의 행적은 남 유다의 가장 영적으로 악했던 왕들로 그들로 인해 남 유다는 급격히 패망의 암운이 드리워졌고 앗수르를 접수한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비극을 맛보게 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운명을 하나님의 신탁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잠간의 외적인 요소로 예루살렘 공격을 멈추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앗수르의 사르곤 2세의 행위를 마치 본인들이 잘해 전쟁에서 이기고 승리한 것처럼 심각하게 착각하여 지붕위로 올라가 흥청망청하고 있는 남 유다를 보며 이사야 예언자는 본문 1-3절에서 싸늘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본문 4절). “그 소란 중에 내가 말하였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두어라 홀로 슬피 울게 놔두어라. 다 잘 될 것이라는 말, 내게는 하지 말라.”(같은 본문, 유진 피터슨 번역). 예언자 이사야의 외침을 통해 우리는 오늘 두 가지의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1) 아기 예수의 탄생 절기에 주님이 이 땅을 보고 아파하는 그 마음을 품는 자가 우리 세인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전혀 시대적 감각에 무지했던 히스기야 말년 시대에 유다 백성들의 경거망동을 보며 탄식했습니다. 도무지 영적으로 캄캄한 당시 유다의 영적 기상도를 보며 그는 아파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앞으로 펼치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둔감한 유다를 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홀로 슬피 울게 놔두어라, 다 잘 될 것이라는 말, 내게는 하지 말라고 선언합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힘들어하며 고독하게 광야에서 외치는 선언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누가복음 19:41-44절). 종려주일에 주님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십자가 죽음 여행의 거보를 디디셨습니다. 마침 입성하는 길에 수많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민족의 메시아가 왔다고 칭송하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모두가 들떠 있는 이 분위기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불과 얼마 후에 초토화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탄식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인 해석으로 이때가 주후 34-37년 사이라고 가정한다면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후 36-33년 뒤에 로마의 티투스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그때를 주님이 바라보시고 우신 것이 됩니다. 산헤드린 유대 종교의 영적인 무기력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했던 저 예루살렘 종교의 참담함으로 벌어질 앞날의 비극을 예견하신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2016년을 접는 시기이기도 한 요즈음 우리는 이 땅에 오신 평강의 아기 예수로 인하여 기쁨을 감출 수 없지만 오신 주님의 마음이 어떨까를 추론하여 담는 것은 축제의 장을 여는 것 못지않게 나와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조국교회를 위해 너무나 중요한 신학적 인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016년 성탄절을 보내며 우리는 오늘 이 나라가 혹시 주전 712년, 남 유다의 영적 기상도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지 오늘 이 민족이 이렇게 심각한 내홍에 빠지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진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망신창이가 된 이유는 정치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지 못했고 목사가 목사답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간의 평가를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교회가 부패된 정치권력과 세속적인 거대한 물결에 속수무책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름이 없다고 평가된 교회의 신뢰가 무너짐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경적 복음대로의 실천적 과제들을 온전히 감당하고 돌이키는 순간, 아직도 한국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보루이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와 목사는 이사야의 고독한 외침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사야가 가졌던 하나님의 아파하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무너질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던 그 울음을 함께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파하는 마음을 함께 갖고 아파하는 것은 이해하고 아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살아내는 것입니다. 2) 성탄의 아침에 우리는 세속의 소리 반대편에 있어야 함을 본문은 제시합니다. “다 잘 될 것이라는 말, 내게는 하지 말라.”(본문 4절). 이것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난장의 잔치를 벌이고 있던 예루살렘 백성들의 소리였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의 무모한 소리들이 난무할 때 이사야는 판을 바꾸는 선포를 합니다. “다 잘 될 것이라는 말, 내게는 하지 말라.” 교회가 세속의 소리에 야합하면 교회는 무능해집니다. 교회가 세상의 주류들의 소리에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신탁과 조명은 닫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는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주류는 무너질 땅이었지만 갈릴리는 비주류들이 거하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2017년에도 여전할 것입니다.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절)고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같이 아파하며 이사야 예언자처럼 홀로이지만 그래서 고독하겠지만 그들을 위해 울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 아픔을 나누고 살아내십시다. 세상의 소리에 언제나 반대편에 서서 주님의 소리를 들읍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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