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당신이 지인들을 만나면 제일 많이 하는 인사말은 무엇입니까? | 경배와 찬양 (WORSHOP) ● 시작됐네 (ccm) ●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찬송가 41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 본문 : 고린도전서 1:1-3 1) 주께서 주시는 영적 기초 체력의 요인 중에 은혜가 임할 때 나타나는 영적 변화는? ①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한 글을 중심으로 텍스트에 있는 내용을 말해 보자. (빌 3:5-9)
② 은혜로 인해 내 삶의 해석이 달라진 것은 무엇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
2)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가지게 된 실존적 불안함은 무엇이 있는가? ● 담임목사의 설교를 통해 선포한 내용들을 참고하여 내가 가진 불안함을 나의 언어로 말해 보자.
● 박노해 시인의 ‘평화 나누기’라는 시에 나오는 내용들을 담임목사는 무엇이라고 상징화했나? |
3) 은혜와 평강이라는 영적 기초 체력의 순서가 뒤바뀌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마태복음 6:33절과 관련하여 말해 보자. ② 이렇게 살기 위해 나의 신앙적 우선순위를 차제에 정돈해 보고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비상 기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참여하기 독려 ● 대입 지원자들을 위해 ● 지역 셀 피선교지의 승리를 위해 ● 부교역자 충원을 위한 중보 ● 담임목사의 첫 번째 서적의 선한 승리를 위하여 2) 헌금 3) 광고 ● 가을 열린 모임 3주차 사역에 최선의 노력 독려 (다음 주부터 있을 지역 열린 모임 상의하고 전략 짜기) ● 담임목사 저서 북 리뷰 작성할 수 있는 교우 독려하여 인터넷에 게재 독려하기(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10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네 번째 강해) 제목: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본문: 고린도전서 1:1-3
기초체력이 부실하여 생기는 우리사회의 일면들을 보며 우리의 영적인 기초체력을 왜 강화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바울 서신은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 교회 서신과 개인 서신을 포함하여 13권으로 제한하는 것이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 13개의 서신중에서 로마서를 제외한 12권의 서신에서 바울과 공동 발신자들이 전하는 인사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였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의미 없이 쓰이는 말들이 많이 있는 반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지 않으면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3절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는 자들에 주어지는 영적 기초 체력이 본문에 보입니다.
1) 주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교회가 아닌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감히 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인사말로 언급한 단어 ‘은혜’는 문자적으로 ‘선물’을 의미하는 ‘카리스’의 번역입니다. 자격이 있는 자가 마땅히 받는 선물은 선물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은 상응하는 대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주는 사람이 상대방의 자격을 보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런 기초체력이 길러집니다.
● 삶의 해석이 달라지는 인생을 삽니다.
오늘 본문 편지의 공동 발신자 바울은 ‘카리스’ (은혜)를 받기 전의 자신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립보서 3:5-6절) 그는 자신의 정체를 ‘교회를 박해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이 바울이 교회를 박해할 때의 시점으로 은혜를 만나기 전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은혜를 만났습니다. 극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심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불연 듯 찾아온 은혜였습니다. 말 그대로 ‘카리스’였습니다. 그렇게 ‘카리스’를 받고 난 바울이 자신의 정체성의 변함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7-9절). 은혜는 이렇게 사람의 전 인격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영적 기초 체력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전적인 선물임을 믿기에 그는 은혜대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살았던 바울의 전 인격적인 변화는 삶의 해석이 달라졌습니다. 예수와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삶이 예수를 아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삶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가르친 토머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의 변환’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은혜는 삶의 해석을 달리하게 하는 기초 체력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고백하며 선포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9-10절).
2) 주 예수께서 주시는 영적 기초 체력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본문 3절). 평강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견고하게 하는 기초 체력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평강’의 번역인 ‘에이레네’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샬렘’의 신약식 번역입니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평강’의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전제를 갖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에이레네’, ‘샬렘’이라는 평강은 완전한 평강입니다. 부분적인 평강이 아니라 완전하고도 온전한 평강입니다. 그래서 은혜처럼 세상이 줄 수 없는 개념입니다. 요한복음 20:21절에서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군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제자들은 모두가 그를 버렸습니다. 분위기는 예수 잔재들을 발본색원하겠다는 일련의 무리들이 예루살렘 전역에서 제자들을 찾고 있는 살벌한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문을 굳게 하고 한 장소에 모여 후일을 도모하고 있는 긴장감 100%의 때 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주군이신 부활하신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작금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두려움은 복합적입니다. 유대 종교 회의의 수색도 두렵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도 믿지 못할 일인데 그 분이 지금 자기들의 목전에 계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두려움은 주군을 배신한 것에 대한 자책감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은 20:19절).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순간적인 평강이 아닌 영속적인 평강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에서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 두려움을 봅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더 앞서 나갈 것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가 나보다 아파트 평수가 더 넓은 쪽으로 이사 갈 것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의 아들딸들이 내 자녀들보다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것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가 나보다 배기량이 더 큰 자동차를 탈 것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가 나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등등 이루 헤아리기도 쉽지 않는 실존적인 열등감 혹은 패배의식 등으로 인해 불안함이 엄습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까요?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게 하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 평화 나누기)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는 한 평강은 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 평화라는 말은 맞습니다. 주님이 없는 장소에 평화란 존재하지 않고, 주님이 주시지 않는 평화는 속임수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그래서 정확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평강을 주시는 수혜자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말한 것이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적 기초 체력의 내용이 은혜요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도적으로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영적 기초 체력의 순서가 뒤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평강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 없는 평강을 추구하려고 하는 나쁜 버릇이 배태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없는 평강은 가짜이고 사이비이며 유사 평강입니다. 은혜가 전제된 평강이 진짜입니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6:33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먼저 추구할 성도의 의무입니다. 성도는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아야 정상입니다. 순서를 바꾸지 말고 교회와 성도의 영적 기초 체력을 든든히 만드는 순리요 순서를 따라 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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