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픈 사랑이라도 하자. 신학교에 다닐 때, ‘하’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수업 중에 이 친구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나님’이라 지을 것이라고 농을 해서 수업을 받던 모든 이를 웃겼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하’씨의 친구가 같은 맥으로 이번에는 농이 아니라 진심을 말했습니다. ‘나는 박국’이라고 지을 건데. 지난 주간 금요일에 순서에 따라 하박국을 새벽예배 시간에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이 예언자의 이름을 우리식을 풀면 ‘안아준다.’는 뜻입니다. 새벽예배 첫 시간에 심장 깊숙한 곳에서 움트는 듯한 울컥함이 제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의 무너짐을 목도하고 있는 예언자 하박국, 그 휘황찬란한 예루살렘 성읍과 솔로몬 성전이 초토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하박국, 내 사랑하는 조국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에 속수무책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조국보다 더 못한 짐승 같은 갈대아(바벨론)에게 조국을 치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에 못내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하박국, 그래서 이 비극을 막아보기 위해 하나님께 대들기도 하고, 아양(?)도 떨어보고, 심지어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이 당신의 선민공동체인 유다 멸망의 뜻을 철회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지켜보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성 멘트를 주저하기도 했던 하박국, 그러나 그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실 것이라는 남은 자를 통한 선민 공동체의 구원 여백을 남기심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노래하며(3:16-19) 풍운아적인 격정의 삶을 살았던 하박국 예언서를 나누면서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 땅 대한민국에 하박국은 없습니까?” 언젠가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다가 이 문장에 왠지 모를 영적 오기가 꿈틀거렸습니다. “오늘, 이 땅의 아픔 때문에 바로 너를 세웠다. 네가 대안이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사방이 막혀 있어 영혼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 작금입니다. 더 아픈 것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해서 비난과 채찍은 봇물인데 제물 되어야 했던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은 소멸되어 있는 게 오늘의 내 사랑하는 조국입니다.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하박국을 펼치면서 나는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대안인가에 머리를 숙였던 새벽을 보낸 것이 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홀로서기의 사건, 이것은 현재다.”(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p,47.) 그의 갈파를 읽고서 심비에 밑줄 그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읊조려보았습니다. “철저한 홀로서기에 복판에 있는 지금, 나는 하나님의 대안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박국이 되고 싶습니다.” 고인이 된 대중가수 김광석씨가 불렀던 노랫말이 있습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하박국을 통해 배운 너무 아픈 사랑, 그걸 지금 홀로서서 해야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여, 한국교회를 살려주옵소서! 너무 아픈 사랑이지만 이 사랑이라도 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