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편 5-6절의 말씀입니다.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전 바벨론 유수 시절 꿈에 그리던 고향을 바라보며 돌아가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던 그때의 일을 추억하며, 그 소망이 이루어진 뒤, 이제 다시 고향 땅에 세워진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면서 그 감격의 격정을 이렇게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어떤 이는 나에게 상당히 차가운 이성을 가진 목사라고 혹평하는 이도 있지만 믿든지 안 믿든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목회를 하는 내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던 날들이 참 많이 기억에 있습니다.
섬기던 교회를 뒤로 하고 다른 사역지로 옮길 때마다 아파하는 교우들 때문에 더 아파하며 울었고,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이 흘리는 눈물이 있을 때마다 동통(同通)의 눈물을 흘리며 동고동락했습니다.
지난 2주 전 토요일,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랑하는 지체의 흘러내리는 눈물의 전화를 받으며, 같이 울었습니다. 너무나 기적 같은 기도의 응답에 지체도 울고, 나도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간, 화요일 또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사랑하는 지체의 감격의 음성이 제게 들렸습니다. 그에게서 들려오는 음성은 지난 3주 동안 새벽에, 그리고 개인기도 시간에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기도한 내용의 선명한 응답 메시지였습니다. 순간, 그동안 숨죽여 참아왔던 정서적 아픔의 긴장에서 놓임을 받아서 그랬는지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워서. 너무나 감사해서. 너무나 완벽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울음으로 드렸습니다.
세상에 있는 혹자들이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을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동원하여 힐난합니다. 인격모독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가히 살인적인 언어로 목사들을 공격합니다. 그때마다 목사로 살고 있는 죄 때문에 무방비로 당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어할 기제가 없어 묵묵부답했습니다. 그렇게 공격을 받고 나면 속이 곪습니다. 속앓이 때문에.
지난 3주, 아내와 제가 많이 아팠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섬기고 있는 우리 세인 지체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를 살펴보니 우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코람데오의 실제에서 하나님께 울었습니다. 저들의 울음이 끝나게 해달라고 울었습니다. 그렇게 3주를 꼬박 울었더니 주군께서 성도들의 울음을 그치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울음이 끝난 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지체들의 울음이 끝나게 됨에 감격하여 펑펑 울었습니다.
시편 126:5-6절의 시인의 고백은 목회자만 아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목사 말고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울며 씨 뿌린 자만이 거두는 감격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가 전한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추억담이 오늘은 너무 큰 활자로 보이는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행전 20:31)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목회는 눈물인 게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