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 평론가로 유명한 리베카 솔닛의 말을 하나 빌려오겠습니다. “희망은 기대와 다르다. 희망은 세계의 본질적 불가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현재로부터의 단절과 뜻밖의 일들을 감싸 안는 일이다.” (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창비, 2006년,p,174) 솔닛의 이 갈파를 뇌에 새겨놓은 이유는 ‘본질적 불가지성’을 수용하는 것, 그리고 ‘뜻밖의 일에 대하여 보듬는 일’이라는 해석한 그녀의 말을 의미 있게 새겼기 때문입니다. 2020년을 살아가면서 내내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본질적 불가지성’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무지함과 ‘뜻밖의 일’ 대하여 전혀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는 자괴감입니다. 목사로 사는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있어야 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미워집니다. 윤동주가 이렇게 노래했죠?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자화상 중에서) 왠지 모르게 오늘은 시어에 담겨 있는 사나이가 윤동주의 사나이가 아니라 ‘나’라는 사나이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너무 우울한 소회일까요? 지난주에 8월의 달력을 넘겼습니다. 달력을 넘기면서 넘기는 내가 불쌍해 졌습니다, 왜일까? 왜일까? 계속 물었는데 아마도 솔닛이 일갈했던 그 희망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이제 9월을 또 살아야 하는데 마음을 다잡이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야 살 것 같아서. 조금 더 성도들을 긴장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조금 더 성도들을 위해 중보 해 보렵니다, 조금 더 아픈 환우들을 위해 엎드려 보려 합니다. 조금 더 성도들이 웃을 수 있도록 울어보려 합니다. 조금 더 삶에 찌들려 있는 교우들을 위해 소리쳐 하나님께 SOS를 치려합니다. 조금 더 아슬아슬한 경영의 현장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기도의 비상들을 켜 보려합니다. 목사에게 이것이 희망을 붙드는 일이라고 나를 쳐서 복종해 보려합니다. 해서 지금 한치 앞이 내다보이지는 않지만, 본질적 불가지성을 수용하고, 뜻밖의 아연실색하는 일들에 놀라지 않으며 담대히 목사가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가 보려고 합니다. 해서 9월의 달력을 넘길 때는 조금 더 웃어볼까 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 지체가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목사님, 붙들 사람이 목사님 말고는 없습니다.” 왜요? 붙들어야 한 분은 하나님이시지요. 하지만 제가 그 지체의 고백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래야지요. 성도가 붙들 수 있는 목사라도 되어야지요. 세간들에게 비난받는 괴물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인 지체 모두가 웃는 9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