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깊이 생각해야 합니다.2024-03-07 16:16
작성자 Level 10

2021년 12월 19일 주일 오전 예배 (히브리서 강해 11) -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설교

 

본문히브리서 3:1-6

제목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서론)

 

저의 첫 번째 졸저인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에서 니콜라스 카가 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북 리뷰를 담았습니다.

니콜라스 카는 세계적인 IT 학자이자 인터넷의 아버지라고 지칭되는 전문가입니다.

카가 쓴 책을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는데원래 이 책의 원제는 ‘The shallow’입니다.

즉 천박한 사람들’, 혹은 얄팍한 사람들입니다.

카는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IT 전문가니까 기계문명의 선봉자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 영역의 전문가가 역설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드러낸 본색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의 글 전체가 버릴 것이 없는 옥고들이지만 특히 저를 흔들어놓았던 한 문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인간성의 정수라고 여긴 깊은 사고는 돌진하는 진보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격동의 기술 발전은 콩코드 역에 도착한 기관차와 마찬가지로 사색과 명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잘 정제된 인식과 생각 그리고 감정을 잠식할 것이다.” (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청림, p,321.)

왜 제가 이 문장에 흔들렸을까요?

카의 이 말이 보편적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IT 진보의 세계 안에서 살게 되면서 그 첨단의 IT 기계들이 인간의 생각을 대신해 주는 편리함 때문에 인간의 뇌는 점차 생각하지 않는 무뇌(無腦)가 되어갈 것이라는 경종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다가 저를 비롯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얄팍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천박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점은 그리스도 예수를 묵상할 리 없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생각하라는 권면 정도가 아니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깊이 생각하다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노에오의 원뜻은 시선이나 정신을 집중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집중한다는 것은 한눈을 팔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이 3:1절을 이렇게 번역했는데 기막힌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친구 여러분높은 곳을 향한 부르심을 따라 사는 동료 여러분예수를 진지하고 주의 깊게 바라보십시오그분은 우리의 중심이시며하나님이 맡기신 모든 일에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대림절 네 번째 주일, 물으면서 설교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계십니까?

 

본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국적인 지도자인 모세를 무대 위로 올리는 강수를 둡니다.

모세에 대하여 설왕설래하는 일은 유대인들의 정서로 볼 때 금기시되는 절대적인 존재가 모세입니다.

이전 강해를 통해 설명했듯이 히브리서의 독자군은 로마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던 유대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체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라는 설교문이자 편지 형식의 글을 읽고 들어야 하는 대상자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거의 절대 권위자였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모세를 무대의 정 중앙에 올려놓았으니 히브리서 저자는 강심장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본문의 정황은 한편으로 보면 모세에 대한 폄훼로 비쳐질 정도의 위험성이 있는 발언투성이었습니다.

들어가 보십시다.

2절 본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이를 신실하게 하셨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주어인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우신 이는 아들 예수를 지칭합니다.

이렇게 선언한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유대 출신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아주 익숙한 선조인 모세를 소개하면서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역할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양용의, “히브리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p,95.)

하나님의 온 집이란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를 통하여 조명해 볼 때 모세의 위상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거의 절대적 권위였습니다.

민수기 12: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히 해주시는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다는 것을 빌미로 리더십에 도전을 합니다.

우리들이나 모세나 그 권위가 동일하다는 리더십의 도전이었습니다.

이 도발을 목격하신 하나님께서 대단히 선명한 메시지를 도발한 미리암과 아론에게 선포하시면서 다시는 모세에게 도전하지 말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환상과 꿈 등으로 선지자들에게 알린 것처럼 너희들에게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는 단지 꿈과 환상 정도로 소통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않다.” 라는 하나님의 발언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하여 세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그의 누이와 형에게 선포하시면서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장을 날리신 셈입니다.

사정이 이 정도임을 히브리서 독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출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3-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파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이 인정하신 유일무이의 권위이며 신실한 사람이었음을 선포한 히브리서 저자는 경우에 따라 칼 맞을 각오로 혁명적인 선언을 합니다.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아야 할 존재가 있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모세와 비교하여 모세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권위자가 있다는 말을 선포합니다.

발언의 강도는 더 강해졌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라는 집의 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즉 예수는 종이 아니라 그 집의 아들이었다고 선포합니다.

한 집의 종과 아들을 어찌 비교할 수 있느냐는 반문을 히브리서 저자는 강하게 역설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집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4)

그 집을 신실하게 지키며 충성한 종은 모세입니다.(5)

그 집을 맡은 주인공은 아들이신 예수이십니다.(6)

그러므로 결론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들 예수는 모세와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우월하신 유일한 권위라는 것입니다.

이런 대 명제를 선언한 자가 바로 히브리서 저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보다(천사는 물론 모세까지 포함더 우월하신 존재인 아들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저자가 역설합니까?

다시 본문 1절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렇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아들 예수께서 천사보다모세보다 우월하신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며 선포하게 된 이유가 바로 예수를 깊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맺은 결론이 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의무가 그리스도인(히브리서 독자)에게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깊은 생각 중에 제 일의 고백(믿는 도리)이 등장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이심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도의 명칭은 주의 제자들입니다.

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의 원 의미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한복음 17:18)

주께서 아버지께 드린 대제사장으로의 기도 내용의 일부입니다.

주님이 갖고 계셨던 자신의 정체성은 아버지께서 세상을 위해 보낸 존재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분명히 세상으로 보내진 사도였습니다.

강남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김달수 박사는 사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는 자신을 보낸 분과 똑같은 권위를 가진 대리인이나 대사이다그는 법적으로 주인과 일치한다따라서 사도는 하나님의 위임과 전권을 부여 받은 자이다.” (김달수, “히브리서-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46”, p,111.)

이 권위를 지닌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직함으로 사도라는 직함이 붙은 곳은 신약성서 중에 본문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진 사도라는 의미를 조금 더 좁히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사도이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을 가장 위대한 권위로 인정해야 하는 당위이자 호몰로기아’ 즉 믿는 도리의 내용입니다.

 

2) 대제사장이심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는 본문을 포함하여 3-4장 그리고 여타 다른 장에서도 집요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단순하게만 살피겠습니다.

이 땅에 사도로 오신 예수님의 직책은 제사장 중의 으뜸이었던 대제사장의 신분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대제사장의 역할은 1년에 단 한 번 대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가 이스라엘 온 집이 자행한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의 의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역이었습니다.

이 종교적 제의는 매년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도 이 일을 행하기 위해 오신 대제사장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차원이 다른 대제사장이셨습니다.

분명히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한 중재자이며 중보자임은 분명하지만 예수님은 근원적으로 차원이 다르신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매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대 속죄일의 사역을 완성하신 대제사장이셨습니다.

히브리서10:11-14절입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뭉클하게 하는 감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은 단 한 번에 이루실 영원한 속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하는 도리입니다.

저자는 제가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한 지칭을 본문 1절에서 더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세인 지체들이여!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 한 사람한 사람이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이 거룩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정말로 놓치지 말아야 한 신앙인으로서의 의무사항이 있습니다.

믿는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희철 목사께서 쓰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에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은 편안한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이다.”(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꽃자리, p,102.)

글을 발견하고 심쿵했습니다.

펜데믹 2년을 경험했고, 3년차로 넘어서는 작금우리 세인 교회의 성도들은 물론 일체의 한국교회 성도들을 아우르면서 느끼는 살 떨림이 있습니다.

니콜라스 카의 말을 패러디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충분한 개연성에 내가 노출되어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The shallows in today who is ignoring Jesus Christ is me.

(작금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천박한 그리스도인이 바로 나였다.)

펜데믹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사탄의 궤계는 더 한층 강화됩니다.

이렇게.

깊이 생각하지 마너만 그런 것이 아니잖아.

2021년 12월 22일 대강절 네 번째 주일에 내게 필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오셔서 행하셨던 믿는 도리를 깊이 생각하는 신앙의 성찰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내년 3월 9일에 이 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도 역시 유권자로 상당히 많은 선거에 참여했지만 이번 20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마음이 유례없이 참담합니다.

누가 더 좋은 대통령일까를 고민하는 선거가 아니라 누가 더 나쁜 도둑놈이 아닐까를 택하는 선거이니 두 말 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누가 덜 나쁜 인간인가를 찾는 선거라 참담합니다.

얼마 전후보 나선 사람 중에 한 명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을 포털 사이트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대학에서 인문학 같은 것은 소수만 하면 되고대학원에서까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첨단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은 지원하지 않는 게 맞다.”

이 발언을 귀동냥으로 들었고 읽다가 곧 이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 후보까지 된 나라의 백성인 나는 불쌍하다.

언젠가 읽었던 슬로보니아 출신의 사회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이 했던 말에 공감하여 밑줄을 그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재앙은 감성의 사막화다.”(슬라보예 지젝외 6인 공저, “나는 누구인가”, 21세기북스, p,174)

시대의 비극은 전방위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천박함이 대세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감성의 진보를 무시하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두려워하며 떨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성의 사막화입니다.

이것을 더 강력하게 종용하는 시대가 2022년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중에 함께 나눌 히브리서 12:2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저자가 선언한 금과옥조에 가늠할 만한 명언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바라보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포라오는 단순히 본다는 의미를 뛰어 넘어 오늘 본문에 있는 단어인 깊이 생각하라는 카타노에오와 맥을 같이 하는 단어입니다.

2022년은 깊이 생각하지 말고 적당히 살라고 종용하는 사탄적인 목소리가 더 큰 소리를 내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명심하십시다.

우리의 믿는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생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더 깊이 생각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함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가리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그 이름 예수나의 길이 되신 이름예수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나를 단련하신 후에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너를 자녀 삼으셨네하나님 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하나님 인자한 귀로써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