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기막힌 역설2024-03-07 16:16
작성자 Level 10

2021년 12월 12일 주일 오전 예배 (히브리서 강해 10) - 대림절 세 번째 주일 설교

 

제목기막힌 역설

본문히브리서 2:11-18

 

서론)

 

성공회 사제이자 이 시대 뛰어난 영성신학자라고 불리는 메튜 폭스가 13-14세기를 걸쳐 활동했던 영성신비가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말을 자신의 책에서 인용하였는데 촌철살인입니다.

하느님은 피조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메튜 폭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p,309.)

요한복음 2:1-11절을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보이셨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기적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의 이 기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적이라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비과학적이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언젠가 해방신학을 전공한 학자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한 글을 읽다가 참 애처롭다는 생각을 한 적이 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가나 혼인잔치를 전개해 나아갔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진짜로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항아리 여섯 개를 들고 가던 하인들이 그 안에 물을 빼고 다시 숨겨놓은 포도주를 넣었기 때문이었다.”

주석학자였던 C.K 바레트는 이런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요한복음 2:6절에 등장하는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메트레테스는 대체적으로 갤런에 해당하는 액체를 담을 수 있는 도구이자 측량 단위다.”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1“, 한국신학연구소,p,310.)

바레트의 주석을 전제한다면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9갤런 정도가 들어가는 돌 항아리가 6개라고 했는데 6개를 숫자 6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학자들이 부담스러워 합니다.

이유는 6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단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주목할 숫자는 두 세통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있었던 돌 항아리에 담겨지게 된 포도주의 양은 어림잡아 두 세통이라고 했으니 18-27갤런 정도를 말할 것입니다.

이것을 리터로 환산하면 1갤런이 3.8리터 정도가 되니 72-108리터 정도가 됩니다.

이런 환산을 할 때해방신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하인들이 숨겨 놓았던 포도주가 이렇게 많았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을뿐더러 어불성설입니다.

당시 하인은 노예라는 가장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값비싼 포도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불가능한 가설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에서 주께서 행하신 기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기적입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주께서만 하실 수 있는 표적(세메이온)이었기 때문입니다.

헌데 우리 교우들이 오늘 주목해야 하는 테마는 단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만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본문과 연관하여 추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3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아주 귀한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주님이 초대받은 이 가나의 혼인집에는 맨 처음부터 포도주가 없었던 것이 분명히 아니었을 것입니다.

포도주는 있었지만 잔치 집에 손님이 많아져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니까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고했고 그 결과 주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이렇게 뒤집어 보겠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마리아는 아들에게 이 내용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 일을 말한 것은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대단히 무례한 짓이었기 때문에 이 돌발적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추측하기로 마리아는 친척으로 추측되는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는 집에서 이런 결례가 자행될 수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에 다다르자 마리아가 아들 예수에게 이 난처함을 토로한 것입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때가 아직은 이르지 않았다는 구별성을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을 행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7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끝에 이르자 주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앞에서 언급한 엑카르트의 갈파는 정말로 적절한 선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피조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본론)

 

본문 18절을 묵상하다가 울컥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고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스코는 원래의 의미가 심각한 병을 앓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한 일체의 고난을 심각한 질병이라고 간파하셨습니다.

해서 이 심각한 질병과도 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택하신 방법이 당신이 먼저 이 질병과도 같은 고난을 몸소 당하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입니다.

이 구절이 뭉클한 이유는 주께서 고난을 당하신 의도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등의 고난을 받을 만한 분도 아니며이유도 없으셨던 주님이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렇게 하셔야만 당신이 선언하신 일체의 일들을 이루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3절을 복기해 보겠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주석이 필요한 대목이라 부연 설명을 하겠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아들인 예수님입니다.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구원 받은 지체들입니다.

이 일(거룩하게 하는 일과 거룩함을 받게 한 일)의 근원은 마땅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이 놀라운 일의 결과로 거룩하게 된 우리에게는 엄청난 복이 임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형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녀라고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49-50절을 읽어드립니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행하는 자 모두를 형제자매라고 재 정의하셨습니다.

적절한 적용이 본문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요한복음 1:12절에는 전설 같은 복음이 실려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재 강조하거니와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주님의 선언하심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지극한 은혜요감사인데 본문 14-17절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들을 통해 이루실 최고의 감동을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여러 가지 표현으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이 구절도 담임목사의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겠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아들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주목할 것이 보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혈(하이마)과 육(살크스)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혈과 육을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

혈과 육을 갖고 있는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더불어 인간은 혈과 육을 갖고 있기에 일평생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셨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시는 비하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비하는 혈과 육을 지닌 인간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절 전반절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육신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을 의미하는 살크스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깊이 성찰해야 하는 구절이 보입니다.

14절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아들이신 예수께서 혈과 육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녀이자 형제자매인 우리들을 위해 결심한 것이 바로 당신도 죽는 것이었다는 구절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주는 마귀를 멸하셨다.’

이 구절이야 말로 오늘 설교 제목처럼 기막힌 역설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께서 육신의 끝인 죽음을 선택하시자 주님은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일을 시작하셨다는 의미가 이 구절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혈육이라는 끝을 던지시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재탄생하여 구속사를 완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하여 오늘 설교의 레마를 받겠습니다.

 

※ 나의 세속적인 끝을 인정해야 하나님이 비로소 일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도착하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만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는 마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극단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미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이 두 사람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기사를 만날 때마다 통상적으로 얻는 교훈이 自己 義라는 교만과 자기부인이라는 겸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기사의 교훈을 조금은 다른 스펙트럼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11-12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의 치명적인 오점은 자기의 끝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의를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반면세리는 이렇게 토설했습니다.

누가복음 18: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이 세리의 가장 결정적인 장점은 자기의 끝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비유의 교훈을 뭐라 하셨습니까?

이어지는 누가복음 18:1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주께서 세리를 칭찬했다는 말은 비로소 주께서 세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NOT A FAN의 저자인 South Eastern Christian Church에서 교육 목사로 사역하는 카일 아이들먼 목사가 본인의 책에서 이런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책의 프롤로그를 쓰기 위해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다아래 괄호 안의 문장을 완성해 보세요.

( )때 예수님을 실재로 만났다.

몇 시간 만에 수백 개의 답 글이 올라왔다개중에는 전반적인 상황을 이야기 한 글이 더러 있었다.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때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을 때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을 때아무 데도 기대 곳이 없었을 때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등을 돌렸을 때.

그러나 대부분의 대답은 이처럼 구체적이었다.

말기 암으로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을 때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을 때중독을 이겨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이혼 서류가 날아왔을 때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인 스트립클럽까지 찾아왔을 때우울증이 참기 힘들 만큼 깊어졌을 때/ 30년 동안 청춘을 바쳐 일했던 직장에서 아무 대책 없이 쫓겨났을 때병원에서 심부전이라는 이유로 낙태를 권유 받았을 때그때 난생처음 밤새도록 기도했다지금 내 딸은 스물 세 살이다./ 가정을 되살릴 힘이나 포르노 중독을 이길 힘이 내게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을 때남편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초음파 검사로 태아의 심장 박동이 멈춘 것을 확인했을 때. (카일 아이들먼, “나의 끝예수의 시작”, 두란노,pp,16-17.)

아이들먼은 이 글들을 종합하여 축약하다가 이런 정리를 할 수 있었다고 글에 적시했습니다.

나의 끝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예수가 나의 실재가 되었다.” (위의 책,p,18.)

그래서 이 글이 담겨 있는 책의 원제가 이렇습니다.

"The end of me is the beginning of Jesus."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어떤 은혜를 목도해 볼까요?

이렇게 적용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기막힌 역설이라고 한다면 저 또한 아이들먼이 기록했던 내용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내 삶을 개척해 나갈 힘이라곤 1도 없다고 느껴졌을 때주님은 비로소 나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알기에이 은혜를 뼈저리게 느꼈기에 본문 18절을 읽을 때 눈이 충혈 되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지난 주일이요한 전도사가 교회학교 예배에서 선포한 고별 설교의 메시지 중에 전인권 씨가 불렀던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라는 노랫말이 담겨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그대여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지나 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용기를 준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코로나 19의 3년차가 이제 불과 1-2개월이 지나면 도착합니다.

더 아픈 것은 종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전인권 씨가 부른 노래의 가사말로 절대 비교할 수 없는 위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주님이 전하셨던 기막힌 역설의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 16: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오늘 본문 18절에서 또 이렇게 히브리서 저자의 입을 빌려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사랑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