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러나
본문: 히브리서 2:8-10
서론)
목회를 하면서 심각한 타격을 받을 때면 으레 펼쳐보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위로와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을 신경질적으로 싫어하는 혹자들은 이 구절마저도 바울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습니다.
삶과 신앙을 이원화시켜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개인의 유토피아만을 바라며 도피주의적인 생각을 갖게 한 아주 질 나쁜 구절이라고 공세를 늦추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이런 공격을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불쌍함을 넘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바울이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영성만을 추구하도록 선동한 자였습니까?
저는 적어도 바울을 공격하는 그들이 로마서 13-15장에 걸쳐 기록한 바울의 치열함을 읽기는 했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바울은 결코 이 땅을 도외시하고 피안의 세계만을 추구했던 이상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내세에 대한 믿음에 대해 지나치도록 강조한 이유는 이 땅에서 올바르고 치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궁극적인 動因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맹목적이거나, 광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주실 영광이 고난보다 크다고 역설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크다고 직시한 제 일의 원인은 ‘생각하는 신앙’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로마서 8:18절 서두에 기록된 ‘생각하건대’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로기조마이’는 직역하면 ‘이성적으로 계산하다’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제가 가끔 부정적인 의미로 설교 때 사용하는 ‘주판알을 튕기며 계산하는 작업’이 바로 ‘로기조마이’의 의미라고 보시면 그 이해가 빠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일까요?
대체적으로 이런 신앙 고백은 오늘 21세기에는 광신 혹은 맹신으로 공격 받기 일상입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중략)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손양원 목사가 쓰신 주님 고대가의 1절, 3절 가사입니다.
오늘 본문 해석에 접근하면서 담임목사가 풀려고 하는 내용은 적어도 종말론적인 신앙의 내용을 사수하는 자들의 면면은 광신이나 맹신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기형적 신앙이 아니라 도리어 더 치열한 말씀 안에서 투쟁하며 사는 자들이 드리는 신앙고백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 8절을 읽겠습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저는 지난 8번째 강해를 통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주후 60년대 로마에 살고 있었던 유대적인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양다리 걸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의 현 상황을 제시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이미 이루어진 상황이고, 또 하나는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임을 알려드렸습니다.
이루어진 상황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물이 복종하도록 그 권위를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은 하나님이 이미 위임하신 아들에게 만물이 복종하도록 한 그 명령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면서 대단히 단호한 선언을 선포합니다.
본문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역시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을 나누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아들에게 만물이 굴복하게 하신다는 프로젝트였습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만물이 아들의 권위와 권세에 굴복하지 않음을 본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위해 하신 사역을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신 하나님은 아직도 아들을 거부하고 있는 자들까지 포함하여 일체의 피조물들이 반드시 아들의 발아래 복종하게 할 것이며, 만물이 그를 위해 있게 할 것이며, 동시에 많은 아들들(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엎드리지 않는 자들을 포함)까지 구원의 은혜를 맛보게 하실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왜 중요하고 감동적인 것일까?
지금까지의 해석을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1) 지금은 아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시대라는 성찰입니다.
에베소서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편지할 때 남긴 유명한 구절입니다.
대체적으로 복음주의 안에 있는 신학자들의 의견으로는 에베소서의 저작 시기를 주후 60년대로 봅니다.
동시에 이 저작 연대를 전제할 때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순교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인 시기에 그가 있었던 로마나 그가 편지의 수신자들로 지목한 로마의 속주인 에베소와 같은 지역이 대단히 영적으로 피폐했던 시기였음을 강조한 셈입니다.
에베소는 특히 당시 세계 최대의 아르테미 신전이 있었던 곳이었고, 로마는 우상의 천국으로 여겨도 과장이 아닐 정도의 불신앙적인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바울이 언급한 지역들은 그 때는 이 세상의 풍조가 만연했던 시기이며 장소들은 공중의 권세가 붙들고 있었던 영적 흑암의 장소였다는 말은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한 가지 중요하게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뭐라 표현합니까?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 휘감고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했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 휘감고 있는 시기는 주후 60년이고, 장소는 로마를 비롯한 로마가 통치하던 속주들이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외연이 확장됩니다.
지난 주간 화요일에 지체들과 팀 켈러 목사의 ‘하나님을 말하다’ 5과를 나누었습니다.
5과의 제목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는가?’에 대한 담론이었습니다.
팀 켈러 목사에게 도전한 뉴욕으로 유학 온 한 지성인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피를 뿌려서 진노를 달래야 하는 심판자 하나님의 존재에 회의가 들어요. 독일에서 온 대학원생 하르트무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들은 누군가 죽어야 죄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냥 용서해 주면 안 되나요?”
또 한 명의 뉴요커는 팀 켈러에게 이렇게 반색하며 질문합니다.
“지옥에 관한 교리는 심각한 문제에요. 믿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뿐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나한테는 요.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비위를 맞춰야 하는 원시적인 신에 지나지 않아요.” (P,122.)
얼마나 그럴 듯한 질문입니까?
특히 지성으로 무장한 자들이라면 한 번 쯤 도전할 만한 공격입니다.
바로 지금은 이런 질문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시대입니다.
바울은 이런 시대를 공중 권세 잡은 자가 휘감은 시대라고 말했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 통치하는 시대라고 정의했습니다.
본문의 저자인 히브리서 저자는 만물이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시대라고 정의했습니다.
팀 켈러는 이런 불신앙의 맥을 인간의 온전함 혹은 완전함으로 무장한 하나님 무시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표현의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를 저자들은 공히 ‘바로 지금’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도전에 대해서 팀 켈러는 여러 가지 방어 기제로 변론하지 않고 기막힌 촌철살인으로 방어합니다.
“근대의 정신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 책임을 인간에게 넘겨주었다. 물리적인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나머지 이제는 형이상학적인 세계도 뜯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p,128.)
앞에서 팀 켈러에게 도전한 뉴욕의 젊은 지성들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옥에 보내면 안 되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몰아 세웠습니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다른 존재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 신은 숨이 막히게 하는 신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인간은 그런 류의 중재 없이도 너끈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발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맹점이 무엇입니까?
그러려면 인간은 어느 모로 보다 완벽해야 합니다.
인간이 완벽합니까?
인간의 온전함, 인간의 완전함을 내세우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자, 교만의 극치입니다.
인간은 도리어 모든 악을 동원할 수 있는 죄에 길들여져 있는 악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저질러 온 곳은 죄의 역사로 설명될 정도입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신뢰합니까?
하나님은 이런 이유로 아들을 보내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던 크로아티아 신학자인 미로슬라프 볼프의 글을 팀 켈러가 이렇게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불의와 거짓에 분노하지 않고 폭력을 영원히 끝장 내지 않는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예배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p,131.)
왜 지금, 아들이신 예수께 사람들이 굴복하지 않을까?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잘 살아낼 수 있는 존재라는 무모한 확신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더 완벽한 완전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이 이런 시대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앞으로 만물로 하여금 아들에게 굴복하게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8절은 원어 성경에 보면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접속사는 반의 접속사 ‘데’ 즉 ‘그러나’입니다.
이 접속사를 잘 이용하여 번역한 번역본이 표준 새 번역 성경입니다.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속 깊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본문 8절의 ‘그러나’를 두 개의 ‘그러나’로 외연을 확장시켜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적 승리의 내용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정반합의 표현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정: 하나님께서 만물이 아들에게 복종할 권세를 주었다.
반: 그러나 만물이 아들에게 모두 복종하지 않고 있다.
합: 그러나 내가 반드시 아들에게 모든 만물이 굴복하게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의 무기를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실로의 제사장으로 있었던 엘리는 무능하고 영적으로 전혀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던 무지의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의 무능함과 그의 아들들의 죄를 질타하기 위해 하나님은 블레셋을 드셨고, 블레셋과의 아벡 전투에서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전쟁에서 사망하고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블레셋은 노획한 법궤를 보란 듯이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전 곁에 두었습니다.
사무엘상 5:2-3절을 읽어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곁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는 ‘옆에’, ‘사이에’, ‘근처에’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는 부사입니다.
그렇다면 블레셋 사람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본인들이 섬기는 다곤 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신을 포획했다고 자부했기에 다곤의 신상 밑에 두었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경악할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어지는 사무엘상 5:3-4절을 읽겠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다곤의 신당이 있는 아스돗 신전에 이틀에 걸쳐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다곤이 만신창이가 된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독한 종기까지 난 두려움에 떤 아스돗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로 옮기게 됩니다.
가드로 법궤가 옮겨지자 이번에는 가드가 희생타가 됩니다.
독종으로 가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자 가드 사람들이 법궤를 에그론으로 보내게 됩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겁에 질려 거의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하는 반응을 보이자 결국 블레셋의 다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모여 법궤를 이스라엘의 땅인 벧세메스로 보내게 되었음을 사무엘상 역사서 기자는 보고합니다.
사무엘상 6:1-2절을 소개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이 구절을 훑어보면 통쾌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법궤를 탈취하면 상황이 종료될 줄 알았던 블레셋 사람들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합니다.
그 항복의 결과물이 통쾌하지 않습니까?
‘그것(법궤)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방자했던 블레셋을 결국은 굴복시키지 않으셨습니까?
제 3 이사야의 일성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이사야 66:1-2절 전반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라틴어 수업으로 유명세를 탄 한동일 교수가 그의 두 번째 책인 ‘믿는 인간에 대하여’에서 대단히 중요한 통찰을 던집니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p,242)
시대가 악할수록 인간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필요로 하실 것이라는 무모한 착각 말입니다.
그래서 아쉬운 것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강변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지금은 인간이 교만할 때가 아닙니다.
도리어 숨죽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입니다.
지금,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좋게 거절하며 내 팽개치는 자들이 득세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당신의 아들에게 모든 만물들이 굴복하게 할 날을 계획하시고 아들을 이 땅에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그 날은 주님이 이기시는 날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이 무엇일까요?
‘그러나’로 역전하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지금은 처음 오신 아들이 아닌 두 번째 오실 아들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 2021년의 대강절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되고 있는 2021년의 12월입니다.
우리는 더 더욱 ‘그러나’로 다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굳건히 붙잡습니다.
다시 로마서 8: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