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8일 주일 오전 예배 (히브리서 강해 8) 제목: 그래,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2:5-10 서론) 기도처에서 다니엘 기도회의 강사로 섬긴 인기 가수로 알려진 이수영집사(우리들 교회)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한 계부의 폭력, 어머니 역시 교통사고로 인한 별세, 인기가 한참이던 때, 친족에 의한 사기 사건으로 인해 당했던 경제적 고통 등등을 경험하면서 자살을 생각하며 산 인생을 절절히 토로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녀가 다시 회복된 메시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종합하면 이수영 집사의 간증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하나님을 너무 많이 원망했는데 그때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셨습니다. 계부의 폭력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잔악한 행태로 다가와 죽으려고 했던 그 때도 주님은 내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경제적인 사기를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졌을 때도 하나님은 제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옳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을 수없이 놓으려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더 강력하게 나의 손을 붙드셨습니다.” 그녀의 간증을 듣다가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녀를 끝까지 떠나지 않으신 주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기도 하다는 동변상련의 은혜, 뭐 그런 감정이입이 되어 울컥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녀를 떠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떠나지 않으실까요? 오늘 이 질문의 답을 대강절 첫 번째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도 쉽지 않은 텍스트이기는 하지만 저는 우리 교우들의 저력을 믿기에 최선을 다하는 설교 사역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 5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이 구절을 개역개정판 번역으로 읽으려니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실 것 같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이 구원의 일을 천사들의 손에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이해가 분명해지셨지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선포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죄에서 건지신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맡기신 유일한 대상의 이름을 히브리서 저자는 드디어 본문에서 처음으로 밝힙니다. 본문 9절을 읽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처음으로 히브리서 저자의 입에서 나온 구원을 이루신 주체는 천사가 아니라 그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9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에게 임했던 두 가지의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하기 위해 역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도움을 받겠습니다. 메시지 9절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어져서’ 죽음을 경험하시고, 천사보다 더 높은 곳에 앉으셔서 ‘에덴의 새벽빛으로 빛나는’ 영광의 관을 쓰신 예수입니다.” 분명히 저자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분에게 경험되어졌던 두 가지를 열거합니다. ① 죽음을 경험하게 하심 ② 영광의 관을 쓰게 하심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우리가 잘 쓰는 기독교적인 언어로 다시 재 바꾸어 설명하면 고난을 받아 십자가를 지신 것과 그 이후 다시 사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승천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를 크로스웨이 성경연구 교재 집필자인 헤리 웬트 목사는 조금 어려운 표현이지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와 승귀(昇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 이해를 통해 살펴야 할 내용에 도달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입니다. 본문 6-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히브리서 저자가 그 유명한 시편 8편을 인용합니다.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의 ‘어디’는 시편 8편입니다. 본문 6-8절 전반절은 시편 8편의 인용입니다. 특히 시편 8:4-5절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그렇다면 본문과 시편 8편에 등장하는 두 단어를 해석해야 합니다. 즉 ‘사람’과 ‘인자’입니다. 시편 8편에 기록된 사람과 인자는 말 그대로 저와 여러분 같은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시편 8편의 저자는 인간의 위상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 셈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사람과 인자는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람과 인자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라고까지 인정하실 정도로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시편 8편의 저자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6-8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집니다. 본문의 인자, 사람은 시인이 말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를 왜 사람, 그리고 인자로 히브리서 저자가 표현했을까요? 이 질문의 대답은 빌립보서 2:6-8절의 말씀으로 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신 것만 아니라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으신 예수님의 사건을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라고 정의합니다. 본문을 주석한 런던 바이블 칼리지의 D. 거쓰리 교수가 해석한 글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8편의 사용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시편은 단 한 번도 메시아적으로 간주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의 문맥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상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인자’라는 호칭 사용에 의해 암시된다. 창조 시에 사람은 땅을 지배할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로는 그 복종하게 하는 권위가 모자랐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오직 이상적인 사람에게서 성취된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D, 거쓰리, 히브리서-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15“, CLC, pp,123-124) 분명히 시편 8편의 저자는 시편 8편에서 존귀한 존재로 사람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음을 거쓰리 교수가 시사한 것입니다. 거쓰리 교수의 해석에 저 역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왜요? 본문 9절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즉 비하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는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심 즉 비하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이 경험하게 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이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이셨기 때문에 천사보다 조금 못한 모습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비하하셨기에 우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로 구원받음입니다. 지난 주일에 선포한 그대로 내 인생 일대에 가장 위대한 감격의 사건인 구원 받음이라는 은혜를 부여 받게 된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입니다. 본문 8-9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낮아지심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막힌 반전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사람으로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신 아들 예수께 모든 만물이 복종하게 하셨다고 저자는 역설합니다. 더불어 아들이 이것을 이룸으로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일하셨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첫째는 아들에게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신 일.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둘째는 만물이 아들의 발아래 엎드려 복종하게 하신 것. 그런데 8절의 뉘앙스를 살펴보면 첫 번째의 것은 성취되었지만 두 번째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엿보게 해 줍니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틀로 규정한 ‘지금’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만물이 그리스도 아래 복종하는 현실을 ‘아직’ 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식 체계로 볼 때 그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조재천, “히브리서 강해”, 홍성사, pp,69-70) 저 역시 조 교수의 갈파에 동의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미래를 통찰하는 동시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와 영광으로 높임을 받으시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상당수의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있는 동시성이 현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을 압니다. 주님이 이기실 것을 말입니다. 이것을 믿었던 존 스토트도 그래서 이렇게 선포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 위로 높임을 받으셨고, 만물은 장차 그분의 발아래 놓일 것이다. 그분의 모든 원수들이 아직은 패배를 자인하거나 그분께 투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이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고 죽은 자들이 일어날 때, 이렇게 하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4-26절을 이루시는 일을.”(존 스토트, “내가 사랑한 시편”, 포이에마, p,23.) 고린도전서 15:24-26절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은혜를 접하고 보니 제게 다가온 은혜의 감동은 갑절이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 예수님은 당신을 비하하셨기에 승귀의 영광을 이룰 수 있었다는 감동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신경을 한 번 훑어보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믿음의 내용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를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음의 내용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귀하심을 고백하는 텍스트입니다. 너무 놀라운 구조입니다. 무엇이 보이셨습니까? 비하했기에 승귀가 가능했다는 신앙의 공식이 보입니다. 기독교의 공식은 어떤 경우에도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공식에서 벗어나면 이단이요, 반기독교입니다. 낮아져야 높아집니다. 섬기면 섬김을 받게 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다시 이수영 집사의 간증으로 돌아갑니다. 설교의 서두에 질문함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왜 주님은 이수영 집사를 떠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떠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비하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안아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잠시이기는 하지만 주님이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질 존재인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셔서 저에게 오셨고, 여러분에게 오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사랑을 주시기 위해 오신 그 성육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내일부터 대림절 특별 21일 기도회가 열립니다. 저녁 기도회에 집중하는 것은 의무적인 요구 사항이 아니라 성도가 마땅히 나를 위해 비하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러러 나옴의 결과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독자들 중 상당수가 주님의 발아래 완전히 무릎을 꿇지 않는 불신앙인들이 있었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암시합니다. 이번 대림절 기도회를 통하여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가 베풀어두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