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히브리서 2:1-4
서론)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수업 시간 마지막 강의는 목회 리더가 가져야 할 10계명을 나눕니다.
10가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Lordship(주님의 주님 되심)’에서 흔들리지 말라.
2. 강대상에서 목숨 걸고 세 가지를 균형 있게 전해라
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균형적인 신학을 갖고 성도들에게 선포하라. 즉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의 긴장감에서 살아 내야 하는 삶을 선포하라.
② 오순절적인(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일하심을 선포하라
③ 캐리그마(예수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 승천, 다시 오심)의 신학에서 타협하지 말라
3. 끊임없이 3C를 질문하고 피드백 하라.
① calling(소명 확인) ② character(성격 훈련) ③ capability(능력 개발)
4. 맘몬에 결코 넘어지지 말라
5. 정치적 편향에 흔들리지 말라
6. 자기 관리에 목을 걸어라
7. 쓸데없는 모임에 나가지 말라
8. 성경중심적인 성경 연구의 결과를 상황중심적인 목회에 적용함으로 보폭을 넓혀라
9. ‘Vor Gott Ohne Gott’(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학적 고집으로 목양의 현장을 사수하라
10. 1일 100페이지 독서를 생활화하라
이 강의를 들은 한 학생이 제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교수님, 한 학기를 마감하는 오늘 종강 수업 강의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음 학기에 졸업을 하게 되는데 현장에 나가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던 10가지의 내용을 끝까지 갖고 사역하겠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론이 아닌 목회자의 삶을 강의를 통해 들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저는 이 학생의 초심이 목회 현장에서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가 주는 동역자가 되어 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듣고 사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난을 듣고 자란 아이는 비난하는 자로 성장하기 십상이고, 칭찬을 듣고 자란 아이는 칭찬하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듣고 사십니까?
본론)
본문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대단히 민감한 경종을 주었던 이 메시지는 분위기 상 조금 무겁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물며 최근에 우리가 받은 이토록 장엄한 구원의 메시지를 어떻게 소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의 메시지는 가장 먼저 주님이 직접 전해주셨고 그 다음 주님께 들은 이들이 우리들에게 정확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메시지 성경 히 2:3)
표면적인 은혜를 적용한다면 구원의 메시지를 소홀히 여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경종입니다.
물론입니다.
이 메시지는 다음 주일에 조금 더 세밀하게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조금은 다른 스펙트럼의 교훈을 찾아볼까 합니다.
본문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 준 제일의 주체가 누구라고 명시합니까?
‘주’라고 분명히 명시합니다.
저는 ‘큐리오스’ 즉 ‘주’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울 서신을 강해하면서 여러 차례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히브리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 설교문이 작성된 시기를 주후 60년대임을 밝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의 독자들은 로마에 살고 있었던 유대의 혈통을 갖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임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장소와 시대적 정황은 그 악명 높았던 네로의 재위 기간(주후 54년-68년)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함도 역설한 바 있습니다.
다른 로마의 황제 때도 그랬지만 네로의 통치 기간 로마는 당연하고 로마에 속주로 있었던 일체의 피식민지에서 ‘큐리오스’ 즉 ‘주’라는 단어는 로마의 황제 외에는 붙일 수 없는 금기용어였습니다.
헌데 오늘 본문 3절에서 저자는 너무 담대하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의 호칭을 ‘주’라고 호칭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도를 선포하셨고 알려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주이신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들려주신 구원의 도와 그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문에서 제시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본문에서 21세기 독자들인 우리에게도 이 내용을 대신 알려줍니다.
1) 복음입니다.
본문 1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저자는 말합니다.
들은 것이라고.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3절 후반절을 곱씹겠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먼저는 주님이 말씀하셨고 후에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들은 자들이 주께 들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라는 이 도식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들은 자들이 누구일까?
말 할 것도 없이 제 1제자군, 2제자군 전체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히브리서 저자에게 들려준 것은 무엇일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의 갈파가 제 갈파이기에 그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치유나 윤리나 위로가 아닌 메시지 전체, 신약성경 전체가 말하는 특정 메시지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중략)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복 있는 사람, p,21.)
흔히들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제 삼자가 행했을 때 ‘사이다와 같은 발언’이라고 표현하면서 대리 만족을 느낍니다.
저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글을 사이다 정도가 아니라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이 있는 감동의 메시지로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 21세기의 한국교회와 신자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을 가볍게 여기도록 부추기는 일련의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하고 또 심지어 압박까지 한다는 점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복음을 가볍게 여기도록 부화뇌동하는 죄질이 아주 나쁜 행태를 6가지로 선명하게 제시합니다. (위의 책, pp,16-20)
① 복음의 능력을 단순히 소원 성취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지적합니다.
전체의 성경은 무시하고 좋은 성경구절만을 붙들고 행복을 느끼며 그리스도인이라고 굳게 믿는 착각입니다.
② 완벽한 심리학적인 방식을 복음으로 둔갑시키는 행위입니다.
③ 복음을 위로와 위안의 행위로 대치하려는 대단히 위험한 행태입니다.
④ 복음을 좋은 길로 인도(引導)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행태입니다.
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신비적인 그 무언가로 복음을 전락시키는 행태입니다.
⑥ 복음을 단지 이 땅에서의 선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준 도구로 전락시킨 예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서슬이 시퍼렇게 복음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체의 사람들을 향하여 세 가지를 질문합니다.
Ⓐ 여러분의 삶의 체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중심과 핵심을 차지하고 계십니까?
Ⓑ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까?
Ⓒ 당신은 이생과 영원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천착한 것은 주 예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1절에서 ‘들은 것’을 언급했습니다.
적어도 제 1,2 제자군들을 통해서 전언 받은 것의 내용을 분명히 복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전해들은 것은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아마도 히브리서 저자는 바울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출신 지성적 영성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바울을 스승으로 여겼던 저자는 바울의 어록들을 가슴에 담았을 것입니다.
천사를 숭배하는 가당치 않은 맹목적인 신앙으로 무장함과 동시에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독자군에게 ‘들은 것’에 유념하라고 했을 때 그 들은 것은 마틴 로이드 존스가 강력하게 선포한 복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2절의 복음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2:20절의 복음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6:17절의 강력한 복음이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로마서 1:16-17절의 사자후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복음에 목을 걸었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상당수 많은 세인 교회의 지체들 중에도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한 6가지로 신앙을 희석시키고 싶어 하는 신자들이 있을 겁니다.
“이 정도면 내게는 충분해!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이 정도에서 머물렀으면 좋겠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 나아가면 부담스러워! 내 내면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끔 복만 주고 또 필요를 요청할 때 공급만 해 주고 내 삶을 간섭하지는 말아.”
마치 마크 뷰캐넌의 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바로 안전한 복음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돌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 생활 속으로 돌진해 들어오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호출하실 때까지 천천히 배회하며 멀찍이 안전하게 거리를 유지해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후원하면서 멀리서 지켜보시기를 원한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 p,121.)
특히 코로나 2년의 시기는 이런 신앙 아닌 신앙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표면으로 부상한 시기였습니다.
그 전에는 수면 밑에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 너무 대세이다 보니 아무런 느낌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괜찮다고 나름 정의하며 정면 무대로 올라선 자들이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코로나 2년은 이런 자들의 옥석을 가려주는 기막힌 효자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들은 것 즉 복음을 직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까?
2) 들은 복음을 복기해야 합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여기에 번역된 ‘유념하다’는 헬라어 ‘프로세코’의 해석입니다.
헬라어 원어의 뜻을 직역하면 ‘차렷하다’입니다.
영어성경 NRSV는 이렇게 2:1절을 번역했습니다.
Therefore we must pay greater attention to what we have heard so that we do not drift away from it.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들은 것에 대하여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떠내려가지 않게 됩니다.”
정신을 더 바짝 차리는 것을 저는 복기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둑의 고수들은 승자든 패자든 자신이 경기에서 바둑알을 놓았던 지점을 거꾸로 뒤집어 본다고 합니다.
그래야 승리의 원인, 패배의 원인을 알고 또 다른 승리의 요인으로 삼고 패배의 원인으로 삼아 다음 대국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이럴 때 쓰는 단어가 바로 복기(復碁)입니다.
다시 곱씹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유럽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빌립보 성으로 들어가서 사역을 하는데 그곳에서 빌립보 교회를 태동하게 한 여인을 만납니다.
자주색 옷 장사 루디아입니다.
사도행전 16: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다.”입니다.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다’고 번역된 동사가 바로 앞에 언급한 ‘프로세코’입니다.
이 구절은 표준 새 번역에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렇습니다.
루디아는 복음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즉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차렷하는 자세로 들은 것입니다.
유념한다는 것은 그래서 복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은 계속 들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계속해서 차렷 자세로 듣고 또 들어야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세인교회 강단에 올라올 때 종이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세인 교회 강단이 복음으로 물들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어떤 것도 자랑되지 않게 하옵소서! 세인 교회 강단에서 예수 플러스알파가 전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종도 준비하고 선포한 말씀대로 살게 하시고, 세인 지체들도 복음으로 함몰되어 복음대로 살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할 이 복음은 한 번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선포되고 또 들어야 하며 프레스코 해야 하는 생명수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故 옥한흠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아주 오래 전에 읽었는데 그 때 제가 밑줄을 그어놓은 대목이 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교회 밖에 보다 교회 안에 더 많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할 사람이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 굳고 교만한 마음이 녹아져야 할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로마 교회 안에도 있었고, 또한 한국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옥한흠,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로마서 1“, 국제제자훈련원, pp,38-39.)
그렇습니다.
로마서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명목적 신자들에게 다시 선포한 복음인 것처럼, 복음도 우리 세인 교회도 강단에서 날마다 들려져야 하며 복기되어야 합니다.
들은 복음을 복기하는 자가 승리합니다.
세속의 풍파에 흔들려 표류하며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속빈 자루는 곧게 설 수 없다.’ 할 때의 자루는 당연히 헝겊 따위로 만든 크고 길쭉한 주머니를 의미한다. 자루는 스스로는 힘이 없어 무엇인가로 채워지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 아마도 이 속담은 먹는 것과 관련하여 굶주린 사람은 체면 치레 하고 살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한희철,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 봐야 한다.”, 꽃자리, p,332.)
한희철 목사의 글을 읽다가 묘한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영혼의 빈 자루는 채울 수 있도록 무언가를 준비해 놓았는가!
이 성찰을 날마다 복기해 보십시다.
혹시 나의 영혼의 자루속이 비워져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심령의 자루가 쓰러지지 않도록 채워놓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복음입니다.
복음, 복음에 유념해야 합니다.
명심해야 할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선포하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 아름다운 영광의 주를 보라 보좌의 앉으신 그 어린양 예수
다 무릎 꿇고서 주 경배하리라
선포하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주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영원 영원토록 받아주옵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찌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