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0-14
서론)
그림 하나 보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시스티나의 성모를 잠시 감상하겠습니다.
(그림 설명)
이 그림을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수업’에서 만났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설명한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그림 맨 아래에 있는 아기 천사들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천사의 대표적인 형상으로 묘사됩니다. 라파엘로가 이 그림에서 천사들을 이와 같은 모습으로 그린 이후, 천사의 모습은 이렇게 정형화되어 표현되어 왔습니다. (중략) 간혹 사람들이 이 천사들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큐피트와 혼동하지만 이들은 사랑의 정령이 아닙니다. 더구나 성화에서는 이 천사들을 케루빔(cherubim)이라고 부르는데, 아기 천사들의 모습은 다소 근엄한 아기 예수와 경외감에 사로잡힌 성모의 표정으로 무거워진 그림의 분위기에 재치를 더함으로써 균형을 잡아 주고 있습니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흐름 출판,pp,76-77)
라파엘로는 그의 천재적인 화가로서의 자질을 동원하여 가장 권위적이었던 교황 식스투스 1세가 모자를 벗은 모습으로 더불어 당대 성녀로 추앙받던 바바라 사이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그려냈습니다.
교황이 모자를 벗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추앙 받던 여인도 주님 밑에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이 배열은 그의 멋진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주님은 중심에 계셔야 함을 상징하기에 말입니다.
한 가지 아픈 마음을 갖고 보아야 하는 컷은 아기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우리들이야 성모에 대한 흠모가 믿음의 예외적 조항이기에 눈여겨 볼 이유는 없지만, 아기 예수의 초상은 주목해야 합니다.
왠지 모르게 어둡고, 불안한 모습의 아기 예수님, 라파엘로는 앞으로 올 예수님의 운명을 담아낸 그림임에 틀림없습니다.
반전도 있습니다.
그림 하단에 있는 아기 천사들의 초상입니다.
케루빔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4)
바로 이 그룹입니다.
그림에 나타난 그룹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무서운 수호천사와 같은 그림이 아니라 너무 익살스럽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지 않습니까?
아기 예수님의 어둡고 불안한 초상과는 달리 아기 천사들은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귀여운 초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표정의 아기 천사들을 통해 이 그림의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라파엘로 산치오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가톨릭적인 신앙의 체계 안에서 그가 천사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교회사의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루시퍼와 같은 타락한 천사의 의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천사라는 존재는 이렇게 호의적인 대상으로 묘사됩니다.
아마도 이런 호의적인 천사에 대한 지론들이 쿰란 공동체를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 공동체(골로새 교회)에 천사숭배주의로 확장된 기초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말로 천사는 숭배의 대상이 될 만한 존재인가요?
이어지는 히브리서 5번째 강해를 통해 살펴보십시다.
본론)
본문 10-12절을 읽겠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이자 청중인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다시 또 그들에게 익숙한 구약성경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시편 102:25-26절입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구약성경을 인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102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땅의 기초를 놓으신 분, 하늘도 지으신 분, 천지는 반드시 없어질 날이 오겠지만 오직 영원하신 분, 피조 된 일체의 것들은 한시적인 것들이기에 낡아 없어지는 날이 오겠지만 오직 유일하게 영존하시고 무궁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말씀이 시편 102:25-26절입니다.
결국 이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자, 그들을 선민으로 인 쳐 주신 자존심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10-12절에서 이 권위를 재확인합니다.10-12절에 아들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앞 뒤 문맥을 감안할 때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 권위를 부여받은 존재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100%입니다.
당연히 천사들에게는 이런 권위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13-14절을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이 구절에서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가 몰려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천사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13-14절에서 못 박고 있습니다.
천사의 의무입니다.
① 아들을 섬기는 영이다.
②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상속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다.
조금만 더 깊이 13-14절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원래 13-14절도 히브리서 저자의 독창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구약 성서 시편 110:1절을 따온 메시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편 110편은 제왕시입니다.
왕으로 등극하는 다윗과 그의 자손들의 즉위 때 부르는 노래시라는 말입니다.
시편 110:1절에 기록된 ‘너’는 다윗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13-14절에 인용된 ‘너’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몇 가지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 원수들을 발밑에 굴복하게 하는 능력
Ⓑ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신 능력
Ⓒ 모든 천사들로 하여금 섬김을 받게 하신 능력
이런 엄청난 권위와 능력을 아들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은 오늘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상대적인 존재인 천사에 대하여 부가의문문의 형식으로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느 때에 천사 중에 누구에게∼아니냐?”
무슨 말입니까?
천사에게는 아들에게 부어준 권세와 능력 중에 단 하나도 부여해 준 적이 없다는 쐐기를 박는 말씀을 본문에서 제시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 5번째 강해의 레마를 이상의 해석을 통해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너무 식상하셨습니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또 말하니까 별로 감동이 되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다시 강조해야겠습니다.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진보주의 신학자이기에 역사적 예수 알리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마커스 보그가 보수적인 복음주의권에서 주장하는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일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나는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는 가능성도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런 주장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마커스 보그, 톰 라이트,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연구소, p,227)
보그의 이런 주장은 그의 신학적인 기초가 예수는 사람들(제자군)에 의해 메시아로 만들어졌고, 우상화되어진 인물이라고 평가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부활 이후에 충분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조각된 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는 갈릴리 지역에서 빈민들과 함께 거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했던 역사적 인물이라는 강력한 사상을 갖고 있는 자가 마커스 보그입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장점은 예수의 삶에 천착하라는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예수가 살았던 낮은 자의 모습을 따르며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진짜 예수 믿는 자들이라는 그의 주장은 진보적인 관점에서 틀림이 없는 사실이며, 반론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동의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삶을 본받고 따르라는 점 말입니다.
보그의 이론에 동의할 수 없는 당위를 그가 말한 단어들로 정의하면 대단히 설득력이 있겠다 싶어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어린 양, 참 빛, 세상의 빛, 생명의 빵, 길, 위대한 대제사장, 희생제물, 하나님의 종, 선한 목자, 참 포도나무 등 예수는 그의 전통 속에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가장 높은 용어들로 표현되었다.”(위의 책,p,230)
보그는 이런 단어는 다분히 그를 따르는 자들이 구약의 용어와 종교적인 어휘들을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극찬에 지나지 않는 일로 평가절하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요?
성경적인 내증은 너무 많아 지면이나 시간관계상 거론조차 어렵습니다.
오늘 제가 일설하려는 것은 내 신앙의 노정 중에 아들이 하나님이셨다는 주장이 이론이 아니라 내 삶속에서 체화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30년이 넘는 목양의 노정 중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처녀 목회지였던 밀양 대곡교회를 제외하고 파주 사역, 진해 사역, 그리고 제천에서의 사역 중에 목회의 현장이 열악함으로 인해 닥쳐온 위기는 목사인 제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목회하는 동역자들이 지천인데 그런 일로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제게는 호사스러운 넋두리라고 생각했지,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은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 목회의 연한 중에 저를 가장 많이 힘들게 했던 것은 목양의 본질을 흔드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교회답지 않게 만드는 일, 성도를 성도답지 않도록 만드는 일, 목사를 목사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과 맞서는 사역에서 모든 정력을 소비하고 더 이상 일어날 힘이 소진되었을 때, 목사의 로브를 벗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회자되었던 명언처럼 ‘이러려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닌데’의 자괴감으로 인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마치 욥처럼 하나님께 선전포고를 할 요량으로 대들 때마다 주께서 제게 해 주셨던 말은 공교롭게도 동일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너를 위해 죽기까지 했다. 내가 너를 구원한 하나님인데 나 하나만이면 안 되겠니?”
톰 라이트는 앞에서 주장한 마커스 보그의 설을 이렇게 반론합니다.
“예수의 메시아 직분과 그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그의 소명에 관해 핵심적인 말씀들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중심적인 상징적 행동들의 중심들은 그 말씀들이 묶여질 경우에만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위의 책,p,259)
제가 톰 라이트의 의견에 동의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분의 말씀들이 묶여질 때만 해석 가능이라는 진단은 최고의 성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들이실 때만 내 삶의 퍼즐이 맞추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 비본질적인 다른 어떤 것으로는 결코 내 삶의 퍼즐이 맞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천 세인 교회의 태동도 간증입니다.
만에 하나, 제가 비본질적인 내용을 이루기 위해 목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악함으로 계산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여러 가지의 목회적인 스킬을 강대상에 동원하여 주장했다면 세인 공동체는 탄생조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선포할 때마다 여러 차례로 성경적인 내증으로 인용했던 가이사랴 빌립보의 기사를 다시 들춰보십시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
헤롯 빌립이 자신의 충성심을 로마의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계획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는 세속적인 가치가 총 결합 되어진 부의 상징체였고, 권력의 중심부였고. 황제의 위상에 맞게 높은 해발에 위치한 도시 공동체였습니다.
이곳을 방문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을 물으시면서 확인하셨습니다.
‘인자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의 세속적 가치에 주눅 들지 않겠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어림잡아 점수를 많이 주어도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에 하나 정도가 가이사랴 빌립보가 인정하는 예수의 정체성입니다.
다시 말해 세속의 여론이었습니다.
이 답변을 받으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을 받은 제자 중에 베드로가 답변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아들이 영존하시는 분임을 선언했습니다.
아들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던 하나님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아들의 발에 엎드리는 존재가 천사요 그룹임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 아들을 위해 섬기도록 부름 받은 존재가 천사임을 적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섬기도록 미션을 부여 받은 존재가 바로 천사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천사는 누구일까요?
성찰하다가 마이클 호튼의 인용으로 21세기 천사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정책과 마케팅 전략과 실용주의와 상업주의적 외침과 심리 치료나 추상적인 종교 체험과 권력에 대한 투기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오직 우리의 지고한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 오직 우리의 지고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칭의와 성화에 의존해야 한다. 오직 우리의 지고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된 뜻만이 교회의 선교와 질서를 인도하고 이끌어가야 한다.” (마이클 호튼,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교핵심”, 부흥과 개혁사, p,94.)
그렇습니다.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더 추구되면 그것은 천사숭배와 같습니다.
정책, 마케팅 전략, 실용주의, 상업주의적 외침, 심리 치료, 추상적인 종교 체험, 그리고 권력에 대한 투기라는 비 본질이 득세하면 이것이 천사숭배와 다름없습니다.
바울은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다시 이 즈음에 NOT A FAN의 저자 카일 아이들먼의 글을 복기하겠습니다.
“오래 전 외국에서 사역하다가 미국중서부에 있는 출가한 딸과 여생을 보내기 위해 귀국한 나이 지긋한 선교사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선교사는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딸의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첫날 밤 버스는 라스베이거스에 정차했다. 선교사는 30년이 넘게 외국에 나가 있었고, 특히 라스베이거스는 초행이었다. 일단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거리로 산책을 나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도 거리를 대낮처럼 훤했다. 시끌벅적한 음악소리와 휘황찬란한 호텔들, 심지어 세상의 명차는 다 집합시킨 자동차 쇼, 카지노에서 벌어지는 도박과 슬롯머신에서 동전이 쏟아지는 소리, 유면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하는 쇼, 온갖 진귀한 술과 음식을 파는 식당들, 선교사는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온 선교사는 불을 켜지 않고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고요한 가운데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라스베이거스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래 세상보다 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오늘 당신보다 더 좋은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팬인가, 제자인가”, 두란노,pp,182-183.)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왜 그분 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까?
요한서신의 저자가 말한 이유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9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 오늘 눈물로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 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린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