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호세아 10:12-15
제목: 갈아야 할 적기입니다.
서론)
오늘은 504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히브리서 강해를 한 주 멈추고 절기 설교를 통해 교우들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제 국민일보 미션 란에 의미 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회를 움직이는 ‘큰 목회자’가 안 보인다.”라는 제하의 기사입니다.
기사의 내용을 읽어보니 지금 10, 20대를 ‘corona lost 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데 이 세대들에게 기자는 ’welcome 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하다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그 예로 BTS를 들었습니다.
BTS가 지난 9월 20일에 유엔 총회에 문재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참석하여 기후 위기에 관한 연설을 했는데 당시 멤버들은 기후 위기에 대한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백신 접종의 중요성을 알리는 코멘트를 했습니다.
이후 BTS의 팬 아미들을 중심으로 ‘#ARMYvaccinatedtoo’ 즉 아미도 백신을 맞았다는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져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이 운동을 제시하면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얼마나 긍정적인 ‘welcome’ 세대인지를 기자는 증명해 보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말 한 마디로 움직일 수 있는 BTS를 시대의 ‘큰 사람’으로 부각한 셈입니다.
이 기사를 내보낸 기자는 자기의 글로 아마도 반대급부를 여지없이 고발하고 싶었음이 분명합니다.
기사의 제목 그대로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이는 큰 목회자가 보이지 않는 참담함을 수면 위로 떠올리고 싶었을 것이고, 또 이로 인하여 한국교회를 각성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기자의 글을 읽다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기자의 말에 동의를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한 가지에 천착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이는 작은 목회자는 보이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섣불리 단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517년. 독일에 살고 있었던 루터는 아주 조그마한 도시였던 비텐베르그에서 가톨릭 사제로 활동하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수도자였습니다.
그런 작은 자가 종교개혁의 선봉장이 되었는데 그가 일어서기까지 그를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작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작은 자에서 큰 자로 위치를 바꾸게 된 것은 사제로서의 그의 정신이 비본질이 아닌 성경적인 본질에 천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를 루터 되게 한 영적인 기초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호세아 예언서로 택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통해 나누겠지만 504주년 종교개혁주일에 이 사회를 움직일 만한 큰 사람이 1도 보이지 않는 오늘, 세인 공동체가 곱씹어야 할 말씀의 당위를 찾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본론)
본문 이해를 위해 호세아 예언서의 시대적인 정황을 잠시 살피겠습니다.
호세아는 주전 750-725년 사이에 북쪽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이 시기의 북 왕국은 여로보암 2세가 치리하던 때였습니다.
김필회 교수의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북 왕국은 여로보암 2세(주전 787-747)의 통치 아래서 유래가 없는 정치적, 경제적 번영을 경험했다. 여로보암 2세는 영토를 넓혀서 북쪽과 동쪽으로는 이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국경을 회복했던 것 같다. 동시에 정치적인 안정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대외 교역을 확대하면서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다.”(김필회, “호세아 주석서”, 프리칭 아카데미, p,16.)
부연한다면 여로보암 2세 때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인 복이 넘쳐났던 반면에, 바로 이때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이 가시권 안에 들어온 때라는 역설에 민감해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가 왕좌에서 물러난 시기가 주전 747년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것처럼 북 왕국이 멸망한 연대가 주전 722년입니다.
이후 왕으로 등극한 스가랴를 비롯하여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그리고 마지막 왕이었던 호세아까지 무려 6명의 왕이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한 것으로 보아 여로보암 2세가 퇴위한 이후 얼마나 북 왕국이 난장판 나라가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단 기간 내에 북쪽 이스라엘이 무너졌을까요?
사실, 멸망의 기운은 아이러니하게도 여로보암 2세 때부터 충만했습니다.
본문으로 제시한 호세아 10장 전체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이스라엘이 가장 열매를 많이 맺고 있었던 여로보암 2세 때, 종교성이 있었던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부를 기초로 수많은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주상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제임스 림버그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제단과 기둥(주상)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그랬다. 새로운 예배 장소를 건축하는 일과 개축하는 일도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활동은 진정한 경건의 표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제임스 림버그, “호세아-미가: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 p,74.)
이 질문에 대하여 반응하기 위해 이제 제단과 주상을 설명하겠습니다.
솔로몬의 부하였던 여로보암 1세는 931년에 솔로몬 사후 왕이 된 르호보암의 정책에 반대하여 북쪽에 분깃이 있었던 10지파(유다와 베냐민 제외)를 규합하여 사마리아를 수도로 왕국을 세우고 왕이 됩니다.
그는 남쪽의 두 지파만 남게 된 유다에 비해 영토도 훨씬 더 광활했고, 군사력도 막강했습니다.
그러기에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맹주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경제력도, 군사력도 남 유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치를 선점했는데 문제는 종교적인 일이었습니다.
다윗의 계보를 통해 약속된 다윗 공동체의 선민들은 반드시 제사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야 한다는 ‘예배(제사) 장소의 단일화 법’이 신명기적인 율법이었고 이것은 불문율의 법이었습니다.
신명기 12:13-14절입니다.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이 율법으로 인해 여로보암은 정치, 경제 등등의 영역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매년 절기에 북 왕국의 백성들이 남쪽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막지 못했습니다.
종교적인 장악을 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의 역할을 한 성소를 북쪽 두 군데에 건축하기에 이릅니다.
남쪽 경계인 벧엘에 하나, 북쪽 경계였던 단에 하나를 만들어 북쪽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책을 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두 곳에 만든 성소를 화려하게 건축했고 단장했습니다.
그 제단들을 받치고 있는 주상(기둥)들도 가장 좋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짝퉁 단을 만든 것을 보고 호세아 예언자는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2절 때문입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예언자의 사자후가 무엇이었습니까?
조만간 이 으리으리한 제단과 주상들을 하나님께서 깨뜨리시고 허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고는 실질적으로 성취됩니다.
주후 722-723년에 사마리아를 비롯한 북쪽 도시들은 앗수르에 의해 짓밟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만들어진 산당과 주상들이 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을 예언자가 예고하고 있습니까?
김필회 교수의 글을 연이어 소개합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제의가 거행되던 중앙 성소 벧엘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제사를 드렸던 지방 성소(단)도 패륜적인 범죄가 행해지던 악의 소굴이었다. 산당은 산꼭대기나 언덕에 위치한 제의장소로 건물이 있거나 또는 노천에 마련된다. 산당의 제의적인 구성 요소는 희생제물을 불태우는 제단, 신탁의 수령과 관련된 아세라 상과 주상, 그리고 거룩한 나무를 들 수 있다. 산당은 바알종교와 풍요제의가 야훼종교로 스며들어오는 주된 통로였다.”(김필회, “위의 책, p,342.)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도용하여 제사를 드리는 장소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역겨움을 도무지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가증함을 행하는 북 왕국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아주 단호하게 본문에서 그 결과물을 선포하십니다.
본문 13-15절을 봅니다.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멸망을 선전포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전포고는 말로만의 선전포고가 아니라 불과 25년 정도 뒤에 북쪽이라는 지정학적인 영역 전체에서 실질적으로 성취되는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은 504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큰 목회자가 보이지 않은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본문이 떨림으로 다가오는 것이 저만의 소회라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배경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접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너무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일보 기자는 큰 목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작은 목사라도 보입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무모하게라도 그래도 존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외연을 확장하십시다.
한국교회 안에 신자들 사이에 큰 어른이 보입니까?
동시에 신앙의 작은 거인들이라도 있습니까?
도진개진입니다.
더욱이 코로나 19 정국이 팔자로 드러누운 오늘, 교회 안에 있지만 경계선에서 머무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 안으로 용기 있게 들어오려고 하는 자들이 목사나 평신도나 1도 보이지 않아 참담합니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자포자기하고 말아야 하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504주년 주일에 저와 여러분이 도저히 손 놓고 있지 말아야 할 이유가 본문 12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군께서는 주전 8세기에도, 주후 21세기에도 동일하게 당신의 방법을 여전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본문 12절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의를 심어 사랑을 거두기를 원했다. 자, 준비된 땅을 갈자. 하나님과 더불어 땅을 갈자. 마침내 의가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오면 그 분이 오실 것이니 그러나 너희는 악한 길을 걸었고 악의 공물을 수확했으며, 거짓의 야채를 먹었다.”
예언자 호세아는 북쪽 이스라엘의 영적인 망가짐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회복의 메시지를 사자후로 던집니다.
판을 갈라는 것입니다.
땅을 갈아엎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과 함께 땅을 갈아엎을 최적의 시기이기 때문임을 적시한 것입니다.
시간을 뒤로 미루면 안 됩니다.
적당히 눈치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본인들이 의지했던 앗수르에 의해 지도에서 사라지는 멸망을 자초했고, 동시에 그 땅은 이방의 땅으로 낙인찍히는 사마리아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2022년은 지금 상태 이대로 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가야합니까?
※ ‘하나님만이' 아닌 ‘하나님과 나’라는 신앙의 매너리즘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기경하라’고 번역한 것은 히브리어 ‘니르’를 아주 점잖게 번역한 것입니다.
‘니르’는 이렇게 점잖은 뜻이 아니라 대단히 거친 의미의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 동사가 어원에 맞게 번역한 듯싶습니다.
‘break up’ 즉 ‘박살내다.’ 혹은 ‘분쇄하다.’, ‘해체하다.’입니다.
말 그대로 판을 바꾸는 것입니다.
묵은 땅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알을 섬기던 판입니다.
단과 벧엘을 예루살렘 대용품으로 변질시킨 두 마음입니다.
이 판을 그대로 가지고 가서는 안 됨을 하나님은 천명하셨습니다.
대단히 단호하게 이 묵은 판을 break up 하라고 하십니다.
그냥 대충 모양새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판을 바꾸라고 강권하신 것입니다.
판을 바꾸어서 공의와 인애의 열매를 거두라고 권고하십니다.
공의와 인애의 열매를 거두려면 반드시 묵은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우유부단해서는 안 됩니다.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분쇄해야 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희철 목사가 쓴 시평 ‘고운 눈 내려, 고운 땅 되다’를 독서했습니다.
작가는 책에서 고려 중기의 문신인 이규보 시를 한 편 소개합니다.
시 원고를 불태우고
소년 시절 노래라고 끄적거리느라/ 붓만 잡으면 원체 거침없었네/ 스스로 아름다운 구슬처럼 여겨/ 누가 감히 흠을 잡을까 했네/ 나중에 찬찬히 다시 보니까/ 한 편 한 편 좋은 구절 하나 없구나/ 차마 글 상자를 더럽힐 수 없어/ 아침 짓는 아궁이에 넣어 태웠네/ 올해 쓴 시 내년에 보면/ 똑같이 지금처럼 던져 버리고 싶겠지/ 당나라 시인 고적(高適)은 이런 까닭에/ 오십이 되어서야 시를 썼다지.(한희철, “고운 눈 내려, 고운 땅 되다”, 겨자나무, p,94.)
이 시에서 언급한 대로 이규보가 이렇게 해서 마음에 들지 않은 시를 아궁이에 불태운 시가 300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도 자신이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수정하는 온건함이 아니라 아예 미련을 갖지 않기 위해 불에 태우는 과격함이 있었던 이규보를 보면서 목회자로서 각오를 새롭게 다지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주워들었던 종교적 타성들을 매너리즘이라고 합니다.
이 매너리즘은 거의 대부분이 회색입니다.
이 매너리즘은 거의 대부분 고민하지 않으려는 무감각입니다.
이 매너리즘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토끼몰이를 합니다.
이 매너리즘은 이 만하면 됐다고 격려합니다.
명심하십시다.
이 매너리즘은 수정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갈아엎어야하는 대상입니다.
지난 2년여 코로나 정국을 빌미로 나를 옥죄었던 안일함과 편리함은 수정의 대상이 아니라 갈아엎어야 하는 대상입니다.
‘나’ 중심적인 신앙의 내용들은 단순히 타협하여 수정보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불에 태워 갈아엎어야 하는 대상입니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본문이 대단히 간결하지만 선명하게 제시합니다.
‘지금은 여호와를 찾을 때니’
이것만큼 분명하고 단호한 방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2년 동안 타성에 젖게 만든 영적인 매너리즘을 박살내는 방법은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목할 단어가 12절에 보입니다.
‘지금’이라는 부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이 주님을 찾고 묵은 땅을 갈아엎을 적기입니다.
종교개혁 504주년 아침에 많이 들리는 구호입니다.
“교회 제도에 대하여 혁신하라. 기독교의 계급 구조적인 신 하이어라키를 혁신하라.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삶을 바꾸어라. 목회자 중심적인 구태의연한 중앙집권적인 태도를 포기하라.”
하나도 틀리지 않는 구호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개혁이 있습니다.
‘나’라는 내가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 중심의 묵은 땅을 갈아엎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을 버리지 않는 개혁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되지도 않습니다.
아이든 토저가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라는 단어를 소문자로 쓰지 않고 대문자로 쓰셨다. 즉 'truth'라고 쓰지 않고, 'TRUTH'라고 쓰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그것(it)’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내가 곧 진리(TRUTH)라고 말씀하셨고 진리를 따라 십자가까지 가셨다.” (아이든 토저, “예수 방향으로 가라”, 규장,p,214.)
내가 갈아엎어야 하는 것은 it이고, 'truth'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6: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라는 시점이 묵은 땅을 갈아엎을 가장 적기입니다.
뒤로 밀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바로 땅을 갈아엎을 때입니다.
종교개혁 504주년이 되는 오늘, 우리는 위기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새무얼 헌팅톤이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그대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히틀러나 스탈린을 받들어야 할 시기가 오늘이다.”(새무얼 헌팅톤, “문명의 충돌”,김영사, p,15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존재하는 자는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분적으로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자는 언제나 나와 하나님을 같은 선상에 놓고 저울질합니다.
아마도 이런 자들은 ‘나’라는 히틀러 혹은 스탈린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종교개혁주일 504주년에 각인할 것은 나를 갈아엎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곱씹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너의 푸른 가슴 속에 십자가의 흔적 있다면
주 위해 이제 일어나 너의 믿음 주께 보이라
너의 뛰는 가슴 속에 하늘의 불타고 있다면
그 나라 그 영광 위해 너의 삶을 주께 드려라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 나라 이제 곧 오도록
우리 주의 은혜의 강 이 땅 휩쓸며 흐르도록
하나님의 눈물을 가진 자 일어나
주님을 따르라
너의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면
온 세상 주 영광 보겠네
너의 삶을 불태워 주를 섬겨라
주의 영광 나타나겠네
오래 황폐한 이 땅 꽃을 피워라
주의 향기 가득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