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 목요일 성서 일과 묵상 안전하지 않은 하나님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85:1-2, 8-13, 호세아 6:1-6, 데살로니가전서 1:2-10 꽃물 (말씀 새기기) 데살로니가전서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마중물 (말씀 묵상)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요소를 들라고 하면 그것은 성경이 상투적인 것을 응원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섭렵한 책 중에서 나에게 영향을 지대하게 미친 상위에 있는 책이 마크 부캐넌의 『열렬함』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규장에서 발간한 책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이것을 안 친구 목사가 오래 전에 내게 뼈 있는 농을 던졌던 적이 있었다. “이 목사가 은혜를 못 받아서 그래!” 웃었다. 그렇다면 뭐 그렇다고 치자. 근데 어쩔 수가 없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규장에서 만든 책들을 보면 성도들의 감성적 여백 건드리기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많이 엿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도 성향의 차이라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장 출판에서 출간한 책 중에 내가 참 잘 만들었다고, 참 귀하다고 여기는 선호도 100점의 책이 있다. 캐나다의 뉴라이프 커뮤니티의 담임목사인 마크 부캐넌이 쓴 『열렬함』이다. 이 책의 원제가 눈에 띈다. “Your God is too safe.” 부제는 이렇다. “Rediscovering the wonder of a God You can’t control.” 나는 이 책을 수십 번 읽었다. 내 목양의 현장이 건조할 때, 사역의 감동이 떨어질 때, 지칠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나와 내가 섬기는 교회가 안락하고 편해지는 것에 고착된다 싶을 때면 서고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다시 손에 들고 폈다. 그리고 읽고나면 마크 부캐넌 목사에게 너무 고맙다고 읊조리고 감사했다. 책을 펼 때마다 저자가 캐나다의 중산층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인가를 질문하며 이 책을 읽었다. 부캐넌의 사자후는 이러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안전하다고 외치는 자들아, 들으라. 그런 가짜 복음에 안주하지 말라.” 이 외침 외에 또 하나의 사이다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대하여 경계선을 두고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내 책에 색바랜 모습으로 밑줄 그은 부캐넌의 글이 있다.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리스도의 보급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구해달라고 매달리지만,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 대해 성가시게 참견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리스도께 위로를 받기 원하지만 그리스도가 내 삶에 개입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사태를 진정시키기는 원하지만, 그리스도가 내 삶에 들어와 삶을 온통 휘젓는 것은 원치 않는다.” (63쪽) 세상에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에 있나?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나?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에 있나? 오늘 성서 일과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이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칭찬하고 있는 바울의 일성이 괜한 말로 들리지 않는 강력한 메시지가 보인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6) 세상에나 맙소사,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가 주를 본받는 칭찬 받는 공동체가 된 가장 강력한 이유가 많은 환난 때문이라니! 21세기 작금에 이 말에 대해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순수함을 마음을 갖고 아멘 하는 신자가 있을까? 부캐넌의 논리로 말하면 아멘은 고사하고 도망갈 자들이 교회에 수두룩한데 이렇게 말한 바울도, 부캐넌도 대단하다. 이번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살피고 있는 생명의 삶 텍스트가 골로새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를 1장에서 던졌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이런 말을 하는 자를 오늘의 교회는 정신병자 수준이라고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나는 남은 사역의 내용을 바로 이 신앙적 고집을 지키는 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십자가 보이지 않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보이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기에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안전한 하나님이 아니다. 도리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부캐넌이 말한 부제가 맞다. “Rediscovering the wonder of a God You can’t control.” 내가 통제한다고 움직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경이로움을 다시 찾아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천로역정이다.
두레박 (질문) 나는 안락한 것을 추구하는 목사인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결코 안전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는 그런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맘대로 움직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조각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철저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대합니다. 나는 이렇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나비물 (말씀의 실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자. 힘에 많이 부치겠지만 하나님께 지혜와 용기를 구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오늘 목적을 두고 기도한 지체의 결과가 나오는 날입니다. 종도 중보했습니다. 주님 결과를 주께 맡기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