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주원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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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문학의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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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1-28 22: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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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규의 ‘망루’를 읽고 (문학의 문학 간, 2010년) 국어사전을 보면 ‘균형’ 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 그래서 그런지 일본식 발음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빈번하게 사용하는 국적 불명의 소리음 글자인 ‘바란스’(balance)가 바로 이 ‘균형’ 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근래 들어 이 ‘균형’ 이라는 단어에 꽤나 천착하며 살아가고 있다. 바보스러운 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목회의 현장에서도 이 ‘바란스’를 잡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고 힘이 들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 땅에 존재하는 조직 중에서 아마도 가장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임에 틀림이 없다. 해서 교회에서마저도 아무리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소리쳐 불러 봐도 영호남의 색깔이 하나 되는 것이 쉽지 않고, 양희은의 ‘하나’를 불러도 보수와 진보가 어울리는 것이 녹록하지 않다. 이런 기막힌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하는 목사이기에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목사에게 있어서 균형의 추를 잡는 것은 단지 성직자로의 양심의 문제 이전에 유감스럽게도 생존의 문제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야 소위 말하는 색깔이 있는 발언,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내는 것은 이미 한국교회의 기상도 아래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이 부었다.
사정이 이런 데도 서평자는 정말로 간이 부었다고나 할까! 어쩌다 ‘망루’를 손에 들게 되었다. 보수적 계통에 아니 더 솔직해지자, 근본주의적인 색깔이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주원규의 ‘망루’는 불온서적 정도가 아니라 이 책은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자들은 중세 시대의 정황으로 말한다면 화형에 처해야 할 극형의 죄를 저지르는 것과 동일하다. 더군다나 읽는 것도 무시무시한 죄를 범하는 셈인데 이 책의 서평을 쓴다니, 오늘 만에 하나 2000년 전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재판소가 있었다면 서평자는 분명히 재판에 넘겨져 반드시 응징되어야 할 대상으로 낙인 찍혔을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벌써 책을 읽고, 글까지 쓰고 있는데 물러서고 싶지가 않으니 말이다. 왜? 서평자가 레드 마인드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이 책을 통해 ‘바란스’를 잡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이 사명인 양 말이다. 저자 주원규는 참 의외의 인물이다. ‘망루’ 라는 소설은 한국 교회라는 거대한 조직에 대하여 마치 서슬이 시퍼런 칼을 겨눈 검투사가 승부를 내자고 결투 신청을 한 것과 같은데 이 결투 신청을 낸 저자의 뿌리가 한국교회 조직 중에 가장 보수적인 냄새가 자욱한 총회 신학대 출신이니 말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나 싶다.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진하게 다가왔다. 돌연변이인가? 아니면 갑자기 돌변한 혁명가인가? 그러다가 나름 정리한 서평자의 생각한 것은 이것이다. 사람에 대한 인식을 그 사람 자체의 삶으로 보지 않고 외형적인 표피를 보고 판단하는 것만큼 편협하고 위험한 것이 또 어디에 있으랴! 이 소회로 입장을 정리하다보니 편견을 버리기로 했고 또 그러다 보니 훨씬 저자에 대한 인식이 자유 해졌다. ‘망루’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제공해 준 사건이 용산 참사임을 알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사람들 입에서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누어지는 그 용사 참사 말이다. 주목할 것은 용사 참사는 철거민들과 국가 공권력과의 싸움인데 비해 저자는 이 소설에서 과감하게도 그 참사를 일으킨 주된 범죄자를 교회로 고정했다는 점은 아프지만 특별하다. 물론 주원규는 용사 참사라는 미증유의 사건 앞에서 교회가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비겁하게 침묵함으로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서 잠잠했던 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고 또 하나 저자가 신학을 공부한 제도권 교회와 교단에서 대체적으로 용산 참사의 원인이 불법 시위자들로 인하여 질서가 파괴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공권력이 정당한 집행 과정에서 야기된 유감스러운 일 정도로 치부하며 국가의 입장에 손을 들어준 것에 대한 환멸감이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世明 교회가 世暗 교회가 되나니!
이유야 어찌되었던 이런 작가의 지배적인 사고 속에서 만들어진 ‘망루’는 가장 부정적인 주인공 집단으로 가칭 교회답지 않은 교회인 세명 교회와 그 교회를 세습으로 이어받은 조정인 목사를 내세웠다. 종교라는 이름을 빌미로 그들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자행된 폭력은 세속적인 폭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담임목사 조정인은 제대로 신학을 하지 않아 도무지 세명 교회의 담임목사가 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갖은 편법으로 아버지의 후광과 그 조직 안에서 죄가 죄인지도 모르는 화인 맞은 양심의 소유자들인 기득권 지도 권력자들의 묵인에 의해 담임목사의 자리에 이르렀고, 그는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였기에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며 교권을 장악했다. 그의 야욕은 점입가경이다. 교회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교회의 물리적인 힘, 금권적인 힘 그리고 교인 숫자라는 외형적 대세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더 큰 세력화를 꿈꾸며 주변 지역의 확장을 비전으로 선포한다. 이로 인해 재래시장에서 평생 열심히 일하면서 먹고 살던 민초들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버리고자 한다. 생존의 터를 잃게 된 많은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보상금을 받고 정들었던 생존의 자리를 떠났으나 일부 상인들은 생존을 위해 철거 반대 투쟁에 들어가고, 그 때부터 남은 상인들이 치열한 교회와의 전투에 임하게 된다. 글의 긴장감은 여기에서 정점을 이룬다. 철거투쟁 반대를 이끄는 자가 다름 아닌 그 교회 출신의 윤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학교를 중퇴한다. 이후 있는 자들과 기득권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민초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의 정신이라고 믿고 철거민들을 위한 생존권 보장 투쟁 즉 세명 교회와 맞서 싸우는 전사로 서게 된다. 그 과정, 윤서는 신학대학교 동기이자 세명 교회 전도사인 민우와의 운명적인 맞섬으로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철거민들을 위해, 또 한 사람은 교회를 지켜야하는 얄궂은 운명으로 만난 것이다. 교회 쪽에 서 있어야 했던 민우는 훌륭한 목사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어머니의 기대감과 우연치 않게 은퇴한 담임목사 딸의 배우자로 정해진 부담, 그리고 무엇보다 시정잡배보다 못한 조정인 담임목사의 설교를 매주 마다 준비해주는 충직한 개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그래서 심각한 영적 갈등에 사로잡힌 조커로 등장한다. 이런 압박 속에 있었던 민우에게 신학대학교 동기인 윤서의 나타남과 그가 철거민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행동하는 실체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의 삶에서 보여 지는 행동하는 신앙의 모습은 이제까지 견지해온 제도권에 대한 실상과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신학적 코마를 가져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서평자가 본 이 소설의 압권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공동체에 의해서 저질러 진 악행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철거민들을 향한 있을 수 없는 폭력에 대하여 맞서는 편의 반응이었다. 윤서를 중심으로 한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그룹과 폭력을 당하여 무참히 짓밟힌 자들을 신비롭게 치료해 주는 재림 예수로 상징화된 한경태가 말하고 있는 비폭력과의 긴장감이었다. 다시 말해 윤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세속의 식이, 네 원수도 사랑하라는 한경태의 예수의 식이라는 긴장감이 일반소설에서는 터치할 수 없는 그리고 볼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기에 목사인 서평자에게는 글의 결말을 더욱 긴장하게 했다. 힘이 정의라면 사랑은? 아주 오래 전, 영화 ‘미션’ 을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서 본 감동의 대사가 기억에 있다. 우여곡절 끝에 선교적 파라다이스를 파라과이 이구아수 폭포 부근에 만들어 지상 천국의 모델링을 만들어 놓았건만 그 지역의 식민통치의 관할이 바뀌면서 선교지를 포기하라는 교황청과 국가권력의 명령에 반기를 들고 칼과 총으로 맞서려던 수사 멘도사와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국가권력의 힘에 순교를 당했던 가브리엘 신부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남아 있다. “힘이 정의라면 사랑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결국 주원규는 소설의 결론을 언 해피엔딩으로 마감했다. 세명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세속적인 공룡보다 못한 가장 천박한 집단에 의해서 고용된 소위 말하는 백골단의 무지비한 폭력으로 인해 결국 미래 시장을 생활의 터전 삼아 살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망루’ 에 올라간 철거민들은 싸늘하게 시체가 되어 버렸고 세명 교회의 승리로 철거 전쟁은 끝이 났다. 소설에서는 세명 교회가 철거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철저하게 패배했음을 많은 독자들에게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 작가의 목적이었으리라. 적어도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세상의 권력과 야합한 교회의 나신(裸身)을 그대로 밝히고 싶었던 메시지였을 것이다. 하여 오히려 이 사회에서 제거되어야할 공적(公敵)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치유해야 할 한국교회임을 더 더욱 교회에 주고 싶었던 경고성 메시지였을 것이다. 작가는 이 글의 중간 중간에 유대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로마의 제 10군단을 이끌던 디투스에 의해 공격을 받고 궤멸 직전에 있었던 마사다 요새에서 960명과 함께 자결을 이끌었던 열심당의 지도자였던 벤 야살의 그 이름으로 세명 교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김윤서의 백서를 공개한다. 로마의 개로 사느니 차라리 순결한 죽음을 선택하자고 제안했던 벤 야살이 오늘 한국교회에도 절대로 필요함을 간헐적이지만 작가의 언어로 표출하고 있다. 마치 작가의 외침은 500년 전, 교회가 세속 권력과 부합하여 기생하고 있는 중세 가톨릭을 향하여 마치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의 종교 개혁의 기치를 내 건 루터의 심정으로 불을 토하는 장면은 목사로 사역하는 서평자를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곱씹어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벤 야살이라는 이름으로 올린 담론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뒤돌아보아야 하는 쪽 복음처럼 귓가를 때렸기 때문이다. 균형 서평자는 글을 시작하면서 ‘균형’을 말했다. 재론하지만 ‘망루’ 에 올라선 미래 시장 상인들은 국가폭력에 의해 주검이 되어 내려왔다. 다른 어떤 말로 합리화시킬 수 없는 힘 있는 자들의 절대 폭력의 결과 때문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이렇게 힘 있는 자의 논리로 힘없는 자가 유린되는 정치적, 사회적 후진성을 그대로 담보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불행이 일어나는 아픔 속에 살고 있다.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힘이 있는 자의 편에 서 있으려면 과연 교회가 왜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가?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지라 출처가 어디인지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일간 신문 칼럼에서 한국교회를 심히 염려하는 이런 종류의 지성인 칼럼을 읽은 적이 있었다. “교회와 성당과 절은 세속의 사람들이 세간에서 발견할 수 없는 소망과 평강과 기쁨을 얻기 위해 가는 곳이다. 헌데 만약에 교회와 상당과 절이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면 우리들이 거기에 가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셨던 삶의 내용들을 그대로 살고 또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환언한다면 예루살렘 중심적인 삶이 아닌 갈릴리 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서평자는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방법은 예루살렘 행이 아닌 갈릴리 행 열차를 타는 것이라고 진단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 고언에 대하여 다른 변명으로 구차하게 비겁해지지 말자. 나는 그것이 용기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자는 이제 균형을 잡아야 하겠다. 저자는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썼을까? 이 기막힌 뒤틀어짐을 반성하고 돌이켜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무슨 일을 해도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에 근거하여 일어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소설을 썼는지는 그의 자유의지일 것이다. 허나 만에 하나, 전자가 아닌 후자가 소설을 쓴 목적이라면 대단한 유감이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바람 앞에 촛불인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한국교회가 예언자 이사야 신탁의 언어처럼 남은 그루터기가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한국교회에게 주어진 자정의 기회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한국교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의 의인들이 있을 것을 믿기에 희망을 갖는다. 아마도 하루에도 수없이 목사의 직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열두 번도 더 있는 아픔을 느끼지만 이것이 지금까지 목사의 로브를 벗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를 향하여 날선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것은 얼마든지 맞아야 하는 것이며 또 그 매 맞음을 통해 유행가 가사처럼 교회가 아픈 만큼 성숙해 지는 것을 역설의 의미로 박수까지 보내고 싶다. 하지만 교회가 무엇을 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속의 가치에는 유감스럽게도 손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다. 나는 하나님이 패역한 교회를 고쳐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지금도 고지식하게 믿는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현직 목사이다. 물론 전적인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겠지만. 나의 이 균형의 추가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하박국이 그립다.
서평을 마치면서 ‘망루’라는 단어가 이 소설의 제목 때문인가? 예언자 하박국이 떠올랐다. 주전 7세기 예언자였던 하박국은 바벨론의 서슬이 시퍼런 침략의 기운으로 인해 백척간두에 있었던 남 유다의 상황을 보면서 가슴 졸여하는 예언자의 심정을 토로한다. 마침 하나님께서 갈대아를 들어 유다를 심판한다는 신탁을 듣고 나서 자신의 이성으로 유다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을 들지 않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짐승 같은 바벨론을 들어 당신의 백성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하나님께 항거하며 하나님께 대드는 것과 같은 종용의 기도를 한 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망루에 올라가 주목한다. 이 과정은 하박국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불의로 보고 대항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다. 하나님께 떼를 쓴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박국의 일련의 떼씀을 선하게 보셨다는 점이다. 해서 하나님은 하박국에 의미 있는 응답을 주신다. 그 응답이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메시지였다. 이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히 ‘하나님의 격려’였다. 망루에 올라선 하박국의 떼씀은 의인을 통한 회복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는 말이 된다. 주원규의 ‘망루’에 올라보았다. 그 망루 위에서 갑자기 신영복선생의 글이 생각났다. “지남철의 여읜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지식인의 초상이다. 어느 한 쪽에 고정되면 이미 지남철이 아니며 참다운 지식인이 못됩니다.” 지금 무얼 안다싶어 글을 쓰고 있는 서평자는 세상 사람들이 ‘먹사’ 라고 공격하는 현직 목사로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적 끈을 놓지 않으려고 현장에서 필사의 몸부림을 치며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신영복의 글이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망루에 올라가 그 ‘망루’ 위에서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회초리를 매섭게 맞았지만 도리어 그 매 맞음이 지남철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에 달고 동시에 아픈 회초리를 맞으면서 그 망루에서 하박국의 떼씀을 똑같이 부려보았다. 해서 얻은 은혜는 남은 자, 그루터기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계속 떨겠다는 균형이었다. 글 쓰기를 마치며 오늘도 이 땅의 더 많은 남은 그루터기들이 가슴을 치며 망루에 오르는 하박국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