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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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느린 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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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5-06-24 14: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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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사람만이 희망이다.’ (느린 걸음) 를 읽고
오래 전,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한 김득중 교수의 칼럼 집인 ‘무엇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가?’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프랑스의 아주 한적한 농촌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농부가 레지스탕스로 오해되어 독일의 비밀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졸지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너무 억울한 농부는 이렇게 절규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나는 레지스탕스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자 옆에서 같이 체포된 진짜 레지스탕스 요원이 농부를 보며 냉소적으로 이렇게 힐난했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서평자는 박노해의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 라는 글을 읽다가 갑자기 까마득하게 오래 전에 읽었던 김 교수의 이 글이 떠올랐다. ‘아무 것도 안 한 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보다 더 무서운 죄가 어디에 있으랴! 어느 날, 성서 독서 일과로 오바댜를 읽다가 벼락처럼 뇌성과 번개의 음성으로 들렸던 말씀이 있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옵1:10-11) 형제의 나라가 이방의 손에 의해 망해가는 데 뒷짐 지고 방관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 무관심의 죄를 반드시 다시 되 갚을 것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방관의 죄, 무관심의 죄를 무겁게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살폈던 기억이 있다. 변화가 아닌 변질이 두렵다.
저자는 80-90년 시대에 순결한 열정을 갖고 함께 나라를 위해 고민했던 동지들이 있었기에 행복했다고 술회한다. 허나 유럽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이 땅에서 펼쳐진 작금의 변질과 무관심이 저자를 괴롭히고 고독하게 한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고백이라기보다 막혀 있는 담과 같은 현실적 절망이기에 더욱 저자는 탄식한다. 함께했던 동지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따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음에 아직도 첫 마음의 열정이 있다. 그러나 저자가 고독한 이유는 동지들의 현재적 삶이 그들을 행동하지 않게 한다는 이율배반에 젖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친구들은 여전히 따뜻하게 날 반기지만 변함없이 첫 마음을 힘주어 말하지만 삶이 없습니다. 평등의 삶이 없습니다.” (p.248) 4.19세대들이 그랬다. 386세대들이 그 뒤를 이었다. 민주화 세대의 넥타이 부대가 또 그랬다. 본인들의 기득권들이 많아지자 수구적으로 변하는 행태들이 초록이 동색이다. 동지들은 이제 역사 앞에서 행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부끄러운 초상이 되었는데도 요동하지 않는다. 한 때 같이 울고 웃었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띠를 띠었던 자들이 이제는 민주화를 말하면 얼굴색이 붉어진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빌미로 같이 피를 많이 흘렸음에도 이제는 그런 역사의식을 말하면 불순한 자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자들로 변질되었다. 4대강을 비토하면 좌익이다. 세월호 이야기를 건네면 경계의 눈초리가 무섭다. 사정이 이렇기에 저자인 박노해를 인용하고 그를 서평하고 그를 인정하면 영락없이 독약을 먹는 것과 진배없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SNS에서 현직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하는 시대가 되었어도, 저자는 지금도 평범한 (서평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순전히 오늘의 삶에 나 또한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불온의 씨앗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기에 접근하기가 녹록하지 않은 인물로 낙점되어 있다. 특히 서평자 같은 목사가 박노해를 논하면 사상이 불온한 왼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버린 삐딱한 목사로 도배질 당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지금도 있다. 저자는 전라도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라도 출신인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한 담백한 고백의 아픔이 서평자를 울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전라도 출신이라는 건 상공업 중심지가 아닌 농촌 출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서울의 반대말이 아닌 것입니다. 불온하다는 뜻입니다. 뭔가 한이 맺히고 천민적이고 저항의 피가 흐르고 있어 그 앞에선 학력도 능력도 인품도 소용없는 차별대우의 상징, 연변이나 북한 동포처럼 내부 식민지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pp.122-123) 이렇게 아픔을 토로하고 있는 그의 술회가 인천 출신인 서평자에게 왜 절절하게 다가올까? 이유는 실상이 저자의 지적이 맞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불온한 사람, 그리고 전라도 사람인 저자의 글을 서평자는 읽으면서 너무 행복했다. 왜? 사람들이 아직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서평자는 세상의 그 어떤 시인들의 시와는 분명히 차별된 ‘사람답게 살기’ 에 대한 따뜻한 몸부림이 보여 귀하고 또 귀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접한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받은 감동이 그래서 더욱 크다. 그가 글에서 노래한 감동의 자국들은 너무나 잔잔하고 격이 높다. “역사는 무서운 것입니다. 당신의 사정이 어떠하든 역사는 우리의 죽음 이후까지를 시퍼렇게 기록합니다. 오늘 현실의 승리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살지 마십시오. 오늘 현실의 패배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걷지 마십시오. 역사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다가 죽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pp.136-137) 신학교 선배 중에 한 명이 1980년 신군부 독재의 정권 찬탈 시나리오가 척척 맞아떨어져 가는 캄캄함의 시대에 당시 국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그를 지극히 높여 찬양하는 기도를 드렸다. 역사는 당시, 그를 무엇이라고 평하지 않았다. 허나 역사는 무서운 것이라는 저자의 일갈은 적확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성공한 쿠데타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들을 단좌하자 당시 그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기라성과도 같은 선배들이 비난의 몰매를 맞아 일부는 참회한다는 성명서를 궁색하게 내놓는 해프닝도 있었다. 1980년에 읽으면 남영동으로 잡혀 들어갔던 불온서적의 저자인 E.H 카는 이렇게 갈파했다. “모든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과 비역사적 사실 사이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이라도 그것의 적절성과 중요성이 밝혀지면 역사적 사실의 지위로 승진할 수 있다.” 조찬기도회가 열릴 때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있었던 자들은 승자들의 독식구조 속에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자이었을 것이었기에 그것이 주류 역사가 될 것이라고 교만해 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불과 30년도 안 되는 시간의 역사는 그 때의 역사는 비역사적인 허구들이었고, 당시의 비역사적 허구들로 주류의 사람들에 의해 비토 되었던 사실들이 역사의 진실이라는 적절성과 중요성으로 부각되면서 도리어 역사적 주류의 이야깃거리들이 되었다. 그렇다 그래서 역사는 무서운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오늘의 승리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살지 말라는 저자의 내뿜음을 가슴에 서평자는 담았다. 이렇게 역사는 역전된다는 것을 시인 고은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역사의 역전을 한 줄로 노래했다. “지난여름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 올가을 구절초가 피어났네/” 고난을 싫어하는 교회 서평자가 이 땅에서 26년 동안 목회를 하는 목사로 살면서 느껴왔던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정수는 신학대학에서 배운 교리와 신학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배운 것이 있다. 역사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주군인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근래 한국교회의 미래를 바라보면 역사 앞에서 정직하지 못했던 그 대가를 받는 것 같아 아프고 시리다. 더욱 더 아픈 것은 아직도 한국교회가 역사 앞에서 솔직하지 못한 삶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서평자는 교회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만이 진정한 공의의 실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속적 성공과 패배에 대한 호불호를 평가하는 일들을 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편이다. 그 평가는 참으로 헛헛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오히려 고난을 느끼는 교회로 사역의 장을 만들어가려고 나름 노력한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 존재하는 가시적 교회에 대하여 참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영적 일맥상통이지 않을까 싶다. “고난은 싸워 이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경은 딛고 일어서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은 뛰어넘으라고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맑은 눈을 뜨라고!” (p,141) 적어도 저자의 갈파처럼 교회가 맑아지는 방법은 고난을 두려워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교회의 가시적 교회를 짓는데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당하신 고난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동참할 때만 교회의 교회다움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저자의 말에 동의했다. 저자는 목사로 사는 나를 또 한 번 부끄럽게 한다. 불교가 이 땅에서 성성한 이유를 청정수행하는 출가승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갈파한 대목에서 머리를 숙였다. 정답이기 때문이다. 교권을 위해 각목을 휘두르는 사판승들이나 불교적 영성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치졸한 사이비 중들이 아닌 오직 삶의 근본 목적인 영적 진보를 위해 투신하고 있는 눈 푸른 스님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파한 저자의 대목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이 땅의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행하신 자기부인을 나도 감당하겠다는 발걸음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달이 갈수록 자기부인의 사역에 대해 두터워진 나의 목양의 무감각이 부끄럽다. 저자는 감각이 무뎌지고 있는 서평자를 가르쳐준 반면교사의 선생이다. 그가 나를 가르쳐 준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나는 느린 걸음 출판사에 그리고 저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삽질은 이제 제발 그만!
저자는 평화, 생태, 환경, 평등 등등의 단어에 천착한다. 특히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이 스펙트럼에 초점을 맞춘 것은 또 다른 진보가 아닌가 싶다. “문맹은 동정 받아야 마땅하고 컴맹은 도움 받아 마땅하나 환맹(環盲)은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p.227 용서받지 못한 자) 서평자는 정치적인 면에서 내가 동의하는 정당을 지지할 권리가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하지만 나는 이 땅에서 성직의 일을 감당하는 목사이기에 정치적인 발언과 성향을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회중들을 대하는 자로서 예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4대강 사업은 너무나 화가 난다. 이유도 정치적인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그대로를 온전히 파괴한 가공할만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환맹은 그래서 지탄 받아야 한다. 저자는 환맹을 이렇게 진단한다. “인간의 토대를 파괴하는 자, 아이들의 미래를 훔쳐다 쓰는 자, 오늘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 자신이 딛고 선 발밑을 허무는 자는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자입니다.”(p,227) 전 국토를 콘크리트로 만든 죄로 인해 망가진 산하를 후대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을 생각하면 머리를 들 수 없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뇌가 있는 것일까? 원론적으로 동의한다. 이 땅에서 이제는 삽질 소리는 끝났으면 좋겠다. 각종 보 공사로 썩은 물로 만든 4대강물이 다시 세차게 금수강산을 굽이굽이 흘렀으면 좋겠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사람만이 희망이다.’ 라고 했다. 그의 논제는 이렇다. “희망찬 사람은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p.63) 저자의 총론들을 지지한다. 서평을 마치며 목사이기에 그의 각론에 딴지(?)를 하나 걸려고 하니 이해를 바란다. 그는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본질적인 의미를 서평자는 알기에 동의한다. 그런데 한 가지, 서평자가 짝사랑을 하는 것과는 달리 저자가 별로 신뢰하지 않아 하는 부류인 목사로 살고 있는 서평자가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진정성을 담아서 말이다. 인간은 홀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길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하는 삶을 지난 26년 동안 살다보니 저자와는 생각이 다른 방향성이 서평자에게 각인되어 있다. 어떻게? 사람만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만이 희망이라고. 직업의식의 자존감으로 치부해도 괜찮다. 서평자는 정말로 이 한 가지 사실에서는 물러설 수 없기에. 그래서 서평자는 저자와는 달리 예수께 속해 있다. 또한 이것이 나의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 엔도 슈사큐가 쓴 ‘깊은 강’에서 주인공 오쓰가 고백한 고백의 외침이 절절한 늦은 저녁 시간이다.
“나는 예수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