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조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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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두란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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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5-07-07 18:3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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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민의 “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 (두란노간), 2015년을 읽고 이제 지천명의 나이의 중간에 서 있어서 그런지 ‘시간’의 아쉬움들을 더 절절하게 느끼곤 한다. 55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왔는가? 를 성찰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정말로 중차대한 질문이고 현재 진행형의 이슈이다. 목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목사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정체성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께 맡기신 양들에 대하여 섬기고 사역하는 데에 있어서 분명히 견지해야 할 예의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진하게 한다. 안식월 기간 중, 수양관에 있는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들고 선 채로 몇 장을 읽다가 몇 가지 끌리는 대목이 있어 아예 구입을 하고 독서에 임했다. 끌리는 대목이라 전제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역사라는 무대에 서 있는 특수 신분-이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를 특수한 신분을 가진 자라고 명명해야 하는 것이 조금은 유감스럽지만-의 위치에 있는 우리 예수쟁이들이 시간의 선용함을 통해 이루어가야 할 내용들에 대해 저자 나름대로의 신학적 성찰과 철학적 고민이 깊이 담보되어 있는 글들이 한 아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이 무의미하게 보내는 ‘크로노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치열하게 밝힌다. 해서 그 ‘크로노스’ 의 시간이 나에게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이해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역사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찾아낼 수 있다고 이 책 지천에서 강조한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라는 시간으로 외연을 확장하여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는 것을 저자는 ‘시간의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풀어 말하자면 내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것, 즉 인간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이 시간 속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간의 혁명을 경험한 자는 시간을 건지는 자들이다. 주목할 것은 시간을 건지는 삶을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고 표현하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한다. 서평자도 전적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 동의한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는 글 속에 담겨 있는 ‘세월을 아끼라’는 바울의 권고가 문자적으로 ‘낚시를 통해 고기를 건져 올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에 이런 차원으로 접근하여 해석한다면 시간을 아끼는 삶은 결국 이 땅의 시간 즉 내가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속적 관점에서의 ‘크로노스’ 의 시간을 의미 있는 삶인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 의 시간으로 승화시키는 것이기에 분명히 일련의 이런 일들을 시간의 혁명이라고 지칭한 저자의 일침에 나 또한 지지를 보낸다. 저자는 시간의 혁명을 전제하면서 이 책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나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을 카이로스의 시간의 관점에서 철저히 살아갈 것을 전개해 나아간다.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인식하며 겸손히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시간 안에 있는 자들은 건짐을 받는 인생이 아니라 건져내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왜 그런가? 그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는 삶을 살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고 지적한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가르침은 겸손해진다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는 시간 앞에서 교만한 자이다. 크로노스에 만족하는 자는 그렇게 살아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는 자는 항상 시간과 역사 앞에서 겸손해지고 또 겸손해진다. 저자는 그 겸손한 인생을 마감한 자로 천상병 시인을 소개한다. 그렇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보고할 수 있는 겸손한 자들이다.
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저자는 카이로스의 안식 안에 있을 때 아버지의 시간과 내 시간을 분명하게 인식하여 아버지의 시간을 존중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쉼과 안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해서 저자는 한 동안 성공하는 자의 레테르처럼 회자되었던 ‘월화수목금금금’으로 결코 살지 말 것을 강조한다. 안식의 날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깊이 이해하여 그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께 돌릴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어찌 인간에게만 국한 된 일이겠는가? 서평자는 나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이 땅의 자연들을 뒤돌아볼 때가 많아졌다. 나이가 자연과 친해지는 시기가 되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목사로 사역하면서 자연을 훼손하고 망가뜨리는 일련의 일들을 접하면 근래에는 더 분노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안식을 선물로 준 자연조차도 인간이 내 맘대로 빼앗는 사악한 행위들이라고 서평자는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쉼과 인식을 공유하는 그런 조화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인간은 겸손해 져야 한다. 그것을 소망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을 소개하면서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가버나움까지 벳세다에서 일으키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누차 보기 위해 안달이 되어 따라온 무리들을 빗대어 교훈하고 있는 기사를 통해 기막힌 터치를 21세기의 독자인 우리들에게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시간표대로 움직여 주시기를 원한다. 자기 시간표대로 응답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응답해 달라고 조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시간에 맞춰서 일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예수님의 시간표를 따라오기를 기다리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다.” (PP.118-119). 가슴에 흠뻑 담아야 할 인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예수께서는 항상 당신의 때, 아버지의 때를 사역하는 내내 강조하셨다. 해서 그 때를 분별하고 인식하는 삶을 살 것을 종용하셨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건강한 종말론적인 ‘때“ 관리이다. 저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시간도 땅의 시간도 공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이라는 가장 중요한 ’때‘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런 때를 인식하도록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 속에 낚여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 탈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 때 그 때마다 보내주셨다고 증언한다. 허나 사람들은 마치 장대비가 계속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노아를 비난하고 조롱했던 것과 같이 무감각으로 그 날을 잊고 사는 것 같아 심한 유감스럽다고 표출한다. 이 시대가 악하다고 저자는 책의 말미에 도전한다. 그리고 이 악한 시대에 믿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불평하지 말고 노력할 것과 하나님을 믿고 선한 길을 갈 것과 하나님을 기뻐할 것과 우리들의 지혜를 하나님께 맡길 것과 때로는 침묵하는 지혜를 가질 것을 역설하기에 이른다. (PP.200-210) 이런 삶을 유지하는 자가 시간의 혁명 곧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옮겨 타는 그리스도임을 절절하게 강조한다.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것이란 그래서 곧 말씀에 붙들릴 때 가능하고 그 말씀대로 살 때 가능하다고 저자는 강력하게 역설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말씀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을 보면 차라리 두렵고 떨리기 까지 합니다.”(P.213-214) 감동이다. 조정민 목사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그의 글은 쉽지만 담백하다. 동시에 늦은 나이에 세속에서의 잘 나감이라는 틀을 벗고 주님의 사람으로 엄청난 패러다임 쉬프트를 한 사람으로의 영적 포스가 느껴져 참 좋다. 이론이 아닌 삶으로 농축되어 표현된 그의 삶의 언어가 촉수가 되어 촉촉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그의 글은 항상 행복을 준다. ‘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 강력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