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입 속의 검은 잎2024-06-10 15:48
작성자 Level 10


ㆍ지은이 기형도
ㆍ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ㆍ작성일 2015-08-13 18:00:55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2015년 54쇄 판) 을 읽고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웬 낯선 사람들이 집에 들어와 모든 가구에다가 뭔가를 붙이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렴풋한 기억에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신발을 신은 채로 우리 집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린 마음에 충격이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우리 집을 이렇게 무섭게 들어와 뭔가를 붙이고 나가는 것일까? 마음 한 편에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감히 그들이 무서워서 제대로 숨도 못 쉴 정도로 무서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들이 그렇게 하고 나간 뒤에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이제는 같이 죽는 일만 남았다고 펑펑 우시던 그 날을 어찌 아무리 어렸던 나이였기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날 이후 우리 가족이 가난해졌다는 사실을 무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뼈저리게 경험하며 사춘기와 사추기를 보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그 때부터 참 무능력하게 인생을 보냈다. 같이 죽자하시던 어머니는 오히려 그 때 이후 가장 강하고 독한 여성으로 변모했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여자는 강해진다는 것을 그 때 체득했다. 간호대학을 다니던 누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으로, 형님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산업전선을 곧바로 뛰어들고 그렇게 그렇게 우리 가족들은 강해졌다. 철이 없던 나는 그래도 나중에 출세하는 길이 공부라고 생각하고 악착같이 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갈 형편이 안 되는 지를 뻔히 알면서도 무슨 배짱으로 공부에 목숨을 걸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이다. 아마도 오기였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이끄심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목사가 된 이유 때문이리라.

1961년, 베이비붐의 한 복판에 나는 태어났다. 콩나물시루 같은 학교에서 오전, 오후 반으로 나누어진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한 반에 70명 정도의 동급생들이 있었으니 요즈음으로 말하면 무슨 교육이 되었겠는가! 그런데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 그리고 그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하는 길이 자식 농사를 잘 짓는 것임을 알았던 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든 아들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것만큼은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것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이었다. 헌데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와 그 남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역시 생 떼 같은 자식들이 대학을 줄줄이 포기하는 현실에 넉 다운 될 수밖에 없었으니 그 마음을 어찌 기막히지 않았으리요.

나는 그 마음을 나중에 알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는 아무리 부모들이 그렇게 가난을 이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를 누님과 형님들과 이해했던 것과는 달리 수긍하지 않으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몰라라 했다.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부모들의 인생이 아니라고 이기적인 객기(?)를 부렸다. 그러나 한 가지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을 갔지만 어찌 그 시대에 아픔과 비루함에서 온전히 자유로워겠는가? 나 또한 이런 이유로 내 어린 시절은 기형도 시인처럼 우울하고 흑색지표들이 즐비하다. 지금의 내 안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단점들과 쓴 뿌리들은 그 때의 상흔들이다.

서평자는 기형도의 시어들을 본 책에서 만나면서 줄타기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아픔들로 돌아가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말이다. 가고 싶지 않지만 왠지 가보아야 할 것 같은 그 어린 시절의 혈류들이 막 용솟음 쳐 내 맥박이 빨라지는 그 숨 가뿜들을 시를 읽는 내내 경험했다.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p.26 오래된 書籍 중에서)

나는 시인의 이 일갈에 어쩌면 나의 어린 시절의 회상들을 대신하는 것 같은 들킴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이 있다. 저자는 그래서 그 인과((因果)로 인해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한 점이다. 왜 서평자가 놀랐을까? 나는 그와는 정반대를 진하게 새겼기 때문이다. 나는 기적을 믿는다. 목사가 되기 이전에는 이렇게라도 안 하면 죽음과 곧바로 직면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허나 목사가 된 지금은 목사의 궤변이요 변죽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치부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검은 페이지가 도리어 은혜의 과정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래서 참 다름을 새삼 느낀다.

저자는 ‘오후 4시의 희망’에서 이런 레토릭을 선사한다.

“이곳에서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p.31)”

죽음도 살지 못하는 장소의 레토릭은 희망이 0 %라는 점이다. 저자는 도시의 절망을 말하고 있은 은유이지만 어디 이 절망이 도시 뿐이랴!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동서남북이 전부가 죽음도 살지 못하는 필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 못내 두렵다. 희망의 가능성이 없는 삶이야말로 정말로 죽음도 살지 못하는 최극점의 절망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점에 키에르케가르의 가르침은 절대 진리처럼 다가온다.

“인간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클라이맥스는 절망이다.”

해서 저자도 이 대목에서 이렇게 다시 갈무리한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p.33)

어떤 문학 비평가는 기형도를 자학사관에 빠진 허무주의자라고 혹평한다. 그의 시어들을 살피면 일견 그런 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객관적 자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형도는 김현이 말한 대로 그의 유년 시절의 가난과 우울함의 굴레들을 그만의 독특한 언어를 수단으로 미학화했다고 보는 것에 서평자는 손을 들어주고 싶다.(p.144) 이런 푸근한 용인을 전제한다면 기형도는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즈머에 가깝다고 본다.

그는 ‘흔해 빠진 독서’에서 이렇게 시술(時術)했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p.41)

어떤 의미로 보면 그는 자기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이 시인인 이유는 노래가 삶이었으니까. 이 대목을 읽다가 갑자기 유재하와 김광석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이 겨울 어두운 창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해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하략)”(p.69)

저자의 시집을 읽으면서 참 많이 공명(共鳴) 되었던 구절이다. 목사로서 해야 하는 여러 사역 중에 장례 예식을 인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목양의 한 실례이다. 죽음 앞에서 불신자든 신자든 아직 건방진 자를 서평자는 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성서도 셋이 아들을 낳은 뒤에 에노스(인간은 죽는다.)라고 지었고 그 이후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창세기 기자가 기록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우리는 곧바로 가야하는 것을 모르게 서 있는 직립의 뼈로서 아등바등하는 어리석음에서 조금도 빠져 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서평자는 목사이기에 한 가지만 덧붙이련다.

시인은 ‘나무공’에서 기막힌 촌철살인과도 같은 어록을 남긴다.

“이봐,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죽어 있는 것뿐, 이제 자네 소원대로 되었네.”(p.104)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과감한 사형선고를 듣는다. 그런데 나는 이어지는 시인의 시어를 읽으면서 가슴이 졸여든다. 그는 이렇게 썼다.

“어느 교회의 검고 은은한 종소리 행인들 호주머니 속의 명랑한 동전 소리 모든 젖은 정신을 꾸짖는 건조한 저녁에 감사하자.” (p.105)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한 것은 맞다. 허나 왜 그 교회의 종소리가 검은 종소리인가? 그 종소리는 시대의 젖음을 말리지 못하는 무미건조함의 허약함 때문은 아닐까? 교회가 젖은 정신을 나무라지 못하니 건조한 저녁에 감사하자고 시인은 에두르지 않는가?

나는 이 구절을 읽다가 누가복음 19:40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언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문 앞에 서서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음란함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날마다 외쳤다. 그 모습이 딱해 보였던지 순진한 꼬마가 다가와 아무도 듣지 않는데 왜 헛수고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언자가 대답했다.”

“저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김기석 목사의 글인 ‘오래된 새 길’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이 글이 기형도의 시어와 맞물리는 것을 느끼는 것은 목사의 기쁨인가? 비극인가?

시집을 들고서 음미할 만한 시어들은 되새김질 했다. 나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사족을 단다. 유독이 이 책의 사족은 이렇게 달았다.

“평가 불능”

평가될 책이 아니라 품어야 할 책이기 때문이었다.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메이지 대학의 사이토 다카시 교수의 말이 참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