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존 비비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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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순전한 나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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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5-09-24 17:4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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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비비어의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순전한 나드 간) 를 읽고
4-5년 전에 섬기는 교회에서 시스템으로 진행하는 양육 과정의 필독 도서로 지정한 저자의 ‘순종’ 이라는 책을 의무적으로 사역자들에 읽히게 했던 기억이 있다. 숙제라는 단어는 언제나 부담이 되는 것처럼 양육을 받던 지체들이 마지못해 이 책을 읽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러나 읽고 난 뒤의 소회들은 참 의미 있게 그리고 은혜롭게 또 하나 첨가하자면 영적 부담감을 갖고 읽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강평이었다. 며칠 전에 허리를 삐끗했다. 3일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마치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 읽기도, 주중 사역도 다 내려놓아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 무력증에 빠진 사람처럼 3일을 보내던 어간, 서재에 꽂혀 있기는 하지만 그냥 말 그대로 갇혀 있었던 책들을 눈 팅(?) 하다가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구입한 날짜를 보니 세상에, 2006년 2월 1일!, 미안한 마음도 있고, 딱히 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래도 책 읽기 밖에는 없어 이 책을 손에 들었다. 그런데 나에게 비상이 걸렸다. ‘순종’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이 책을 손에 잡고 서서 읽는 동안 딴 짓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 존 비비어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 책은 편협적인 보수주의자들이나 아니면 근본주의자들이 읽으면 교회와 목사에 대한 안티의 탄생이라고 존 비비어에 대하여 맹폭격을 가할 수 있는 글들로 넘쳐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무 정확하게 그들의 오류들을 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류를 집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옳지 않은 일련의 행위들에 대하여 회개하며 돌이킬 것을 강요하며 맹폭한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그 공격이 천박하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반대를 위한 반대, 비난을 위한 비난, 공격을 위한 공격으로 상대방을 몰고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비어는 교회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그들의 비성서적 일탈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서평자는 그의 일갈들에 대하여 지지의 손을 들고 싶어 졌다. 예수께서 당시 종교적인 기득권을 갖고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며 본인들은 호의호식하던 종교주의자들에 대하여 무섭게 몰아치셨다. 그 몰아침이 비비어의 글에 그대로 담겨 있다. 더불어 오늘의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현장 목회에 몸을 담고 있는 자인 서평자도 이 부분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인데 서평자가 품고 아파하는 것을 저자가 대신 이 책을 통하여 통타하고 있는 것 같아 대리만족의 희열을 느끼기 까지 했다. 저자는 이 책을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전진한다. “예언자 요엘이 예견한 부흥은 이전의 부흥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 부흥은 세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교회의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부흥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와 우상을 숭배하는 교회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웅장한 건물이나 번쩍이는 외형에 관심이 없다. 세상 사람들조차도 교회 안에 흐르는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서만 교회에 이끌릴 것이다.”(pp5-6)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갈파한다.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인간 문제를 해결하는 값싼 해결책으로 대치하였다. 목회자들은 인간들이 원하는 필요를 채워주는 예수 팔아먹는 장사꾼으로 전락했다.”(p.6) 나는 비비어의 이런 공격적인 선포와 발언에 적지 않게 놀랐다. ‘순종’에서 그가 말했던 어투와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편치 않는 가운데에서 서서라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는 그의 갈파들을 읽으면서 강력한 기름부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 책을 절대로 가볍게 다루지 말라. 이 책은 성령님께 감동을 받아 적은 글이고, 이 책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하나님의 울부짖음이며, 이 마지막 때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실이다.”(p.7) 그렇다. 나는 저자의 진정성을 느끼며 이 책을 서서 읽었다. 과연 어떤 메시지가 나에게 임할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가 이미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에서 예고되었음을 확신하며 세례 요한의 외치는 자의 소리를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3:1-3) 이 메시지를 전달한 요한은 그는 귀에 듣기 좋은 소식을 전한 자가 아니라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저자는 밝힌다. 비비어가 이 세례 요한의 정체성을 밝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 너무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이 설교를 듣고 좋아할까 하는 데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다. 그들은 일부러 인기를 얻으려고 하고 교인들이 자신의 설교를 어떻게 평가하는 지에 지나치게 민감하다.”(p.27) 이것이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저자는 이렇게 역설한다. “목회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하늘의 지혜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올무가 된다.” (p.28) 세례요한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공급받아 그대로 증거 했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고 강조하면서 오늘 교회에 세례 요한의 영성과 기름부음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 저자는 이 부분에 천착할까? 그는 아마도 이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던 것 같다. “교인들의 귀를 간지럽게 해 주는 그 이상의 말씀을 전할 설교자들의 출현이 아쉽다. 교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하는 말을 전하는 그런 설교자들 말이다. 교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처인 것을 깨닫는 교역자들이 필요하다.”(pp.31-32) 저자의 글을 읽다가 이 책이 출간된 시점이 2005년경으로 보이는데 미국 교계의 영향력이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설교가인 존 비비어가 이런 발언을 하면서도 그의 본연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 정말로 의외로 다가왔다. 마치 세례 요한이 설교할 자리를 가리면서 설교하지 않은 것처럼 존의 이 글들이 마치 세례 요한의 외침처럼 서평자에게 들렸으니 말이다. 존 비비어는 제도권 안에서 그래도 활동하고 있는 사역자이다. 그는 독불장군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그가 쓴 기독교적인 작품들이 많은 독자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의 불의 외침은 거침이 없어 보인다. “오늘날 현대 목회는 지나치게 정치적이 되어버렸다. 목회자들은 도에 넘치게 정치적 수완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모든 필요를 충족해 주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바른 길을 인도하신다는 단순한 믿음을 가진 주의 종들을 찾고 계신다.”(p.35)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말이던가! 저자의 일성은 가슴 떨림으로 다가온다. “모든 목회는 사람 중심의 목회에서 하나님 중심의 목회로 전환할 때이다.”(p.36) 참 힘든 충고이다. 저자의 이 충고는 현장에서 26년을 뛰며 사역해 오면서 숨 가쁘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슬로건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또 앞으로 남은 사역 기간 동안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허나 목양의 필드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저자는 이 책에서 칼에 맞을 만한 독설을 증언한다. “오늘날 목회자를 조장하는 것은 당회이지 성령님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강간에 선 많은 현대의 목회자들은 당회에 의해서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이다.” (p.27) 총 맞을 발언이다. 과연 이런 총 맞을 목회를 할 수 있는 목회자가 오늘 얼마나 될까? 저자는 세례 요한을 조명하면서 그를 여러 가지로 평가한다. ① 명함을 내밀면서 직위를 자랑하는 그러한 목회사역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p.41) ② 종교적인 단체 안에 존재하는 잃은 자들에게 보내진 예언자 (p.49) 이러한 미션을 받은 요한이었기에 책은 그는 오실 주의 길을 예비하였던 예언자적인 사명자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것을 전제로 저자는 오늘의 교회도 세례 요한의 마음을 품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목회자는 그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정이 이런 대도 오늘날의 교회는 기형적인 신자들을 양산하고 있음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고 있다고 아쉬워하는 저자의 일침들을 또 나누어보자. “현대 목회는 참된 회개를 전하지 않기에 대충 얼렁뚱땅 예수를 믿는 무리들을 형성시키고 있다. 그 결과 교회는 수많은 죄들과 문제들로 범벅이 되어 있다.”(p.51) “이런 엉터리 신자들을 양산한 교회들은 설교를 듣기 좋아하고 말씀공부도 하기 좋아하지만 자신들의 삶에 그것들을 적용하지 않는 그래서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는 사람들로 즐비하다.” (p.52) 이런 아픔을 강조한 비비어는 이렇게 일갈하였는데 비장하기까지 하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만나보고 싶어 하는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가 아니라 거룩한 교회이다.” (p.53) 지금까지의 내용 이해만 하더라도 존 비비어가 관심을 갖고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향하여 외치고자 하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무엇인지를 서평자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교회든, 목회자든, 성도든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순교적인 영성을 갖고 반드시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하나님의 식’ 이다. ‘하나님의 방법’ 이다. 전적으로 동의하고 두 손을 들어 지지를 표한다. 서평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이런 류의 설교를 많이 전했다. “하나님은 만들지 말자.” “성령의 은사를 만들어 내는 불신앙과 맞서 싸우자” 하나님을 가장 욕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손으로 조정하려고 하는 짓이다.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고분고분한 하나님으로 내 수족에서 갖고 놀 수 있는 하나님으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고분고분하지 않을 때 CS 루이스가 갈파한 그대로 서슴없이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는 일까지 자행하는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마크 뷰캐넌은 이런 일에 대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 영역에 들어와 나를 불편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경계지역 말뚝받기’라고 까지 정의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앞에서 전제했던 교회의 교회답지 못함, 성도의 성도답지 못함, 그리고 목회자의 목회자답지 못함에 대해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목회자들은 사람이 두려워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강조한다.(p.70) 교회가 성령의 조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많이 내는 자에 의해 조정되는 것에 대해 아파하고 통회하며 돌이킬 것을 종용한다.(p.73) 서평자는 타협하고 또 타협하고 있는 자들을 향한 저자의 이런 독설이 독설로 들리지 않고 세례 요한의 외침으로 들렸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 또한 그렇게 긴장하며 목회를 하겠다는 에두름의 지지 표현이다. 설교자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워도 진실을 말하는 자들이어야 하고 또 그렇게 말한 대로 사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래야 훗날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 떠나라’는 벼락을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 이런 내용을 첨가한다.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온 부자 청년을 향해 하셨던 기사 말이다. 그는 이 기사를 분석하며 기막힌 교훈을 내놓았다. “설교를 하는 것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부드러운 것이 되어야 하지 슬픈 기색을 띠고 교회를 떠나게 해서야 되겠느냐? 고 반문하는 자들에게 말한다. 바로 그러한 부드러운 설교가 오늘날 현대교회에 판을 치고 있다. 만에 하나 그러 부드러운 설교가 정답이라면 예수님께서 목회할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을 조정하는 기술이 발달된 사회이다. 그러나 그 사회에 진리는 어디로 갔는가? 목회의 성과나 목회의 성공은 진리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하는 것이지 테크닉에 근거해서야 되겠는가?”(pp.116-117) 100%, 1,000% 공감하며 동의한다. 하나님의 식이 무시되는 목회, 하나님의 방법이 거절되는 교회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렇게 갈파했다. 축복도 우상이 되는 시대는 출애굽 시대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라고. 그래서 서평자도 저자의 일견에 동의하면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가끔은 하게 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불편함과 안락하지 않게 하심과, 부족함은 최고의 복일 수 있다고. 서서 읽은 이 책, 몸이 불편하여 많은 부담감을 갖고 읽은 책, 잘못하면 그냥 책 서고에서 장식용으로 사장될 뻔했던 이 책을 하나님이 골라 주셨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충격은 이렇다. 이 책은 2005년에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이다. 지금부터 10년 전에 미국교회의 영적 기상도가 오늘 2015년의 한국교회의 영적 기상도를 어쩌면 그렇게 빼다 놓은 것처럼 기막힌 닮은꼴을 하고 있는가? 의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을 읽은 뒤의 소회가 다윗이 고백한 고백을 다시 하게 만든 것이.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8-10) 뼈가 꺾인 것 같은 아픔을 느꼈지만 왜 이리도 저자의 한 말, 한 말이 시리도록 시린 기쁨의 소리로 다시 들려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는지 무척이나 감사한 독서 여행을 마친다. 주여,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