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니콜라스 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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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청렴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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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5-11-05 18:0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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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청림출판 간, 2014년) ‘The shallows’ 즉 ‘천박한 사람들’, ‘얄팍한 사람들’ 이라는 원제가 제밀 먼저 눈에 들어와 책을 선정했다. 근래 들어 목양의 현장에서 개인적으로 서평을 쓰고 있는 나는 물론이거니와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 역시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치열하게 싸워야 대상을 이런 자들로 지적했기 때문에 조금은 더 지적인 이해를 가져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미래학자 카는 The shallows’ 들의 치명상은 무뇌(無腦)가 되도록 만들어가는 인터넷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생각하지 않는 삶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해서 무뇌를 가진 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천박해지는 것과 동일선상에 놓고 고발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목사로 살아가는 서평자의 고민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천박한 사람들’이 되고 있다는 비극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가리켜 극언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공격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의 폐쇄성을 이유로 들고 있다. 폐쇄성은 곧바로 배타성, 비이성적 집단 등등으로 외연이 확장되어 기독교는 상종하지 못할 개독 집단이라고 성토하고 있는 바, 물론 서평자는 그들의 공격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독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가 결코 이성을 무시하는 종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여타 영역에 사람들에게 비이성적인 자기들만의 리그에 빠져 있는 집단이라는 지적이다. 나는 이 지적에 대하여 수긍하고 동의하는 편이다. 여러 가지로 그들의 공격적 지적에 동의를 표하는 근거를 말할 수 있겠지만 지면의 궁색함을 핑계로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서평자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카의 책의 원제처럼 언제부터인지 기독교가 치열하게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기는 종교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논쟁의 필드가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개신교 영성은 중세 가톨릭이 걸었던 히어라키(hierarchy)에 대한 전복을 기초로 한 영성이다. 해서 이 영성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주신 로고스를 레마로 연결하여 사유하고 또 사유함으로 얻어진 지성적 결론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로 도출된 영성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오늘 우리 교회가 이런 깊은 사유함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아 서평자는 카의 도발적인 원제가 바로 오늘 우리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선전포고 같아 아프고 섬뜩했다. 물론 카의 시선은 교회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뭐 그런 머쓱함이 강하게 나를 때렸다. 카는 책의 시작을 알리면서 이렇게 논타(論打)했다. “나의 뇌는 굶주려 있다. 뇌는 인터넷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보가 제공되기를 바랐고,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질수록 더 허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때조차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링크를 클릭하고, 구글에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싶어 했다.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했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는 내게 살과 피와 같은 워드프로세스가 되었고, 인터넷은 나를 초고속 데이터 처리기기와 같은 물건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마치 인간의 모습을 한 할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이전의 뇌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어찌 카만의 이야기일까? 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현대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는 조금 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확장한다. “인터넷 사이트와 서비스에 익숙해지고 의존하게 되면서 나의 습관과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있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나의 뇌가 기능하는 방식이 바뀐 둣했고, 나는 한 가지 일에 몇 분 이상을 집중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중년에 들어서면서 머리기 무뎌져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뇌가 단순히 일시적으로 표류하는 정도가 아님을 깨달았다.” 서평자가 카의 이 고해성사 같은 고백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미래학자이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IT 계통에서 선구자라는 호칭을 받고 있는 소위 인기 강사이며 잘 나가는 지식인이다. 그런 그가 자기의 삶의 도구인 IT의 모든 영역과 관련된 하드웨어적인 것은 물론 소프트웨어적인 일체의 것들을 대상으로 그것들이 인간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여 무뇌로 만들어가는 무서운 무기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충격적이다. 저자는 인간의 뇌가 유연성이 있는 것임에 동의한다. 그는 영국의 유명한 생물학자 J.Z YOUNG 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인간 뇌를 소개한다. “인간의 뇌 세포는 사용할수록 말 그대로 더 커지고 발전하며, 사용하지 않을수록 줄어들거나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모든 행동은 신경조직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긴다고 볼 수 있다.” 이미 학창시절 생물시간에 많이 들었고 배웠던 래퍼토리이다. 그런데 실상 이 인지된 생물학적 뇌에 대한 성질을 얼마나 유용하게 개인에게 적용하여 활용하고 있는가? 를 질문할 때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이 교과서적인 뇌의 이용에 부합한 삶을 살고 있다는 평가에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아주 자연적 상태에서도 인간의 뇌는 사용되지 않거나 폐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가장 일반적인 뇌의 구조 중에 전두엽을 통해서 기능해야 할 뇌의 활동이 IT 기기들로 인하여 동작 그만 상태가 되어 더 더욱 인간의 뇌가 무력해 지고 있음을 고발한 저자의 갈파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또 하나, 저자가 인터넷에 의해 지배되고 잠식된 또 하나의 기형적 형태가 책 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퇴행을 유발한다고 고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에게 문자가 주어진 이래, 사람의 뇌구조가 점진적인 진화를 거듭할 수 있었다는 보고들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 공통으로 개진하는 일 중에 하나이다. 문자가 글쓰기라는 인간 소통의 결정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먼 조상들의 구어 세계는 너무 허접하여 어쩔 수 없는 ‘감정적인 몰입’이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었기에 상당히 피상적인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문화비평가 마샬 맥루한은 지적했는데 이 말은 역으로 말한다면 오늘의 언어 수준은 고대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탁월성을 갖고 있다는 말과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저자는 상당한 부담감과 위기감을 표출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인터넷을 통한 일체의 소통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이 이런 점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인간다운 인성들을 발전시켜 나아가도록 만드는 글쓰기, 글 읽기를 고사시키는 원흉과도 같은 괴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사상가로 유명한 월터 옹은 ‘구술 문화와 문자문화’에서 글쓰기에 대한 중요성을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 “글쓰기 능력은 매우 중요하며 인간 잠재력의 보다 완벽하고 내적인 실현을 위해 진정 핵심적인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기술이 발명된 이후 글쓰기가 글 읽기로 승화되었다는 점에서 이견을 표할 사람은 없다. 이 점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소설가이자 역사가인 제임스 캐럴은 “조용히 독서하는 행동은 지식을 얻은 자가 지식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자의식의 표시이자 수단이다.”고 말할 정도로 인간의 지적 성취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글 읽기임을 밝히고 있다, 서평자는 케럴의 지적에 역시 이견을 달지 않는다. 허나 그의 표현이 제반 평이할 정도의 갈파라고 생각하기에 부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이 자기가 취하지 못한 또 다른 지성의 세계, 영역, 언어, 문화, 종교 등등 수없이 이어지는 필드에서 지적 요소들을 가장 적극적 형태의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행위는 분명히 글 읽기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에서 인간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최고의 핵심적 가치는 독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저자 역시 이점을 인정한다. 그러기에 인터넷에 잠식 당한 오늘날의 인간의 뇌에 대하여 심히 두려워한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독자들은 이야기에서 각각의 다른 새로운 상황과 마주칠 때마다 정신적인 자극을 받는다. 글에서 행동과 감각에 관한 상세한 부분을 파악해 과거의 경험에서 얻는 개인적 지식과 결합한다.” 이 말은 인간 뇌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점차 섬세해지는 지적인 활동을 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행위는 인간의 뇌를 기계화시키는 경우이다. 이 기계화는 인터넷의 세계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이 관점에서 인터넷이 우리들의 뇌를 혹사시킨다는 저자의 지적은 그래서 옳다. 뇌가 혹사를 당하면 산만해 진다. 자연 과학자들 중에 정신적인 질병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일부는 뇌를 혹사하게 될 경우 자칫 ADD 즉 ‘주의력 결핍증’ 이라는 정신적인 치료를 요하는 장애로 발전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도 있다. 인터넷 웹서핑의 치명상은 멀티태스킹이다. 멀티태스킹을 더 많이 할수록 덜 신중해지고 문제에 대하여 덜 생각하고 덜 판단하게 된다. 사람들은 독창적인 사고로 도전하기보다는 관습적인 생각과 해결책에 의존하려는 가능성이 매우 큼을 저자는 우려한다. 재론하지만 이런 화두를 던지며 인터넷 세상을 즐기는 자들이 생각하지 않는 무뇌로 굳어질 가능성을 타진하고 경고하는 당사자가 IT 업계의 대가인 저자라는 점이 더 더욱 아이러니하기에 흥미진진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세계적인 IT 전문 기업인 구글을 언급한다.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구글의 선전(善戰)을 이론적으로 전개한다. 동시에 지금도 막강한 제국을 형성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는 구글 제국의 사이버 점령 시나리오는 앞으로 더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전개될 것을 저자는 홍보 아닌 홍보의 성격으로 설명한다. 저자의 이론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섬뜩해진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수많은 나의 삶의 부분 부분을 잠식해 버린 구글은 거부할 수 없는 나의 주군이 된 것 같다고 저자는 인정한다. 니콜라스 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간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본인 스스로가 IT 계의 전문가이면서도 기계적인 피조물에게 굴복하고 있는 인간의 자존감 무너짐 현상을 경고하고 있는 그의 지적 기여와 헌신에 현직 목사로 뜨거운 그리고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고 싶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성경을 하나 인용한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편 115:4-8) 서평자도 상당의 시간을 인터넷과 SNS의 세계에 잠식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어떤 의미로 이 책의 서평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논한다면 자신이 없다. 감히 어불성설인 듯 보여 겸연쩍다. 그러나 객토하자면 이 외침만은 반복하며 경계하려고 한다. “사유함, 성찰함, 그리고 고민함은 온라인상이 아닌 오프라인 상에서” 쉽지 않은 전쟁이다. 하지만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 인간되기 위한 마지막 보루가 아닐까 싶다. 결코 쉽지 않았을 니콜라스 카의 용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