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8.27 말씀 요약지2024-04-23 16:2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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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3번째 강해)
제목: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고린도전서 10:23-33

  본문 3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의 삶의 목적, 바울이 그 동안 본인이 공부하여 축적한 일체의 지성적인 과정의 지식의 총아들을 그는 한 가지의 목적을 두고 사용하고 이해했던 정황들이 그의 서신서는 물론 그의 선교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1/2의 내용들을 접하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여’(SOLA DEO)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에 아주 대표적인 실례 중에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부터 시작된 바울의 불편한 진실은 고린도교회의 엘리트층의 신자들은 매우 불쾌하게 했든지 아니면 곤란하게 했든지 둘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불편한 진실을 본문이 시작되는 23절에서 다시 복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인이 천명했던 고린도교회 엘리트신자들을 향한 공격적인 발언을 다시 상기하면서 그가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에 대한 조금은 구체적인 정황 설명을 이어지는 24절에서 언급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바울의 의도는 대체적으로 참 선한 것이었습니다. 주지했던 것처럼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는 오늘의 단어로 말하면 乙의 위치에 있었던 나약한 자들이 다수였습니다. 이들은 항상 비주류의 위치에서 엘리트주의에 있었던 부유한 자들에 의해 소외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항상 당하는 자의 아픔을 견뎌야 했습니다. 바울의 신앙적 지지는 바로 이들을 위한 것이었고, 항상 이들의 대변자 역할도 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기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위한 삶이어하는 것입니다. 내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식이고, 하나님의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본문 25-30절에 나타난 바울의 태도를 보면 고기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사서 드시라는 표현, 지나치게 양심에 관하여 소심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 당신 앞에 차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먹으라는 표현, 왜 나의 자유가 누군가 다른 사람에 제한된 도덕심 때문에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등등의 표현들이 혼란스러움을 주지만 이러한 바울의 행보와 발언에 대한 해석을 접근하려면 다른 성경 텍스트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교훈 중에 마태복음 5:38-42절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을 들여다보면 구약과 신약의 메시지가 모순된 듯한 모양새로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대로’라는 주님이 여기에서 인용하신 구절은 소위 신학적인 용어로 ‘동해보상법’이라는 출애굽기 21:22-25절의 구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구절의 적용 대상은 22절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임신한 여인을 싸움 중에 낙태시킬 정도의 상해를 입힌 자에게 떨어진 무거운 대가성 결론을 정한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무거운 출애굽기의 구절을 인용하신 이유는, 마태복음 5:38절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너희가 들었으나’입니다. 구약이 천명한 상황의 역전이 있을 수 있음을 열어놓으시고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을 새롭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법은 정반대의 개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제는 주님이 동해보상법을 폐지하시고 새로운 사랑과 용서의 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해석을 성서중심의 해석이라는 입장도 견지하셨지만 또 하나 상황 중심적인 해석이라는 장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신앙인들이 절대로 따라가지 말아야 하는 사상 가운데 하나가 근본주의입니다. 근본주의라는 말은 이미 아주 보수적인 사상으로 학습된 자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무서운 사상인데 가장 극단적 근본주의를 예로 든다면 축자영감설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수구적인 사상입니다.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를 성서기자가 하나님의 영이 불러주는 대로 썼다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기록한 것임을 부인하면 그건 이단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한 문자, 한 문자는 절대로 오류가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그건 생떼이고 무지함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번역상의 오류가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이러한 번역상의 오류가 있는 것은 성경은 구전으로 전해 오던 하나님의 신탁들과 수많은 역사기록과 예언자들의 선언들을 성서 기자들이 손으로 직접 수기로 받아 기록한 글들입니다. 그러니 문법적인 오류, 앞뒤 배열의 모순, 이 번역 사본과 저 번역 사본에서 보이는 상이성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자들처럼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구절을 무기삼아 자간 하나하나가 완전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어 무지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이 하는 일은 이렇게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기록들 중에 잘못된 해석, 번역, 잘못된 이해들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전제할 때 우리들이 당연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이해는 성서를 성서로 푸는 일차적인 해석과 더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 역사적 배경, 저자의 의도, 당시 문자의 학문적의 의미 등등을 연구하여 그 시대에 맞게 상황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생각하여 해석하는 것을 불신앙적인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도리어 너무나 불신앙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출애굽기에 기록한 동해보상법의 판을 뒤집어 업으셨다고 해서 구약 시대의 그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상황과 배경에 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이제는 주님의 도래 이후에 사랑과 용서가 더 필요한 시기임을 예수께서는 직시하셨기에 뺨맞은 이야기도, 옷 이야기도, 오리 십 리 이야기도 끄집어내신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울이 말한 본문도 해석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양상은 바울이 그동안 공격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고린도 교회의 엘리트주의자들을 배려한 본문 텍스트라는 사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너무 양심에 대해 소심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을 무려 3번에 걸쳐 반복한 것이고, 고린도 지역의 아고라(시장)에서 팔고 있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들을 먹는 것에 대하여 너무 께름칙하게 생각하지 말라고도 한 것이고, 심지어는 불신자가 초청한 식사 초대에 가서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으라는 자유함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신학적 목적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지자들(가난한 신자들, 비주류에 있었던 별로 배우지 못했던 자들)에게 잘못하면 비난의 화살을 맞을 수 있었던 모험을 시도한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을 희소화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본문 31절).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자들의 구성 분포도는 각기 달랐습니다. 헬라인, 유대인이라는 출신 성분의 차이, 헬라적 다신교주의자, 유대적 유일신론자, 소아시아라는 지방을 국가권력과 군사력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적인 우상숭배자, 무신론자 등등의 다양한 배경 속에 있었던 자들이 모여 있던 공동체가 고린도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보는 것처럼 결코 녹록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고전 9:20-22, 빌4:11-12, 롬1:14절).
  바울이 이렇게 카멜레온식의 반응, 사귐, 교제, 경험들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목적 때문에 8장에서는 엘리트주의자들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던 자들을 위한 메시지를 선포했고, 오늘 본문 10장을 마감하면서는 그 엘리트주의자들을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한 메시도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를 나오십니까? 여러분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지금 우리의 신앙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합니까? 내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본문 31-33절)고 말합니다. 내 영광을 위해 사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