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7.23 말씀 요약지2024-04-23 16:2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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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8번째 강해)
제목: 치열함
본문: 고린도전서 9:19-23

  신명기서의 중요한 교훈은 ‘율법을 새기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사문화시키는 것에 대한 경종이자 율법을 치열하게 지키며 살라는 권고입니다. 치열함이 사라지면 습관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매너리즘에 빠지고 무감각해 집니다. 또한 몰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참담한 인생을 삽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치열함은 어찌 보면 신앙인을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바로미티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인 됨’이라는 그의 전 관심이 있었습니다(본문 19절). 설령 그 대상자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상식을 상실했어도,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바울에게 누명을 씌워 공격을 했더라도,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인색하기에 짝이 없었던 자들이었어도, 그들이 복음으로 은혜를 받고 회복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만 있다면 그는 사도로서의 권위가 아닌 종으로서 본인의 위상이 깎여도 괜찮다고 역설하며 사역을 감당했음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고린도교회라는 정말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비정상의 교회는 사역하기가 녹록하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인적 구성원 자체가 만만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교만한 자들을 비롯하여, 풍부한 물질을 무기삼아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인간 같지 않은 교회 내의 불신자들도 수두룩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출신 성분이 다른 자들로 엮어 있었습니다. 유대 출신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토종(이방 출신) 크리스천들이 보이지 않는 세 다툼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마치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구제의 건으로 분열의 위기를 겪었던 것처럼 유대적인 성향의 그리스도인들과 헬라적인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있었기에 교리적인 민감함으로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본문 20-21절에서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의 고린도전서 주석은 상당한 신학적 성찰을 줍니다. 첫째는 바울 스스로가 율법 아래에 있다고 표현한 것이고, 둘째는 율법 없는 자와 같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바울의 이 발언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이해에 대한 접근은, 바울은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로 들어갔다고 선언합니다. 경우에 따라 이 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수신자들 대부분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로 들어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되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에 반하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에는 배도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런 위험한 발언을 한 것인지 데이빗 프라이어는 바울의 이 행위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인종적 편견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선언한 것이다.” (p,216)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는 사역을 하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선민의식, 혹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반 예수적인 복음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영락없이 이방인 중에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의 대부(代父)요 지탱대요 그들만의 사도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그는 유대인들에게서는 같이 하지 못할 배신자요 혹은 변절자로 낙인찍히는 요주의 인물로 각인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말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을 구원시키는 사명 때문에 부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조국인 유대인들을 구원시키는 사역,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일에 대하여 손 놓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단적인 증거가 로마서 9장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져도 상관없다는 폭탄 발언을 할 정도로 조국을 사랑한 자기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가 바울은 우리 편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기에 그에게 있어서 이방인들만을 위한 사역자라는 인종적인 편견을 깨뜨려야 할 필요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나는 이방인들만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형제들을 위해서도 부름을 받은 사람임을 분명히 선포한 것이 바로 이 문구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실제적으로 행동한 몇 가지의 실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아마도 디모데를 제자 삼을 때 그의 어머니인 유니게가 유대인이었기에 그녀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줄여주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일, 겐그레아에서 나실인으로 머리를 깎은 일일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머리를 깎은 나실인으로서의 서원 행함 역시 구원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했기에 그리 했을 것입니다. 이런 행동들은 오히려 오늘 본문 20절에 기록되었듯이 율법 아래에 있는 자 즉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바울의 문화적인 접근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담론에 대한 해석에서 바울은 또 하나의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1절).
  율법 없는 자란,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은 앞에서 전술한 유대인들을 위한 전도법과 동일한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구원을 받는 조건에 있어서 율법에 대한 무용론을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인의 모드로 그들에게 나섰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행동은 역시 인종적 차별과 편견에 대한 벽을 완전히 부수는 혁명과도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을 목숨처럼 여겼던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경악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 말한 선언은 과히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해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편한 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로마서 7:5-6절). 율법을 묵은 조문이라고 정의한 바울의 이 선언은 당시에는 목을 건 발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율법에서의 해방 선언은 그의 서신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철저하게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입니다. 데이빗 프라이어는 자신의 주석에서 “바울은 진정한 영적 카멜레온이었다.” (P,218)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역도(事役圖)는, ● 복음을 위한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에게 보이는 것은 한 가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목적말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 19-23절에 무려 6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얻다’입니다. 헬라어 ‘케르다이노’의 번역인 ‘얻다’라는 단어는 22절의 ‘쏘조’와도 대치됩니다. 통상적으로 ‘쏘조’는 육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를 구출해 주는 의미보다 조금은 더 숭고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영혼의 구렁텅이에서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행위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구원을 말할 때 사용되는 고유적 단어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바라보았던 자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세속적 가치를 위해 살았던 자가 아닙니다. 그는 오직 복음으로 무장한 예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가장 민감한 지역에서 가장 민감한 방법을 동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에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어진 예수라는 복음에 사로잡혀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자였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가 복음의 현장에서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알려주는 귀한 감동을 줍니다.
  바울이 사역했던 현장이나, 오늘 우리가 사는 현장이나 공히 정글 같은 세상이 맞습니다. 정글 같기에 삶이 치열한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의 정글에서 사는 우리가 선택해야할 영적 선택은 더 치열한 복음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은 선택해야 하는 운선순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무장하고 있었던 복음은 마땅히 제일 우선순위였습니다. 이 영혼도 살려야 하고, 저 영혼도 살려야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도 살리고, 저 영혼도 살리는 유일한 것은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만들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무기는 치열한 삶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치열한 무기입니다. 바울은 이 치열한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도 이 무기를 사용합시다(로마서 1:16-17). 복음으로 무장하여 치열하게 정글 같은 세상과 맞섭시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본문 2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