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살면서 참을 수 없는 일을 당했던 일을 믿음으로 극복한 사례 소개하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ccm) ●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복음송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은? ● 본문: 고린도전서 9:1-12 1) 본문 9장에서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인들 간의 미묘했던 긴장관계를 사도권과 관련하여 말해 보자. ①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입장: ② 바울의 입장: |
2) 바울이 자기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던 이유는? *본문 12절을 중심으로 말해보고, 담임목사가 설교한 메시지의 교훈과 연관하여 교훈을 삼아보자 ⓵ 12절을 참고해서 ⓶ 테제와 관련하여 |
3) 적용하기 ① 내 시각의 주된 흐름: ② 하나님의 시각의 주된 흐름: ③ 나는 어떤 흐름에 편승했는가? ⓸ 곧추 세우기 | 사역하기 (WORK)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다음 세대 제자훈련과 비전 트립과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건강과 치유를 위하여 (서정수, 최정희, 문혜경, 김문수, 강영자, 정시온) ●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서혜린, 이장규, 장종호, 이한빛, 이유정, 김양진) ●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 1부 반주자를 위하여 ●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7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6번째 강해) 제목: 범사에 참는 것은? 본문: 고린도전서 9:1-12
오늘 말씀의 주제는 ‘권리포기’입니다.
본문 1절에서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는 반어적인 문법적 표현으로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문제를 제기한 내용이 4가지입니다. ⓵ 나는 자유인이다. ⓶ 나는 사도이다. ⓷ 나는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 ⓸ 나는 그 부활의 주를 너희에게 증언하여 너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4가지를 반어법적 문법으로 구사하며 초강력 메시지의 도구로 사용한 것을 김판임 교수가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은 오래 전부터 고린도교회 교인들로부터 들어온 말 중에 괴로움을 당했던 말이 있었다. 바울은 스스로 벌어가며 사는 걸 보니 사도가 아니다.”(김판임 저, ‘고린도교회와 바울’ 동연 간, p,131) 김판임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지명되지 못한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도 사도로 인정받지 못해 마땅한 사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베드로와 같은 레벨의 사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고린도교회의 분위기였다.” 본문 5절의 고백 속에 바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견디며 주의 사역을 했는지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C.K 바레트 영국 더럼대학 교수는 자신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5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믿는 자매들을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냐는 반문은 사도들도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말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가정을 이룬 사도들은 마땅히 가족 부양의 책임을 져야했는데 교회가 그런 일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사도들은 그 권리를 누렸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포기했다.” 즉 바울이 다른 여타 사도들의 권리를 소개한 이유는 바울 스스로도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사도였다는 반증입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더 더욱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본문 2절).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본인의 이런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는 듯한 메시지를 강하게 역설한 까닭은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복음의 능력으로 회심시킨 자들이 모여 이룬 교회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중해 여러 도시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 중에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회(갈라디아 교회)에 비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더 더욱 신뢰함으로 지지해 주어야 마땅한 공동체가 고린도공동체이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기가 벌어서 자비량 선교를 하는 것을 보니 그는 분명 사도가 아니라고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을 고린도교회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에 이릅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본문 7-10절). 이 구절은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적절한 사례와 선교를 위한 물질적 지원을 해야 하는 정당성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변증한 것입니다. 바울은 군인, 포도원의 농부, 양치는 목자라는 세 종류의 직업을 끄집어냅니다. 군인은 전쟁을 위해서 무기와 군복을 받습니다. 과일을 생산하는 농부는 자기가 생산 한 과일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가지 않습니다. 목자는 자기가 돌본 양의 젖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먼저 취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통해 노력한 것에 대한 마땅한 사례, 그리고 대우받음은 너무나도 사도들에게 정당한 일임을 바울이 적극적으로 대변합니다. 또한 바울은 신명기 25:4절의 토라를 인용합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면 안 되는 것은 미물인 소도 일한 대우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신명기 율법을 제시함으로서 바울은 물론 그의 동역자들의 사역은 마땅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대우를 받을 만한 충분한 성경적 근거가 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당할 만한 이유가 없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9-11절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1절까지 기록한 바울의 선언은 자신이 내세워야 할 권리는 충분한 권리임을 고린도교회에 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 12절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신분으로 인해 고린도라는 교회 공동체에 충분한 물질적인 지원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엄청난 고통의 길을 갔습니다(고린도후서 11:23-27). 그는 이 참음의 영역을 ‘판타’ (범사-ALL THINGS) 라고 정의하였는데 즉 자기에게 일어난 일 중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일체의 일들에 대하여 참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12절에 ‘참다’ 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스테고’는 원래의 의미가 ‘지붕을 덮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말도 안 되는 누명, 말도 안 되는 핍박, 말도 안 되는 요구,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폭력을 덮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까닭은 결점이나 흠결, 남에게 책잡힐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본문 12절b)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증언에 장애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참았습니다. 오직 자신이 죽고 참음으로 고린도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림 없는 복음의 승리라는 영적 관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은혜는 바로 바울이 가졌던 영적 시각입니다.
★ 내 시각입니까? 하나님의 시각입니까?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던 그의 권리 포기는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이 중요하다는 통찰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들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은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불손하고, 가장 교만한 내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이라고 포장하는 기막힘입니다.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이사야 30:8-11절). 이 구절의 배경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 왕 치세입니다. 호세아는 처음에는 앗수르에게 화해하는 친 앗수르 정책을 폈지만 후에 반 앗수르 정책을 피면서 앗수르에게 맞서기 위해 애굽과 연합하는 정책을 핍니다. 이 정책에 대하여 이사야는 명망하는 길이라고 강력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독단으로 이 정책을 폈다가 결국 주전 722-23년에 사마리아가 함락 당하여 멸망하게 되는 비운을 맛보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에 대하여 정면으로 거부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그들의 행위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장면이 바로 이사야 30:8-11절입니다. 주님이 정의하신 멸망 직전의 북 왕국 상태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시대, 선견자들에게 선견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패역의 시대, 선지자들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는 참담함의 시대, 도리어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요청하는 무시무시한 시대, 바른 길을 버리라고 종용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엄청난 결과의 궁극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내 앞에서 떠나게 하라는 참극의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습니다. 이것을 오늘 설교의 테제로 적용하여 봅시다. 하나님의 시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는 세대, 오로지 내 시각만이 관철되기를 폭력적으로 압박하는 불신앙의 시대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철저한 분리를 요구하는 행위, 다시 말해 내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을 잠식하는 행위로 탄생하는 것이 바로 치료되지 않는 괴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비로소 인간이 되려는 순간부터 그 인간은 괴물이 됩니다. 오늘날 내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을 점령하면서부터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되고 만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시각일 뿐 하나님의 시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범사에 참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히브리서 12:1-3절). 하나님의 시각은 참으심이었습니다. 참음은 복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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