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7.02 지역셀사역2024-04-23 16:2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전반기 감사의 내용, 찾아보기 그리고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저 밭에 농부 나가 (찬송가 591장)
● 넓은 들에 익은 곡식 (찬송가 589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또 하나의 감사
● 본문: 시편 122:1-9
1) 본문의 시인이 있었던 먼 거리와 또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① 먼 거리: 본문 5절 참고
② 올라온 이유는? : 본문 4절 참고  

2) 존 스토트 목사의 일갈대로 ‘여호와의 집’ 혹은 ‘예루살렘’이 교회라면 오늘 우리들이 교회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본문을 중심으로 담임목사가 선포했던 두 가지의 감사의 이유를 말해 보자.

  

3) 적용하기
① 나는 우리 교회의 ○○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② 나는 2017년 후반기 이런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내며 살겠습니다.
③ 그런 사역을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기.  

 
사역하기 (WORK)
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다음 세대 제자훈련과 비전 트립과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건강과 치유를 위하여
(서정수, 최정희, 문혜경, 김문수, 강영자, 정시온)
●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서혜린, 이장규, 장종호, 이한빛, 이유정, 김양진)
●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 1부 반주자를 위하여
●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7년 7월 2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제목: 또 하나의 감사
본문: 시편 122:1-9

  오늘 본문은 시편 120편에서 134편에 이르는 15개의 시편 분류에 해당하는 시인의 노래입니다. 이 15편의 노래는 일종의 모음집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의 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15개의 시편들의 부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인데 왜 이러한 부제가 15개인지, 감리교신학대학의 구약학 교수인 왕대일 교수는 ‘시편 사색’에서 이런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문헌 탈무드는 그 이유를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문인 ‘니카르노 문(Nicanro gate)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문에 들어서려면 15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데 성전을 방문한 순례자들은 그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시편 120-134편의 시를 한 개씩 암송해야 했기 때문이다.” (p,232)
  또 하나의 이해는 ‘올라간다.’의 해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항상 그들의 정신 속에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토대가 시온 산 신앙이었습니다. 시온 산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온산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거룩한 곳 즉 성전의 의미였고 반면 이스라엘은 산 밑에 거하였습니다. 산 밑은 세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거룩한 성전을 찾아 올라가는 순례자들은 땅 밑에서 땅 위로 올라가는 행위를 포함하였기에 시편 기자는 120-124편의 15개의 시편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붙인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런 의미를 전이해하고 본문 1-5절을 읽으면 한결 이해하는 폭이 넓어집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성전에 올라가며 노래하는 시의 첫 편인 시편 120:5절을 보면 성전 순례를 오른 순례자가 머물고 있는 곳이 그려져 있습니다. ‘메섹’이라는 지명과 ‘게달’이라는 지명이 오늘날 어디를 정확하게 의미하는지는 말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럼에도 런던 대학교의 구약학 교수인 레슬리 알렌은 이렇게 추측했습니다. “앗시리아 참고문헌들에 의하면 메섹은 길리기아 북동쪽, 갑바도기아 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게달은 시리아 아라비아 사막과 관련이 있었던 아랍 유목 민족을 의미하는 것 같다.”(WBC 주석, 시편 하, P,252)
  그렇다면 이 지역들은 예루살렘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원거리인 터키 지역과 아라비아 지역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지금 이렇게 먼 거리에 머물고 있는 순례자는 지금 자기가 머물고 있는 그 장소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망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행하여 올라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이 순례자는 지금 자기가 이 먼 거리를 이동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가고 있는 분명한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본문 4절).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성전 순례자는 여호와의 지파들이 이전에 행했던 것을 자기도 행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성전 순례의 목적을 말합니다. 이전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자로 평가받던 존 스토트 목사는 ‘내가 사랑한 시편’에서 분명히 이렇게 시편 122편을 적용했습니다. “이 시편에 나오는 ‘여호와의 집’ 또는 ‘예루살렘’은 오늘날의 교회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교회를 위하여 우리가 가장 긴급하게 구할 것은 무엇일까?”(P,201)
  존 스토트가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그 교회에 너도 나도 감사하라는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교회에 감사하라고 설교하는 목사가 참 이상한 목사로 낙인찍힐 수 있는 것이 오늘 21세기의 현실입니다. 교회에 감사하라는 말이 불온하게 들리는 이유는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교회의 일탈로 인한 신자들의 거부감 때문입니다.
  교회만을 위한 교회, 세상을 전혀 돌보지 않는 폐쇄적인 교회, 목회자 숭배 진원지처럼 여겨지는 봉건적 교회 정치 구조, 대형교회들의 상식도 못하는 도덕적 윤리적 구태인 목회자 세습, 제왕적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는 당회의 악습, 세상 사람들의 가치보다도 훨씬 더 못한 믿는 자들의 비정상적 삶 등등으로 인해 교회가 이제는 기도를 해 주는 선한 영향력이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게 기도거리가 된 것에 대한 불신 등등이 교회에게 감사하라는 설교를 하면 시큰둥한 반응을 하게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우리 세인 교회라는 비가시적 교회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권하고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인정하고 있는 그리고 공감하고 있는 세인교회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성 때문입니다. 세인교회가 가고 있는 교회로서의 방향성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이타적 교회로서의 방향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가 몸부림치고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고 있는 정상의 정상화에 대하여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가 집중하고 있는 상식이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집하는 그 고집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 교회에 등록하여 예배하는 새로운 지체들이 다른 것 때문에 등록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말씀하심이라는 이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사람을 높임, 길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 외의 것들과 타협하지 않음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적어도 하나님의 식을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교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맥추절을 맞이하여 추슬러야 할 첫 번째 감사 이유입니다.
 
1) 그 교회만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평화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본문 6절). 교회를 통하여 얻어야 하는 것, 그리고 교회가 해야 하는 것, 바로 에이레네이며 샬롬인 평화입니다. 오늘도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고 선포하신 평강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정체성은 아주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에 의해서 증언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입니다(요 14:27).
  시인은 본문에서 연이어 바로 이 평안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는 평강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 평강을 얻고 감사하기 위해서 순례를 행한 것입니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본문 7-9절).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시기에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우리 세인교회의 머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임이 변하지 않는 것을 전제할 때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것에 감사하는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평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설교의 두 번째 교훈이자 또 하나의 감사 이유이기도 합니다.

2) 그 교회가 주는 평화는 산 밑의 사람들을 보듬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시편 120-134편의 순례시(巡禮詩)에 등장하는 시인은 성전이 주는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전에 오르면 영적인 만족,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영적인 감동은 단순히 마음의 평강을 얻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해결 받는 감동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세 제자들이 본 놀라운 광경은 주님의 모습이 변화되신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변화였습니다. 더불어 엘리야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까지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즉각적으로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반응이 떨어지자마자 그 황홀한 광경은 사라지고 예수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임합니다. 그 산 위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공표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산 아래로 내려와 주님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난 기사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신 사건임을 복음서 저자들은 동일하게 밝힙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산 위에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교회만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신 귀신들림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수많은 정신병에 노출되어 영적으로 죽어가는 산 아래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보듬는 일,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을 여는 곳은 교회가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문을 열어야 산 밑의 사람들을 찾아갈 수 있고 또 그들을 보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찾아가 보듬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평화입니다.
  교회는 산 밑의 사람들을 보듬고 달려가기에도 버겁습니다.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딴 짓할 때 진정한 보듬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인교회가 산 밑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길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는 산 밑에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선포하는 방향성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감사 조건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