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 (찬송가 190장) ● 갈보리 산 위에 (찬송가 15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색깔을 분명히 합시다. ● 본문: 고린도전서 7:32-40 1)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으로 읽은 본문에서 발견된 바울의 신학적 핵심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2) 설교 테마인 ‘신앙의 색깔을 분명히 하라’를 설명하기 위해 갈멜산 전투에 등장하는 인물 조명하기. ⓵ 주연, 부주연, 조연, 엑스트라, 카메오 ⓶ 가장 질 나빴던 엑스트라는? ③ ②번의 이유는? |
3) 적용하기 ① 나의 신앙적 색깔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 혹은 정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② 나의 신앙적 색깔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내 삶에 실천해야 할 행동지침을 정해 봅시다. | 사역하기 (WORK)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다음 세대 제자훈련과 비전트립을 위하여 (7/24-27) ● 피선교지들을 위하여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건강과 치유를 위하여 (서정수, 최정희, 문혜경, 김문수, 강영자) ●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서혜린, 이장규, 장종호, 이한빛, 이유정, 김양진) ●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들을 위하여 ● 1부 반주자를 위하여 ● 담임목사의 사역이 승리할 수 있도록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6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4번째 강해) 제목: 색깔을 분명히 합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7:32-40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그들이 경험했던 심리적인 상태(어떤 때는 뜨겁고, 어떤 때는 슬픈)가 우리와 같습니다. 이들을 소개하고 있는 누가는 이들의 삽화 기사인 누가복음 24:13-35절 사이에 단 한 번도 이들을 ‘제자’ (마쎄테스)라고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호칭은 대명사와 숫자(13, 15, 18, 28-32, 35절)였습니다. 누가가 이들을 의도적으로 인칭화와 대명사화 한 것은 적어도 독자들에게 신앙적 색깔이 없는 자는 제자일 수 없음을 교훈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줍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내용들을 요약하면 이런 것들입니다. ⓵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결혼관에 대한 시시비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⓶ 결혼한 자와 결혼하지 않은 자 공히 주님과 배우자 중에 누구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제적 요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⓷ 오히려 서로 상충하는 고린도교회의 시대적인 상황에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압박이 들어오는 경우 질질 끌려 다니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 결혼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은 배우자도 염려하고 주님을 잘 섬기는 것도 염려하는 것인데 그 염려를 하지 말라. ⓑ 미혼의 남자들 중에 약혼자에게 의무감을 가졌기에 그녀와 결혼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괜찮은 일이다. ⓒ 그러나 만에 하나 약혼녀를 자유롭게 해주고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것은 더 지혜롭게 선택한 것이다. ⓓ 과부들에게는 남편이 죽었다면 주 안에서 믿는 자와 재혼하는 것도 가하지만 혹시 목회를 하려고 하든지 주님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려는 사람이라면 혼자 지내는 것을 독려한다.
톰 라이트는 본문을 결혼에 관한 담론으로 해석하지 않고 신앙적인 색깔을 분명히 하라는 교훈으로 접근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가 이끌고 주도하던 삶의 라이프 스타일대로 끌려 다니지 말고 고린도에 세워진 고린도교회라는 이방 도시에 세워진 교회에 맞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영적 색깔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가정을 섬기는 것이 옳다면 그것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라면 그것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부연하지만 바울은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의 색깔을 분명히 하라는 점을 명시합니다. 그의 신학적 초점은 본인이 독신으로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그런데 나라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라고 부연한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도 메시지 번역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면서 본문 35절을 번역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크게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생활방식을 발전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해석의 결과, 우리는 오늘 주시는 말씀의 교훈을 아주 선명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 줄타기 하지 말고 신앙의 색깔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회색분자, 혹은 경계선에 서지 말고, 줄타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양면 중에 한 면을 선택한다면, 그리고 그 선택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그 쪽을 택하여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국한하여 예를 든다면 이런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내가 결혼을 한 기혼자로서 나는 아내나 남편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명이라면 주님의 일에 소홀하게 되더라도 그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것가지고 경우에 따라 여기에 붙고, 또 저기에 붙는 그런 질질 끌려 다니는 회색분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미혼의 상태인데 결혼 대상자의 상태에 따라 내 소위를 결정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약혼자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신앙적 기회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권고에 가까운 성경적 증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그의 전 인생을 통하여 사람을 기쁘게 한 적이 없고 그런 목회를 해 본 적도 없다고 천명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역자가 되겠다는 결단이 이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역설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좋게 하는 사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사람에게 굴복하는 인생을 사는 자가 경우에 따라 하나님께 충성했다가, 경우에 따라 하나님께 완전히 등 돌리고 ‘하나님 몰라’로 사는 인간보다 낫다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예는 엘리야의 갈멜산에서 450:1의 영적 전투 기사(열왕기상 18장)입니다. 이 갈멜산 전투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무대 인물들은 주연 배우- 엘리야, 부(副)주연 배우- 바알 선지자 450명, 조연급 배우- 아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 전투 신에 등장하신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는 자들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열왕기상 18:21절). 엘리야의 비수 같은 예언적 목소리에 얼마나 가증스러웠는지 말 한 마디 고하지 않고 눈치를 보고 있던 기회주의자들이 갈멜의 영적 상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분명한 영적, 신앙적 색깔을 갖고 등장하는 카메오도 이 장면에 등장합니다. 바로 오바댜입니다. 가장 영적으로 바알리즘의 극점에 있었기에 캄캄했던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신앙을 목숨 걸고 지켰던 카메오 오바댜가 있었음을 열왕기상 18:3-4절은 이렇게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이 장면은 오바댜의 걸출한 신앙적 결단과 색깔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반면 머뭇머뭇 거리던 갈멜산 상의 기회주의적 군중들에 비해 더 개인적으로 유감스러운 또 다른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바로 오바댜의 섬김을 받은 바로 그 100명의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암흑의 시대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하나님의 사람들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오바댜보다는 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서 있어야 마땅한데 그들이 굴속에 숨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는 외롭게 바알 선지자 450명과 싸우던 엘리야의 자리인 갈멜 산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100명 중 그 누구도 갈멜 산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본인들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기회주의적인 인생을 산 신앙인의 이름으로 사는 불신앙인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훈하자면 갈멜산 전투에 등장하는 무대 인물 중에 가장 질 나쁜 자들은 머뭇머뭇 하는 군중들보다도 굴속에 숨어 연명하던 100명의 예언자들입니다. 신앙인의 이름으로 살면서 신앙인의 색깔과 비슷한 카멜레온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바로 그들, 100명의 예언자 말입니다.
마크 부캐넌 목사가 쓴 ‘너의 하나님은 너무 안전하다.’에 나오는 글에 “나는 지금까지 목회자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투자를 하는데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요청을 하는 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많이 들었지만, 올바르게 사는 신앙의 지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교인은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p,63) 올바르게 사는 신앙의 지침이 신앙의 색깔입니다. 우리 세인 공동체는 갈멜 산 위에 올라서서, 그 갈멜 산이 우리 교회가 서 있는 현장이 되게 하십시다. |
|